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무협소설 <천지> 223회

등록 2007.06.27 08:13수정 2007.06.27 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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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각증상을 느낄 때쯤이면 이미 정신은 집중할 수 없게 되고 몸은 더욱 처지며 나른해진다. 그리고 자꾸 눕고 싶어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진가려는 그 전에 윤석진과 계속 연락을 하고 있었고, 그 날 윤석진이 돌아올 것을 알고 있었을 뿐 아니라 이미 사부를 시해하고자 통모하고 있었다는 말이구려.”


백도는 품속에서 두 장의 아주 작은 종이를 꺼내 놓았다. 꼬깃꼬깃 접혀있었던 듯 보이는 그것은 분명 전서(傳書)가 분명했다.

“물론이지. 진가려와 윤석진은 항상 연락을 취하고 있었지. 진가려는 윤석진의 첩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니까. 하나는 윤석진이 돌아오기 사흘 전에… 또 하나는 들어오는 날 아침에 전달된 것 같더군.”

“전서구(傳書鳩)를 이용해…?”

“아니… 진가려는 전서구를 사용할줄 모르는 계집이었어. 운중보 내의 누군가가 받아 전해 준 것이지. 나는 그 누군가를 찾기 위해 며칠을 헤맸지만 아직 조그만 단서조차 얻지 못했다.”

“혐의를 둘 만한 사람이 있소?”

“그 전서를 전해줄 가장 혐의가 짙은 사람이라면 바로 너에게 말해 준 궁가 계집이지. 궁가 계집과 진가려는 서로 민대질을 하는 사이였으니 말이다.”


듣기에도 낯 뜨거워지는 말이다. 설중행은 또 한 번 놀랐다. 궁수유의 분방함이야 이미 어느 정도 알고 있었지만 같은 여자하고 까지 그랬으리라곤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아니 그녀가 천궁문(天宮門) 출신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가능한 일이라 생각할 수도 있었다.

궁수유가 왜 진가려의 처소에 있는 비밀통로에 있었는지, 그리고 왜 진가려를 찾아갔는지 이해가 되었다. 왜 자꾸 그러한 사실을 자신에게 감추려 했던 지도….


“또한 한때 윤석진과 궁수유는 몸을 섞은 적도 있었어.”

“후후….”

실소가 저절로 흘러나왔다. 이곳을 떠나기 전 여자라면 오직 궁수유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그것은 이곳을 쫓겨나가서도 한동안 그러했다. 하얀 나신과 감미로운 입김… 달뜬 신음소리…. 왠지 배신감이 들었다.

한때는 그녀의 사랑을 얻기를 갈망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이제는 그녀의 사랑을 얻은 것으로 생각했다. 허나 그것은 뜬구름이었다. 그녀가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하든 하지 않든 그녀는 내 아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될 사람이다. 연무각에서 궁단령이 남궁정에게 보여준 눈빛만으로 짐작은 했다. 어차피 내 여자가 아닌 타인의 여자다.

“정작 윤석진과 진가려를 꿰뚫어 놓은 사람은 누구요? 누가 그 침상 밑에 있었던 것이오?”

설중행이 상념을 떨쳐버리고 불쑥 물었다. 갑작스런 물음에 백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중요한 것이 아니야. 나에게는 아직 반드시 해야 할 사부의 복수가 남아있다는 사실이지.”

설중행은 백도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과연 백도의 말을 모두 믿어도 되는 것인지 자신도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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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무지례에 대한 충격이 가시기도 전에 추태감의 점심초대에 대해 시작된 육파(六派)의 회합은 한마디로 갑론을박(甲論乙駁)이었다. 정확히 말해 일방(一幇)과 곤륜(崑崙)이 빠진 오파(五派) 인물들 간의 의견은 본래부터 합치될 수가 없었다.

중원에서 육파일방이라고 묶어 부르기도 하고, 또한 그들 사이에는 오랜 동안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해왔던 것도 사실이었다. 서로를 돕기도 했고, 연합해 탕마멸사(蕩魔滅邪)의 기치를 높이 들며 중원 무림을 횡행하기도 했다.

허나 그것도 서로의 이익이 합치될 때나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합치되더라도 그 합치된 의견을 추진해 나갈 수 있는 충분한 힘이 있을 때나 가능한 일이었다. 힘의 논리는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지만 그것을 가지지 못할 때에는 중구난방(衆口難防)이 되기 마련이었다.

언제나 같은 길을 걸을 것이라 생각했던 육파의 회합은 시작도 하기 전에 이미 파탄이 나기 시작했다. 그들이라고 지금 운중보 내부에서 벌어지고 있는 위험하고 심각한 사건들을 모르는 바도 아니었고, 또한 자신들이라고 해서 피해갈 수 있는 안전한 위치에 있는 것도 아니라는 생각은 동일했다.

허나 각파의 이익과 입장은 각기 달랐다. 이미 회합이 시작되기 전부터 입장은 극명하게 갈린 상태였다. 조금 전 연무각에서 화산의 자하진인(紫霞眞人)과 이미의 회운사태가 보여준 태도는 나머지 삼파(三派)의 공분을 사기에 충분했다.

특히 소림에게는 등을 돌리는 짓이었다. 비록 파문을 했다고는 하나 광나한에 대한 기대는 소림원로들에게 있어 또 다른 희망이었다. 소림의 특성 상 산문 밖에서 움직이는 제자는 속가제자(俗家弟子)들 뿐. 산문 안에서 바라보는 세상과 직접 그 세상에 뛰어들어 경험하는 것은 다르다.

그리고 이제 소림도 그 경험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끼고 있던 터였다. 나중이라도 광나한은 다시 소림으로 돌아와, 아니 산문 밖에 있더라도 소림을 위해 많은 도움을 줄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존재였던 것이다. 더구나 광나한이 운중보의 수석교두가 되었다는 소식에 소림은 더욱 그 기대를 키워갔던 것이다.

헌데 그가 죽었다. 좌등에게 패하고 자결하는 모습을 지켜보아야 했던 각원선사와 지광으로서는 피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그런데 눈엣가시처럼 화산이 나서서 좌등을 옹호하다니….

무당 역시 마찬가지였다. 청정무구(淸淨無垢)의 도장(道場)이라는 무당에 환관들이 드나들기 벌써 이백여년이 넘었다. 그럴듯한 도복(道服)을 걸치고는 있으나 무당(武當)의 장문인인 청송자(靑松子)는 좋게 말하면 무골호인(無骨好人)이었고, 나쁘게 말하면 적당하고 대충대충 넘어가는 성격의 전형적인 인물이었다. 그러한 성격 때문에 장문이 되었다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동창에서 보면 아주 적당한 인물이 바로 청송자였다.

점창(點蒼)의 사공도장(四空道長) 역시 우유부단한 성격의 소유자로 명분에 매달리는 인물이었다. 그는 당연히 소림과 무당을 택했다. 그 이면에는 욱일승천의 기세로 육파의 선두로 치고나오는 화산에 대해 시기심과 경계심이 한몫 했을 것이다.

어쩌면 이미 예견된, 언젠가는 반드시 부닥쳐야 할 전통 보수와 신흥 개혁의 이념적인 부닥침이었을지 몰랐다. 결국 그들은 어떠한 합의나 지금껏 그래왔듯이 공동의 행보를 하지 못하고 갈라섰다.

추산관 태감의 점심 초대에 응한 쪽은 소림과 무당, 그리고 점창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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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갈등은 교두들 간에도 있었다. 이미 교두들 중 수장이었던 수석교두 광나한이 죽었고, 환영교수(幻影巧手) 반일봉(潘馹鳳) 역시 유명을 달리한 상황에서 그래도 나설 수 있는 인물이 백도에게 지독하게 당한 단양수(斷陽手) 마궁효(馬躬效)와 어떤 일이든 나서길 싫어하는 탈명화운(奪命花雲) 정이랑(鄭二朗) 뿐이었다.

백도에게 당한 마궁효가 이를 갈며 광나한의 복수를 선동하고 있었던 반면에 탈명화운 정이랑은 교두 본분의 자세를 견지할 것을 주장했다. 교두들이란 문하생의 교습과 관리가 주 임무다. 좀 더 지켜보자는 것이 정이랑의 주장이었다.

허나 이미 반일봉의 죽음에 대해 교두라는 동료의식과 막연한 피해의식을 가지고 있던 교두들 마음속에 복수를 해야 한다는 생각을 굳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광나한의 죽음은 교두들에게 충격 이상이었다. 교두로서의 체면은 이제 간 곳이 없다.

마궁효의 주장에 정이랑은 결국 동조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들은 육파와 함께 추태감의 점심초대에 응하게 되었던 것이다.

운중보는 숭무지례를 기화로 극명하게 패가 갈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일촉즉발의 긴장이 흐르기 시작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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