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식 재해, 여전한 한국판 '레미제라블'

여름철 산업현장 '질식재해' 왜 빈발하나

등록 2007.07.01 18:37수정 2007.07.02 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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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보완: 7월 2일 오전 10시]

'전투의 거센 소용돌이가 지난 뒤, 이번에는 유독 가스와 함정의 동굴이었다. 혼란 뒤에 시궁창이었다. 장발장은 하나의 지옥에서 다른 지옥으로 떨어진 것이다.-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 중에서

혁명에 가담했다가 중상을 입은 마리우스를 둘러메고 장 발장이 피신한 곳은 바로 파리의 하수도였다. 빅토르 위고는 <레미제라블>에서 장 발장의 하수도 도피 장면에 앞서 파리의 하수도에 관한 친절한 장광설을 펼친다. 다음은 그 마지막 부분이다.

'도살자의 직업을 누구나 싫어해서 오랫동안 사형 집행인에게만 맡겨져 있었듯이 하수도 청소부의 일도 옛날에는 거의 그와 같은 정도로 위험해서 역시 민중들의 혐오를 받았다. 그 구린내 나는 구덩이 속에 석공들로 하여금 들어가게 하려면 비싼 임금을 치러야 했고 우물을 파는 인부의 사다리도 그곳에 내려가기를 주저했다. '하수도에 내려가는 것은 무덤 속에 들어가는 일이다'라는 속담까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6월에만 질식재해로 9명 사망

19세기 초 프랑스의 상황이 21세기 대한민국에서는 아직 고전이 되지 못했다. 어제(6월 30일) 하루 동안만 5명의 노동자가 하수관 보수 작업 중 생명을 잃는 사고가 발생했다. 오전에 경기도 고양시에서 맨홀에 들어가 물을 퍼내다가 1명이 사망했고 1명이 부상했으며, 경기도 의왕시에서는 하수종말처리장 보수 작업 중 4명이 사망했다. 이번 6월에만 비슷한 재해가 벌써 5건이 발생하여 모두 9명이 사망했고 4명이 부상을 당했다. 지난 2월에도 하수도에서 한꺼번에 3명이 사망하는 일이 있었다

a 올해 발생한 산업현장 질식재해 현황

올해 발생한 산업현장 질식재해 현황 ⓒ 강태선

이러한 재해는 예외 없이 명백한 사업주의 산업안전보건법 위반 때문에 발생한다. 산업보건기준에관한규칙의 '밀폐공간작업으로 인한 건강장해의 예방(17~ 45조)'을 제대로 이행하였다면 발생하지 않았을 재해이다.


예방규칙에는 사실 의무사항만 나와 있으므로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이해하지 못한 내용은 외워지지도 않는 것과 같이 납득되지 않는 법은 지키기도 싫은 것이 사실이다. 하수관 또는 폐기물 처리시설에서 왜 사람이 질식해 사망하는 것인지 그리고 그것이 왜 여름에 빈발하는 것인지 알아보자.

원인은 크게 산소부족과 유해가스 중독으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두 기전이 같이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 하수관 또는 폐기물 처리시설의 유해가스는 여러 가지가 섞인 혼합물인데 편의상 하수구 가스(sewer gas)라고 하자. 하수구 가스에 포함된 가스 중 가장 독성이 강한 것은 황화수소와 암모니아 가스이다. 특히 황화수소는 매우 위험한데, 이 가스가 500ppm 이상 포함된 공기를 사람이 한 번만 들이마셔도 속수무책으로 의식을 잃고 쓰러질 수 있다.


고농도 황화수소, 후각 마비시켜 속수무책

황화수소는 1ppm 이하의 농도에서는 특유의 '계란 썩는' 냄새가 풍기지만 150ppm 이상에서는 오히려 사람의 후각을 마비시켜 냄새를 맡을 수가 없으니 더욱 위험하다. 이에 비해 암모니아 가스는 자극성이 매우 강해 오히려 안전한데, 높은 농도에 노출되기 전에 고약한 냄새와 눈 따끔거림으로 일찌감치 달아나지 않을 장사가 없기 때문이다.

황화수소는 산소가 없는 혐기성 상태에서 잘 자라는 황환원박테리아가 발생시키는 가스이다. 이 박테리아는 유속이 느려서 공기가 잘 공급되지 않는 하수나 폐수 속에서 잘 자라며 온도가 높은 여름에는 더욱 활발하게 번식한다.

a 산업현장 질식재해 관련 위험요인과 특성

산업현장 질식재해 관련 위험요인과 특성 ⓒ 강태선

황화수소는 물에 녹아 있다가 물을 휘저으면 마치 탄산음료를 흔들어 열 때처럼 일시적으로 솟구치는데 여기에 노출되면 산소 농도가 정상일지라도 황화수소 급성중독으로 한순간에 쓰러진다. 아직 조사중이지만 나는 지난 6월에 있었던 재해 중에 아파트 정화조와 쓰레기 처리장에서의 재해는 황화수소 중독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2005년 한 낡은 아파트 정화조에서 황화수소를 측정한 적이 있는데, 이때 배풍기가 정상적으로 가동되고 있는 상태에서도 황화수소가 25ppm으로 나타났다. 낡은 아파트의 경우 정화조를 직접 운영하고 있는 경우가 있는데 여기에서는 만성적으로 황화수소에 노출될 수 있다. 만약 배풍이 잘 안되거나 혹은 정화조를 한동안 가동하고 있지 않다가 재가동시킬 때는 황화수소가 고농도로 발생할 수 있다.

a 2005년 6월 황화수소 급성중독 사건이 있었던 폐수처리장 수조. 불과 2m 아래 수조에 내려갔다가 세 사람이 의식을 잃었다.

2005년 6월 황화수소 급성중독 사건이 있었던 폐수처리장 수조. 불과 2m 아래 수조에 내려갔다가 세 사람이 의식을 잃었다. ⓒ 강태선

같은 해 폐수처리장 슬러지 제거 작업 중 발생한 황화수소 급성중독 재해를 조사한 적도 있다. 수조에 있던 슬러지를 뽑아 올리고 마무리를 위해 불과 상부가 개방된, 2m 아래의 수조 바닥에 내려갔다가 차례로 세 사람이 쓰러진 재해였다. 역시 공기는 매우 잘 통하는 곳이었고 산소 부족의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수조 내에 일시적으로 황화수소가 고농도로 조성되었던 것인데, 마무리 작업을 위해 잠시 내려갔다가 변을 당한 것이다.

지난 6월 27일 음식물 쓰레기 처리장에서 분쇄기에 끼인 비닐을 제거하러 잠깐 내려갔다가 생긴 재해는 분쇄기 인근에 조성된 고농도의 황화수소에 중독된 것으로 판단된다.

밀폐 공간 작업시, 촛불 산소 측정 위험

아직도 질식 재해가 곧 산소결핍이라고 잘못 알고 산소만 측정한다거나, 심지어 산소측정기 대용으로 촛불을 들고 의심스런 공간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이 있다. 산소는 물론 황화수소 등과 같은 고독성 하수구 가스도 반드시 측정해야 하며 메탄이나 황화수소 가스가 고농도인 공간에 촛불을 들고 들어가는 것은 폭약에 불을 붙이는 것과 같다.

물론 산소결핍이 병행된 재해도 많다. 하수관이나 탱크와 같이 밀폐된 공간에서는 호기성 세균이 산소를 소모하면서 이산화탄소를 발생시켜 산소가 부족해지고 이산화탄소 농도가 올라간 가운데 이차적으로 메탄생성균과 황환원박테리아 등 혐기성 세균이 번성하면서 메탄, 황화수소 가스를 발생시킨다. 이렇게 되면 그 공간에는 산소부족과 고농도의 급성중독 가스가 병존하는 꼴이 된다. 여기에 그냥 들어가면 결과는 더욱 심각해진다.

하수구 가스에는 부패 과정에서 자연 발생하는 가스 외에 무단 방류한 폐수나 혹은 누출된 기름에 오염되어 발생하는 가스가 포함되어 있을 수 있다. 지난 2월에 있었던 인천 남동공단 하수관에서의 재해는 시안화수소에 의한 급성중독으로 밝혀졌는데 시안화수소는 황화수소와 거의 그 독성기전이 비슷한 물질이다. 시안(CN)은 도금공정에 사용되는 것으로 폐수처리가 제대로 되지 않고 물에 섞여 방류될 경우 이러한 무서운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 원인을 알았으니 '밀폐공간작업으로 인한 건강장해의 예방(17~ 45조)'을 검색해 볼 차례이다. 규칙의 요지는 이미 지난 4월 1일자 기사에 나와 있으니 참조할 만하다.

모든 산업재해 소식이 안타깝지만 질식 재해는 더욱 그렇다. 얼마든지 막을 수 있는 재해이기 때문이다. 더는 한국판 '레미제라블(불쌍한 사람들)'이 양산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덧붙이는 글 | 강태선 기자는 노동부 산업안전근로감독관으로 일하고 있으며 본 기사는 노동안전보건교육센터 <일과 건강>에도 송고하였습니다.

덧붙이는 글 강태선 기자는 노동부 산업안전근로감독관으로 일하고 있으며 본 기사는 노동안전보건교육센터 <일과 건강>에도 송고하였습니다.
#질식 #황화수소 #산소결핍 #밀폐공간 #레미제라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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