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벌신사, 당신을 사랑해요

지상의 날개, 옷 천국에서...

등록 2007.07.02 14:49수정 2007.07.02 1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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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리기 위해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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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수선방 ⓒ 송유미

기억은 때로 편리하다. 컴퓨터처럼 정해진 용량 외 기억하지 않는다. 빌리 와일러의 <칠년만의 외출>은 지하철 통풍구 바람에 먼로의 하얀 치맛자락이 날리는, 그 유명한 장면만 생각나고, 비비안 리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커튼을 뜯어 만든 옷을 입고, 클라크 케이블을 만나러 가는 장면만 떠오른다.

우리의 기억처럼 살아가는 일상사 역시 보관하기 어려워 버리는 것이 더 많다. 쓰레기 종량제 이후 하루종일 어떤 때는 쓰레기를 정리하다 시간이 다 가버린다. 사람 사는 일이 쓰레기 만드는 일 같다. 요즘 들어 옷장 앞에서 옷이 없어서 걱정하기보다는, 어떤 옷을 버릴까 걱정하는 경우가 많다.

옷장과 서랍 속에 가득한 옷들, 큰 아파트에 사는 대부분 사람들은 옷장을 버리고 옷방을 두고 산다. 옷방에 옷이 백화점의 한 코너보다 많다. 한때 유명 연예인이 자신이 입은 옷들을, 사회복지기관이나 팬들에게 선물하는 일이 유행처럼 번졌으나, 이제 각 가정에서도 연예인들처럼 옷들이 넘쳐나고, 재활용 수거함에도 쓰레기 되기는 아까운 옷들이 넘쳐난다.

내 몸처럼 편안한 오래된 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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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느질방 ⓒ 송유미

우리 동네 옷 수선방은 늘 문이 열리는 날보다 문이 닫혀 있는 날이 많다. 옷을 맡기고 찾으러 가면 문이 닫혀 있어 속이 상할 때가 많다. 굳이 그 많은 옷 중에 왜 그 옷만 고집하는지 이유를 알 수 없다. 수선을 해도 계속 입고 싶은 옷이 있다. 이상한 일이다. 숱한 옷 중에 왜 그 낡은 옷을 입고 나가야 편안해지는가.

대개 유독 좋아하는 옷과 아끼는 옷이 한두 벌쯤 있다. 내 몸처럼 편안한 옷을 입을 때 만남의 자리 또한 부담스럽지 않다. 집집마다 재봉틀이 있던 호랑이 담배 피우는 이야기 같은 시절, 어머니들은 직접 옷을 지었다. 한 동네 안에서 삯바느질해서 생계를 꾸리는 어머니들도 많았다. 이제 가정에서는 재봉틀 소리 듣기 어렵다. 서민층이 사는 골목길에도 옷 수선방 찾기 쉽지 않다.

단벌신사 우리 애인은 서른한살 노총각님
단벌옷에 넥타이 두개 언제나 변함없죠
멋이야 없지만 마음만은 진실해
주머니가 텅텅비어 데이트를 못해도
단벌신사 노총각님 당신을 사랑해요
단벌신사 우리 애인은 서른한살 노총각님
단벌구두 다 떨어져도 태평한 그 마음씨
돈이야 없지만 마음만은 미더워
흔해빠진 영화관에 구경한번 못 가도
단벌신사 노총각님 당신을 사랑해요


단벌 신사 애인, 우리 아버지

김상희의 <단벌 신사> 유행가처럼 70년대만 해도 단벌로 직장을 다니는 샐러리맨이 많았다. 치수가 다양하지 않아서 수선집에 맡기지 않으면 기성복을 입을 수 없었다. 평생 단벌 신사로 지낸 애인은 누굴까. 바로 새마을운동이 불길처럼 번져가던, 그 시절의 우리 아버지들이다. 단벌이라서 세탁소에 맡길 시간도 없어, 집에서 세탁해서 다음날 아침에 입고 가야 했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단벌 양복을 무슨 신줏단지처럼 여겼다. 먼지라도 묻으면 안 된다고 야단스럽게 비닐옷을 입혀 걸어두곤 했다.

가만히 생각하면 아버지의 단벌양복은 성스러운 신부의 사제복 같다. 단벌이라 늘 소매끝과 바짓단이 헤어지고, 팔굽은 낡아 그 자리에는 가죽이나 헝겊을 대서 곱게 바느질해 입고 다녔던 아버지의 단벌양복 이야기도 흘러간 유행가처럼 들릴까.

스님 옷은 왜 먹빛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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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옷들 ⓒ 송유미

우리나라의 민족성을 백의민족으로 표현한다. 하얀 백색처럼 순결하고 순수한 민족성을 자랑하는 상징적인 말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제 우리나라의 민족성을 백의민족으로 표현하기는 어폐가 있지 않을까. 승려와 평민의 옷 색깔 구분이 없던 백의민족시절, 승려의 옷을 훔쳐가서 입은 백성들이 많아서, 그를 구분하기 위해 스님 옷에 먹물을 들였다는 이야기도 역시 호랑이 담배 피우는 시절의 이야기.

옷을 너무 쉽게 인터넷으로, 값싸게 고를 수 있는 옷의 천국. 유명 백화점의 세일에서 만원 이하의 티셔츠와 바지와 치마 정도는 입맛대로 고를 수 있다. 치수도 다양해서 맞춤 옷이 필요 없다. 각양각색의 디자인과 수만 가지 색깔별로 쏟아져 나오는 옷들은 수많은 사람의 개성처럼 가지가지다. 그러나 이런 옷들은 수공의 부족과 싫증과 헐값에 구했다는 이유 등으로 한해만 지나면 어김없이 쓰레기통으로 들어간다.

옷은 나만의 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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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류수거함 ⓒ 송유미

의상디자이너들의 고민은 하루 자고 나면 자신이 만든, 짝퉁을 입은 사람들이 거리를 활보하는 데 있다고 한다. 철이 바뀌면 거의 똑같은 옷을 입은 사람들을 거리에서 많이 만난다. 맞춤이 사라진 기성품시대. 옷으로 개성을 표현한다는 말이 무색하다.

의식주란 말이 있듯이 의복은 사람이 살아가는 데 중요한 생활 예절이다. 인스턴트 식품처럼 과다하게 생산되는 옷의 풍요 속에서 옷으로 예절을 표현하는 일은 아주 드물다.

공무원이나 형식을 중요하게 여기는 기업 등에서도 사원들의 복장을 '프리'에 맡기고 있다. 옷으로 모든 것을 평가하는 것도 옳지는 않지만, 너무 흔하게 옷을 구할 수 있어서 옷만 번지르르한 사람으로 인해 옷으로 그 사람의 기품이나 인품을 가늠키 어려운 점도 있다.

대부분 익명으로 만나는 삶 속에서 입고 있는 의상으로 그 사람의 기품을 읽는다. 옷이 너무 많아서 고민인 이 시대, 낡은 옷을 입었지만 고상한 인품을 나타나는 옷차림은 잘 만날 수 없다. 너무 오래 입어서 고유한 체취를 풍기는, 단벌신사도 만나기 어렵다.

오늘도 숱한 옷을 옷장에 쌓아두고 옷이 없다고 쇼핑을 하러 나온다. 옷에 대한 인간의 욕망은 끊임없이 날고자 하는 이카로스의 날개와 무관하겠지만, 한번쯤은 새 옷을 살 때마다 정말 사야 할 옷인가 하는 심각한 고민은 있어야겠다.

풀 먹인 모시 옷이 그립다

이즈음이면 어머니와 누이들이 모깃불을 피우고 숯불 다리미로 식구들의 모기옷과 삼베옷을 다림질하던 한여름밤이 그립다. 식구들의 옷을 손질하느라 밤을 새우면서도, 늘 아버지가 입다 못 입게 된 빛바랜 와이셔츠나 구멍 난 러닝셔츠를 입고 사셨던, 돌아가신 어머니의 모습도 눈에 선하다.

이젠 걸인들도 옷을 기워 입지 않는다. 웬만한 아파트 옷 수거함에는 새 옷 같은 옷들이 버려지고 있다. 이 옷들을 수거해서 자선을 베푸는 단체도 많다. 풍족한 옷 천국에 살아가면서, 삼베옷처럼 껄끄러운 피부에 닿는 어머니의 진솔한 바느질 솜씨 옷이 그립다.

작은누나가 엄마보고
엄마 런닝구 다 떨어졌다
한 개 사라 한다.
엄마는 옷 입으마 안 보인다고
떨어졌는 걸 그대로 입는다.

런닝구 구멍이 콩만한게
뚫어져 있는 줄 알았는데
대지비만하게 뚫어져 있다.
아버지는 그걸 보고
런닝구를 쭉 쭉 쨌다.

엄마는 와 이카노
너무 째마 걸레도 못한다 한다.
엄마는 새 걸로 갈아입고
째진 런닝구를 보시더니
두 번 더 입을 수 있을 낀데 한다.

- 동시 '엄마의 런닝구', 배한권


인생은 단벌이라 소중하다

사람이 살아가는 생활의식은 언어의 표현으로 연결되는지, 요즘 젊은이들의 은어를 빌리면, 옷을 갈아입었다는 말은, 애인을 바꾸었다는 뜻이란다.

이혼이 많아지고 사람과 사람 사이 배신이 많아지고, 믿음과 신뢰가 없어지는 원인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너무 많기에 너무 쉽게 버리는, 넘쳐나는 생활의 풍요에서 오는 악영향 때문은 아닐까. 없는 것이 없어서, 귀한 물건도 없고, 소중한 사람도 까맣게 잊고 산다.

오늘따라 이 동시는 두툼한 추억의 앨범 속으로 걸어들어가게 한다. 누런 서류봉투에 빈 점심도시락을 넣어서, 검은 고무줄로 꽁꽁 동여맨 낡은 자전거에 몸을 싣고, 단벌신사 우리 아버지가 풀벌레 소리 왁자한 그 저무는 푸른 강둑길로 달려오고, 퐁당퐁당 물장구치는 아이들과 함께 마을 아낙들의 빨랫방망이 소리가 들려오는 듯.

덧붙이는 글 | 생활 속의 옷 이야기

덧붙이는 글 생활 속의 옷 이야기
#단벌신사 #옷 #옷수선 #바느질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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