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저널> 노조 정희상 위원장과 김은남 사무국장이 심상기 회장 자택 앞에서 단식농성을 벌이고 있다.<시사저널> 노조
지난 일 년 참 힘들었지요? 더구나 파업 이후 6개월은 기자들은 물론 가족까지도 무급인생을 사느라 고생이 암만했을 겁니다. 된 가뭄으로 바짝 마른 저수지 바닥에 남은 붕어들은 서로 침을 흘려 몸을 적신답니다. 침으로 비늘을 적시며 해갈의 비를 기리지요.
<시사저널>기자, 22명은 바싹 말라 갈라진 저수지 바닥에서 서로의 몸을 보듬고 6개월을 버텼지요. 그 고난의 체험 하나만으로도 그대들은 자본의 발길질에 급소를 채여 시름시름 앓다가 죽을 존재가 아님을 증명했습니다.
북아현동 <시사저널> 심 사주의 집 앞은 참 인색하더군요. 진짜 그가 소문처럼 몇 백억 가진 부자라면 대문 앞에 한두 평의 공터는 내주는 게 상식일 텐데, 메뚜기 이마빡만한 여유도 없이 집을 지어서 대문 앞에 걸터앉을 자리조차 없더군요. 집주인의 인색함과 몰인정이 한눈에 읽혀지는 듯했지요. 아마 거지도 평생 그 집 대문은 두들기지 않았을 겁니다. 대문 꼬락서니를 보니 쉰밥 한 덩이 얻어가기 힘들겠다 싶었을 테니까요.
그대들은 시름시름 앓다가 죽을 존재가 아닙니다
언론의 편집권 확보를 위해 민주언론, 독립언론의 기치를 내걸고 <시사저널> 정희상 노조 위원장과 김은남 사무국장이 벌이는 단식투쟁인데, 자동차가 지나갈 때마다 궁둥이를 들고 일어나 쫓기듯이 비켜줘야 하니 단식의 격이 떨어지고 투지가 희화되는 듯했습니다.
하늘의 왕자 알바트로스가 뱃사람에게 잡혀서 날개를 꺾인 채 조롱당하는 치욕을 느끼지 않았을는지요. '선비 말년에 배추씨 장사'를 시켜도 유분수지, 한국의 보물급 기자 둘을 골목 논다니로 만들다니 그 집 주인은 참 예의도 없고 배알도 없는 사람이더군요. 그 땡볕, 그 모기, 그 빗속에서 9일을 굶은 건 실내 단식 보름 이상에 해당하는 고통을 견딘 것이고 곤장 백대 이상의 모욕을 참은 겁니다.
그렇지만 말입니다. 삶이 오욕(汚辱)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가요. 오욕을 몰랐다면, 그런 삶이 가능했다면, 그건 어쩌다 주어진 행복이고 과거입니다. 산다는 건 더러움의 늪에, 욕지기의 바다에 섞여 있음을 자인하고 안간힘을 다해 그 바다를 건너는 겁니다. 한 평생 때 묻지 않고 흔들림도 없이 화살처럼 날아가기를 바라는 건 과욕이고 무명(無明)이지요.
그렇게 자신이 팔자 좋게 태어났다고 여기는 사람은 아마 전국의 미치광이들하고, 또 심(沈)-금(琴) 자 성을 가진 두 노인을 빼고는 없을 겁니다. 심과 금, 언론의 심금(心琴)을 부순 환멸의 커플이라고 해도 될까요.
만해 한용운 선생의 가르침 가운데 인욕(忍辱)에 관한 얘기를 하고 싶군요. 인욕이란 말 그대로 '욕됨을 참음'이지요. '계율을 굳게 지킴'의 지계(持戒)와 함께 불교 수행의 기본태도이지만, 불자(佛者)가 아닌 사람도 그럴 겁니다. 험한 세상살이에서 '욕됨을 참지 않고는' 직장생활도, 장사도, 공부도, 정치도 할 수 없으니까요. 부부 간에도 매사에 할 말 다하고 따질 거 다 따지고 살지는 않잖아요.
만해는 인욕(忍辱)을 말하기를 "인욕(忍辱)이란 것은 인욕(忍辱) 그것이 목적이 아니라 어떠한 목적을 달성코자 하는 과정의 한 방편이다. 다시 말해서 욕(辱)됨만을 참기 위한 인내(忍耐)가 아니라 진일보하려는 도중의 한 소극적 수단"이라고 설파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아주 깊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인욕(忍辱)이란 것은 당장에 설욕(雪辱)하는 것 이상의 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능히 참지 아니할 수 없는 것을 자율적으로 참는 것을 이름이니, 만일 참지 아니해야 할 것을 참는 것은 인욕(忍辱)이 아니라 굴욕(屈辱)이다."
참을 만큼 참았으니 더 참으면 굴욕입니다
욕됨을 싹 씻어내는 '설욕', 피동적으로 욕됨을 받아들이는 '굴욕'과 비교하면서 인욕(忍辱)의 참뜻을 알아듣기 쉽게 가르쳐 주었지요. '아, 그렇구나!' 일제 식민통치에 맞서고 부패한 친일종단에 맞서 불굴의 저항을 펼친 만해 정신은 바로 '굴욕'을 거부하고 "참지 아니해야 할 것에 대해 참지 아니한 것"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지요.
그대들은 지난 1년 참 잘 참았습니다. 사정을 듣고 보니 무단 기사삭제라는 긴급조치가 발동되기 전에도 언론의 심금을 깨뜨리는 독단의 징후가 짙었다면서요. 참을 만큼 참았으니 더 참으면 굴욕입니다. 참지 아니해야 할 것과 분연히 결별하는 아우들이 자랑스럽습니다. 결별식장에서 흘린 눈물만으로도 휘발유는 충분합니다. 이제 새 길로 떠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