"그래요, 저 나쁜 아이예요!"

교실바닥에 떨어진 휴지를 줍지 않는 아이들

등록 2007.06.24 15:53수정 2007.06.24 1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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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금요일(22일)이었다. 수업을 하려고 보니 교실 바닥에 휴지가 여러 장 떨어져 있었다. 나는 주번을 불러 청소를 시킬까 하다가 우연하게 눈이 마주친 한 아이에게 다가가 세상에서 가장 환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이렇게 말했다.

"바닥에 휴지가 많이 떨어졌네? 오늘은 우리 ○○가 착한 일 한 번 해볼래?"
"싫은데요."

웃는 낯에 침 못 뱉는다고 했던가? 하지만 아이에게 그런 속담의 보편성은 통하지가 않았다. 나는 무안하고 황당했지만 그렇다고 화가 치민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아마도 그 상황의 연극적인 분위기 때문이었으리라. 연극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교사와 학생 사이에 그런 대사가 오고갈 수 있었겠는가. 우리의 연극대사는 또 이렇게 이어졌다.

"그래? 그럼 내가 줍지 뭐."
"그러세요."

다행히도(?) 아이는 내가 허리를 굽혀 휴지를 줍자 조금은 미안했는지 '에이 농담이었어요!'하는 표정을 내게 지어보였다. 하지만 교실 바닥에 떨어진 휴지를 모두 주어 휴지통에 버리고 돌아올 때까지 아이는 미동도 없었다. 나는 교탁으로 다시 돌아와 아이에게 이렇게 말했다.

"오늘 너하고 나하고 주고받은 말은 무슨 영화에나 나올만한 대사였어. 제목은 나쁜 아이 시리즈 정도가 되겠지. 물론 넌 농담으로 한 말이었겠지만."

정말 농담이었을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그럴 수 있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아니라면 면죄부를 준 셈 치면 될 일이다. 그런데 돌은 다른 곳에서 날아왔다.

"선생님 쟤 농담 아니었어요. 본래 애가 좀 그래요."
"야, 너 정말 너무 한 거 아니냐? 어떻게 선생님한데 그럴 수가 있어?"
"맞아, 넌 정말 나빠. 선생님 다리도 불편하신데."


다리가 불편한 것은 얼마 전에 산에서 내려오다가 발을 삐었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병원치료를 받고 2주째 석고붕대를 하고 있던 터였다. 나는 내 다리를 염려해준 아이가 눈물겹도록 고마웠지만, 그 말이 나를 생각해서 한 말인지, 아니면 급우를 비난하기 위해서 한 말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아마도 나를 생각해서 그랬겠지만.

수업이 끝나고 청소시간이 되었다. 본관 건물 뒤편에서 남자반 아이들과 청소를 하고 있는데 나와 연극대사를 주고받았던 그 아이가 동무와 함께 나를 찾아왔다.


"선생님, 아까는 제가 말을 잘못했어요."
"그래 고맙구나. 앞으로는 농담이라도 그렇게 말하면 안 돼. 알았지?"
"예, 선생님 제가 생각해도 너무 잘못했어요. 죄송해요, 선생님"
"그렇게 생각하면 된 거야. 고맙다. 잘 가라."

이런 경우, 나는 다른 사람에 비해 코끝이 좀 예민한 편이다. 나에게 깍듯이 인사를 하고 사라진 아이의 뒷모습이 흐려보였다.

다음 날 수업시간, 여느 때처럼 일일이 이름을 부르며 눈을 맞추는데 그 아이가 유난히 빛나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길을 받으면서 나는 어제 아이를 심하게 나무라지 않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제 우리가 이런 대화를 주고받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바닥에 휴지가 많이 떨어졌네? 오늘은 우리 ○○가 착한 일 한 번 해볼래?"
"싫은데요."
"그래? 그럼 내가 줍지 뭐."
"그러세요."

"뭐야? 너 금방 뭐라고 했어? 세상에 어떻게 선생님께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 널 그렇게 보지 않았는데 너 정말 나쁜 아이구나."
"그래요 저 나쁜 아이에요. 그걸 이제 아셨어요?"

"뭐? 너 정말 인간성에 문제가 있구나. 다른 것은 용서가 돼도 인간성이 나쁜 것은 용서가 안 돼."
"그럼 용서하지 마세요."


장면은 교실에서 교무실로 바뀐다.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교무실로 들어온 교사는 자리에 앉자마자 길게 한숨을 내쉰다.

"휴, 원 세상에 기가 막혀서."
"무슨 일이 있었어요?"
"와, 정말 교직에 들어온 것이 이렇게 후회가 될 수가 없네요."

"무슨 일이 있었는데 그러세요."
"수업을 하려고 보니까 바닥이 너무 더러운 거예요. 그래서…."
"와, 걔 정말 인간성에 문제가 있네요."


이런 상상은 우울하지만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아니, 십중팔구는 이런 불행한 상황으로 정리될 가능성도 농후하다. 그렇다면 누구에게 잘못이 있는 것일까? 이 문제를 네티즌 토론방에 올려놓으면 교사와 학생 사이에 열띤 논쟁이 벌어질 것 같다. 물론 팔은 안으로 굽기 마련이다. 하지만 팔이 바깥으로 굽을 줄도 알아야 생산적인 논쟁이 될 수 있다.

앞에서 가정해본 교사와 학생 사이의 불행한 대화는 서로의 피상적인 소통관계에서 문제의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어떤 조건과 환경에서도 아이들과 소통하려는 마음을 놓지 않는다면 문제는 생각보다 쉽게 해결될 수 있다. '나쁜 아이' 시리즈에나 나올 법한 아이가 청소시간에 나를 찾아와 깎듯이 사과를 하고 돌아간 것처럼 말이다.

그 다음 날 오후, 교무실에서는 한 바탕 폭소가 터졌다. 자초지종은 이랬다. 전날 내 이야기를 전해들은 한 후배 교사가 교실에 들어가 아이들에게 이렇게 물어보았다고 한다.

"평소 교실에 떨어진 휴지를 줍는 학생은 손을 들어보세요."

그때 한 아이가 모기만한 소리로, "저요"하고 대답을 했을 뿐, 다른 아이들은 묵묵부답이었는데, 그 다음이 압권이었다. 후배교사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그런데 두 아이가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거예요. 그러더니 빗자루를 들고 교실을 쓰는 거 있죠. 이 녀석들이 제 말을 청소하라는 말로 오해한 거예요. 저도 수업시간에 교실이 지저분하면 청소부터 시키는데 꼭 큰 소리가 나고서야 자리에서 일어나곤 했거든요. 그런데 오늘은 아주 조용한 소리로 묻기만 했는데 애들이 지들 알아서 그런 거예요."

후배교사는 그것이 정말 신기한 듯 동그란 눈을 여러 번 깜빡거렸다. 나는 오랜만에 기분 좋게 웃어젖히다가 이렇게 말했다.

"앞으로도 그런 우회전술을 쓰면 되겠네요."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월간지 <사과나무>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월간지 <사과나무>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학교 #교실 #휴지줍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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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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