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배자, 벌레 끓여 물들여요

[물들임 15] 나의 간절함과 진심이 통한 보랏빛 꿈

등록 2007.06.27 14:22수정 2007.06.28 0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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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가 시작되었는데 아직 큰 비는 없으니 다행이랄까, 이런저런 준비를 단단히 하던 농부들은 하나라도 더 다독이며 대비하려는 마음에 오가는 발길이 더욱 분주하다.


눅눅한 기운이 주변에 맴돌아 몸은 물 먹은 솜처럼 무겁고 척척 늘어져 덩달아 손놀림까지 멈칫거리니 쌓여 있는 원단들이 걱정이다. 물을 들이지 않은 원단의 보관도 문제인데 물들여 놓은 것의 관리도 긴장을 늦출 수 없는 일.

a 백반과 철로 후매염한 실크스카프. 제주의 손님은 이 스카프를 보고 주문했다.

백반과 철로 후매염한 실크스카프. 제주의 손님은 이 스카프를 보고 주문했다. ⓒ 한지숙

염색을 할 때, 적은 양을 하진 않는다. 어쩌다 특별 주문이 있어 스카프 한 장을 하게 되는 경우도 있고, 면 세 마쯤의 주문량에 맞춰 물들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때마다 스카프 몇 장, 면 몇 마를 염료에 함께 담그는 일이 허다하다.

그러다 보니 밖으로 나가는 염색물 외에 집에 남아 쌓이는 염색 원단도 자꾸 늘어나는데 이런 것들 싸안고 뒹굴리는 마음이 그리 편치만은 않다. 자칫 몇 달이고 돌지 않는 '재고'가 될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a 정련한 원단들을 함께 물들이는 경우가 많다.

정련한 원단들을 함께 물들이는 경우가 많다. ⓒ 한지숙

지방의 어느 사찰에서 가게를 운영하는 후배가 속사정을 알고는 스카프 수십 장을 거둬간 적이 있다. 관광지라 비싸면 쉽게 팔리지 않으니까 반값에라도 치워버리자는 강경한 태도로 절반 가격을 고집한 건, 자꾸 뒷걸음질치는 나의 속내를 읽었기 때문이리라. 염색을 할 때의 마음도 늘 조심스럽고 긴장되지만 완성품의 가격을 매길 때 또한 많은 시간 고민하고 조심스러운 부분이다.

드문드문 팔리긴 한가 보다. 잊을 만하면 한 번씩 전화를 걸어와 내 일처럼 기뻐하는 목소리로 스카프 몇 장 팔렸음을 알려주는 후배.


"혹시, 강매하는 건 아니니?"

농담을 건네긴 하지만 씁쓸한 마음 뒤안으로 고마움도 잇따르니 어쩔 수 없는 장사꾼인가 보다.


a 붉나무 벌레집인 '오배자'를 삶는 과정.

붉나무 벌레집인 '오배자'를 삶는 과정. ⓒ 한지숙

그녀도 나도 바쁜 낮시간엔 좀처럼 통화가 불편한데, 얼마 전 한낮에 전화를 걸어왔다.

"언니, 제주도분들인데 오배자스카프 32장이 필요하대! 주소 좀 얼른 받아 적어!"

절집이라 잿빛 먹물염이 인기 있을 줄 알았건만, 스님에게 선물할 요량의 손님이 아니면 화사한 빛깔이나 특히 보랏빛을 선호한다고 했다. 오배자염색의 연한 노란빛과 철매염한 보랏빛 스카프를 보고 그것과 똑같은 스카프를, 그것도 딱 '32장'이어야 한다며 끊어버리니 바쁜 후배를 붙잡고 시시콜콜 물을 수도 없고, 난감했다.

a '오배자-수세-백반-수세'의 과정을 2회째 진행중.

'오배자-수세-백반-수세'의 과정을 2회째 진행중. ⓒ 한지숙

최근에 새 스카프를 주문한 적이 없어 단골 스카프 가게에 설명을 잘해야 했다. 시폰(chiffon 얇게 비치는 가벼운 직물)도 여러 종류지만, 그때 내가 물들인 견본을 보내는 등의 번거로움으로 여유 부릴 시간이 없어 그쪽에 일임을 하고 35장을 주문했다. 석 장 정도는 얼룩 등의 실패를 예상해야 하고, 이럴 때 남는 나머지에 치이기 싫어 풍족한 여분은 둘 수 없었으므로.

읍내에 거래하는 건재상에 오배자도 주문하는데 이번엔 중국산밖에 구할 수 없단다. 국산과 중국산 오배자의 가격 차이는 두 배다. 물을 들이는 데 쓸 것이면 싼 중국산도 별반 큰 차이 없다고들 하지만 난 그동안 두 배 이상인 국산을 고집해 왔다.

a 감물염(3색)과 오배자염(철)으로 만든 양면 챙모자.

감물염(3색)과 오배자염(철)으로 만든 양면 챙모자. ⓒ 한지숙

도착한 스카프와 오배자들을 싸안고 이웃으로 건너갔다. 면 종류는 비눗물에 삶고 빨아 말리는 것으로 정련을 해두는데, 스카프는 하루 정도 물에 담가 풀기를 빼는 정도의 정련을 거친다. 스카프는 10장 이상을 한꺼번에 물들인 적이 없다.

조심을 하고 정성을 들여도 한두 장은 어느 곳엔가 흠집이 생기고 두세 장에 어른거리는 얼룩쯤은 감수를 해야 하므로 늘 몇 차례로 나누곤 한다. 32장 역시 세 번 정도 나누어 해야 하는데 내 작업장도 아니고, 고객이 맞춰달라는 시간을 미룰 수 없어 이번엔 단번에 많은 양에 도전한 것.

a 동백잎, 오배자, 복합염의 실크스카프들

동백잎, 오배자, 복합염의 실크스카프들 ⓒ 한지숙

미지근한 물에 담가 놓고 다음날 건너가니 아뿔싸! 스카프 두 장이 여기저기 실밥이 틀어지고 연한 풀물까지 든 채 잔디밭에 나동그라져 있는 것이 아닌가. 큰 함지박 두 개에 나누어 물에 담그면서 아무 생각 없이 낮고 편평한 바위에 올려놓고 갔는데, 밤새 그 집 강아지들의 장난감이 되어 버렸다.

여분으로 주문한 덕분에 안심하고 서둘러 물을 들였지만 이번엔 철매염 과정에서 얼룩이 묻어나 강아지들의 장난감을 포함한 7장이 실패다.

다시 주문하고 어쩌고 할 여유마저 없으니 부글거리는 속 끓음을 애써 꾹꾹 누르고 28장만을 배송했다. 물들이면서 일어난 사흘 동안의 구구한 사정과 양해를 바라는 내용의 정중하고도 간절한 마음을 실은 편지 한 통에 차액까지 꼭꼭 여며서(후배를 통해 건너온 선금, 미리 받는 것이 이래서 불편하고 어렵다).

a 왼쪽의 두 빛깔이 오배자염. 철매염 한 것을 비눗물로 후처리 하면 잿빛에 가까워지기도.

왼쪽의 두 빛깔이 오배자염. 철매염 한 것을 비눗물로 후처리 하면 잿빛에 가까워지기도. ⓒ 한지숙

이틀 뒤 제주의 사무장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후배네 가게에서 본 것과 조금 다른 종류의 스카프지만 이것도 마음에 든다, 물들일 때마다 조금씩 다른 빛깔로 드러나는 염색의 흐름을 이해하기에 이번의 보랏빛도 충분히 곱다, 어쩜 편지를 이리도 정성스레 썼느냐…. 그런데, 꼭 32장이 필요하니 넉 장을 더 해 달라, 다른 화사한 빛깔 한 장을 추가해 달라!

a 염색면과 일반면의 어울림, 양면벙거지.

염색면과 일반면의 어울림, 양면벙거지. ⓒ 한지숙

주문량에도 못 미치는 분량에 포장도 어설픈 채 배송하여 조마조마하고 뒤숭숭하게 보낸 며칠, 전화기 너머 들려오는 그분의 따뜻한 목소리 한 마디로 묵은 체증(滯症)이 모두 쓸려 내려간 듯 말끔해졌다.

흐린 날 손바닥만한 볕 한 줌 싸안은 듯 청량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으니 다음으로 이어진 염색은 실수 없이 온전하게 물들여져 일사천리로 진행되었음은 물론이다.

간사하게 너울거리기도 화사하게 춤추기도 했던 며칠의 시간. 제주행 편지 끄트머리에 내가 제일 아끼며 들여다보는 매화 사진 한 장을 담아 보냈는데, 나의 간절함과 진심이 그분의 가슴에도 곱게 녹아내린 것일까.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자연을닮은사람들(www.naturei.net)'과 '경남연합일보(www.gnynews.co.kr)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자연을닮은사람들(www.naturei.net)'과 '경남연합일보(www.gnynews.co.kr)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오배자염색 #후매염 #백반매염 #철매염 #벙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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