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오라비 같았던 '마지막 수배자 윤한봉'

윤한봉 민족미래연구소장, 27일 오후 지병으로 별세

등록 2007.06.28 12:18수정 2007.06.29 0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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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27일 오후 1시 30분, 5·18 광주항쟁의 마지막 수배자 윤한봉이 지병으로 눈을 감았습니다.


"지금 막, 형님이 운명하셨네…."

전화선을 타고 들려오는 남편의 목소리가 흡사 꿈결처럼 들렸습니다.

광주의 아픔을 온몸으로 끌어안은 사람

a 윤한봉 전 민족미래연구소장

윤한봉 전 민족미래연구소장 ⓒ 오마이뉴스 이주빈

60평생 기쁨도 있었겠지만 윤한봉 선배는 누구보다도 시련이 많은 생을 산 사람이었습니다. 부러질지언정 휘지 않는 성격 때문에 스스로 자초했던 고통도 컸습니다. 젊음의 특권, 정의감이 살아 숨쉬는 20대 청년시절 '민주화 운동'에 뛰어든 것은 그 시절 청춘치고 특별한 선택이 아니었습니다.

대학도 잘리고, 감옥도 가고, 어쩌다 그는 미국으로까지 밀항을 하게 되었습니다. 심상치 않게 돌아가는 정세 속에서, 조만간 밀려 올 대대적인 탄압 국면 속에서 광주가 감당해내야 할 피비린내 나는 사투를 예감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먹을 수도 없고 뱉을 수도 없는 호남인의 정신적 지주 '김대중'. 그 정치인이 갖고 있는 빛과 그림자 때문에 광주 바닥이 극심하게 요동 칠 상황은 불 보듯 뻔한 것이었고, 아마도 윤한봉은 호남의 반독재투쟁은 다른 지역과 다른 강도의 전략이 필요하다는 판단을 내렸을 것입니다.

그래서 장기전에 필요한 충분한 대비, 그 숨고르기의 와중 속에서 어찌어찌하여 미국으로 떠나게 됐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윤한봉이 떠난 뒤 걷잡을 수 없는 폭풍이 밀려 왔습니다. 공수부대의 장갑차가 광주를 짓밟고, 마치 동족상잔처럼 우리 군부대가 겨눈 총알이 광주시민의 가슴을 뚫었습니다.

그때부터 오도 가도 못하고 미국 땅에 발이 묶인 그는 12년 동안 내 나라 땅을 밟지 못하는 떠돌이가 되었던 것입니다. 고향 땅의 참혹함을 시시각각 지켜보면서 오지 못하는 마음은 어떠했겠습니까.

국내의 반독재투쟁 동지들과 함께 하겠다는 의지와 동강 난 내 나라의 평화통일을 위해 그는 미국 땅에서 다시 시작했습니다. 뜻을 같이 하는 교포들의 모임을 조직한 것입니다. 약칭해서 '재미 한청연'은 이렇게 태어났습니다.

고국의 반독재투쟁을 지원하고, 분단국가의 실정과 통일의 당위성을 세계인에게 호소하고, 가난과 인종차별로 고통 받는 소수민족의 인권을 위해 투쟁하고. 그가 하는 일은 미국에서라고 다를 것이 없었습니다.

고국의 동지 생각하며 미국에서 금욕 생활

감옥에 갇히고 두들겨 맞고 수배로 길거리를 방황하는 내 나라 동지들의 고통과도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내 땅에서 핍박받는 동포들을 잊지 못해 풍요가 넘쳐나는 미국 땅에서도 그는 철저하게 금욕생활을 했다고 합니다.

가시처럼 마른 몸매에 형형한 눈빛만 살아 돌아 온 윤한봉을 만난 것은 남편 때문입니다. 윤한봉 선배와 남편은 이웃 마을 출신의 선후배입니다. 고향도 같고, 뜻도 같고. 선배와 남편은 늘 같은 길을 걸었습니다.

남편이 사랑하고 존경하는 선배, 아니 선배라기보다는 피를 나눈 동기간처럼 끈끈했던 형님. 윤한봉 선배를 처음 본 내 느낌은 조금 황당했습니다. 깡마른 체격에 빠른 말씨. 그 연배의 다른 남자들하곤 사뭇 색깔이 달랐습니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거침없이 쏟아내는 생각들. 저렇게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떠들다가는 '왕따'되기 십상이란 생각이 절로 들었으니까요. 대꼬챙이 같이 꼿꼿한 성격의 선배는 처신 잘 하고, 야합과 술수에 능해야 살아남는 정치판 사람들과는 상극이었습니다.

아무리 왕년의 운동권 동지라 할지라고 그 행보가 어지러우면 가차 없이 비판을 하던 사람이었지요. 속에 든 생각은 있어도 차마 옛 정 때문에 또는 이리저리 얽힌 인간관계 때문에 적당히 넘어가는 우리들과는 애초부터 종자가 다른 사람이라 하면 맞을까요?

호남인 치고 DJ선생에게 목숨 걸지 않는 사람 몇이나 되겠습니까. 그 양반만이 희망이고, 그 양반의 비상만이 우리의 쌓인 한을 풀 유일한 길이고, 그의 성공이 우리의 성공이었던 시대, DJ, 그는 호남의 메시아였습니다.


호불호를 떠나서 친소를 떠나서 남녀노소가 가장 쉽게 힘을 뭉칠 수 있는 방법은 호남인의 '일편단심' DJ를 위해서였을 때뿐일 겁니다. 그런 정치 지도자를 내가 알기론 광주바닥에서 유일하게 '윤한봉' 만이 내놓고 비판을 했던 것입니다.

가진 자가 마땅히 해야 할 사회적 책무를 요구하는 것도 윤한봉 만큼 서슬퍼런 어조로 거침없이 일갈을 가하는 사람도 드물었습니다. 자기 자신의 이익을 위해선 그만큼 사심이 없었다는 이야기가 되겠고 제몫 찾으려는 계산이 없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덕분에 그를 따르고 존경하는 사람도 많았지만 기피하는 사람도 많았던 것이 생각납니다. 어린 아이처럼 맑고 단순한 마음을 가졌던 사람. 잔정도 많았습니다.

"다른 사람은 다 잘 나가는데 어째서 그 집 서방은 되는 일이 없냐?"고 안쓰러워하면서 뭐 하나라도 더 주고 싶어 눈을 두리번거리던 선배 모습. 그럴 때면 꼭 친정 오라비 같아 가슴이 울컥하던 추억이 떠오르네요.

형님 없는 광주는 너무 쓸쓸합니다

옳고 그름이 분명하고, 발걸음도 분명했지만 그렇다고 그의 가치와 판단이 전부 옳았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기득권층에게 흔히 나타나는 부도덕과 탐욕을 못 견뎌했던 그였기에 없는 자에 대해선 무조건 후한 점수를 주고 지지해 주는 경향이 있을 정도였으니까요.

찌그러지고 못난 사람은 그래서 제 밥그릇도 못 챙기고 징징대는 사람은, 설령 허물이 있더라도 눈에 뵈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뒷말을 해도 그저 변호하기 급급하고, 어떻게든 감싸려고 발 동동 구르고. 이 사람이 균형감각 있는 사람인가? 헷갈리던 순간도 여러 번 있었지요.

언젠가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 하는 행태가 못마땅해 투덜대는 내게 그러더군요.

"찌질이 못난 것들, 영양분이 부실해 꼬부라지고 버짐 핀 나무들을 우리가 키워주자. 지금 엉성하고 성에 안찬다고 뽑아 버리면 무슨 희망이 있나? 그 나무에 물도 주고 비료도 주면서 튼실한 재목으로 키워내면 틀림없이 우리 민중들을 위한 도구로 쓰일 거야."

윤한봉 선배 아니 윤한봉 오라비 잘 가십시오.

아이도 없이 혼자 달랑 남은 선배의 아내는 우리가 곁에서 지켜 줄 것입니다. 제 앞가림도 못하는 주제에 어떻게 지키냐고요? 히히히. 뭐 중뿔난 묘책이 있겠습니까? 그저 가끔 어울려 이야기도 하고, 맛난 밥도 먹고, 수다도 떨고. 이래저래 형님 없는 빈 공간 손톱만큼이나 채워주면 다행이지요.

형님이 안 계신 광주는 너무나 쓸쓸할 것 같습니다.
#윤한봉 #광주항쟁 #망명 #별세 #김대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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