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인생 60년 백성희 "대사 외울 때까지..."

영원한 현역...'무대의 별'로 빛나다

등록 2007.07.03 18:21수정 2007.07.03 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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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여전히 아침잠을 즐기며 오전 아홉 시에 일어나는 미인(美人)이고, 잠자리를 털기 전에 평생을 해온 가벼운 운동으로 몸을 단련하고 지인들과 어울릴 때는 소주 한 병을 거뜬히 마시는 백성희.

여전히 아침잠을 즐기며 오전 아홉 시에 일어나는 미인(美人)이고, 잠자리를 털기 전에 평생을 해온 가벼운 운동으로 몸을 단련하고 지인들과 어울릴 때는 소주 한 병을 거뜬히 마시는 백성희. ⓒ 여성신문

[김현옥 객원기자] 2004년, 백성희는 연기인생 60년을 다룬 <길>(이윤택 작, 김혜련 연출)에 출연했다. 이 작품은 백성희의 구술을 바탕으로 구성되었고, 그가 출연했던 중요한 작품들이 중간중간 삽입되면서 연극으로 인해 크게 상처받았던 부친에 대한 죄송함, 한 남자만을 사랑으로 기억했던 남편과의 만남과 이별, 연극이 먼저여서 늘 미안했던 아들에 대한 마음 등을 드러냈다. “그녀의 모든 길은 연극무대로 통했다가 다시 그 무대로 돌아온”, 연극의 자궁 속에서 태어나고, 연극이라는 무덤으로 돌아가는 그녀의 여정을 보여주는 연극이었다.

2004년 연기인생 60년 기념작 ‘길’
“대사 외울 수 없을 때가 내 은퇴기”


그의 몸은 참으로 고요했다. 평화롭고 정화된 얼굴, 성숙한 노년의 미를 온몸에 담고 있던 그를 한마디로 정의하면 ‘고독’이었다. 어쩔 수 없는 고독이 아니라, 선택한 고독이 그녀의 모든 존재를 휘감고 있었다.

많은 후배들에게 아낌없는 선배이고, 동료들에게 섬세하고 헌신적인 동지였지만 그녀에게는 “누구를 특별히”, “누구와 특별히”가 아닌 자신 곁에 있는 누구와도 한결같은 관계를 맺으며 연극무대를 오랫동안 지켜온 것처럼 지인이나 자신이 키워낸 후배들의 곁을 고요히 지키는 것 같았다.

그의 은퇴는 “대사를 외울 수 없는 나이”라고 했다. 그녀의 몸은 주인이 그만하라고 할 때까지 충만하게 봉사하는 충직한 일꾼이었다. 그는 여전히 아침잠을 즐기며 오전 9시에 일어나는 미인(美人)이고, 잠자리를 털기 전에 평생을 해온 가벼운 운동으로 몸을 단련하고, 지인들과 어울릴 때는 소주 한병을 거뜬히 마시는, 은퇴라는 단어를 잊은 영원한 현역이다.

30여 년간 국립극장 대표 여배우
“연극을 예술로 지켜온 파수꾼” 평가


a 50대 중반이란 나이가 믿기지 않는 무대 위에서의 백성희. 연극이 곧 삶이고 삶이 곧 연극임을 증명하는 듯 하다. 82년 ‘장화를 신은 고양이’

50대 중반이란 나이가 믿기지 않는 무대 위에서의 백성희. 연극이 곧 삶이고 삶이 곧 연극임을 증명하는 듯 하다. 82년 ‘장화를 신은 고양이’ ⓒ 여성신문

극중의 인물을 자기 내면으로 끌어들이는 흡인력을 지닌 그녀의 연기는 리얼리즘에 바탕을 두고 형성되었다. 악극단 시절부터 춤과 노래, 연기력, 이론 등으로 다져진 그의 연기인생은 타고난 끼와 준비된 능력, 쉴새없이 갈고 닦는 수도자와 같은 자세로 일관되어 있었다.


연극인 김동원은 그런 그를 “연극을 예술로 지켜온 파수꾼”이라고 했으며 “질릴 정도의 프로”라고 했다. “30여년을 국립극장의 간판급 여주인공으로 활약하면서도 오만함을 결코 보이지 않는” 닦여진 배우라고 했다.

젊은 시절 안해본 역이 없을 만큼 다양한 공연을 통해 무대 위에서 화려하게 빛나던 별이었고, 지금까지도 무대를 든든히 받쳐주는 대원로로 활약하고 있는 백성희는 “온몸으로 연기해내는 배우였다”고 차범석은 말한다. 특히 1950년 어린 나이에 당대 대배우 유계선과 함께 더블 캐스팅이 되었던 <뇌우>에서의 연기는 “신선하고 내면적이며 절제된 것으로 신맛과 단맛이 적절하게 배합된 수밀도(水蜜桃)의 맛”이었다고 회고한다.


백성희는 자신이 창조해낸 수많은 극중 인물들이 자신을 떠나는 일 없이 자신의 일상으로 들어와 그들과 함께 살아간다고 할 정도로 연극에 몰입하는 배우였다. 방송인 김승현과의 인터뷰에서 백성희는 “배우란 중구난방의 희구(戱具)일 수도, 이성의 수상일 수도 있어. 하지만 나는 내 일에 대해 일찌감치, 그러니까 나의 십대에 이미 인질로 잡힌 사람이야. 그 어떤 고통과 격정, 처절함이 있다 하더라도 나는 연극이라는 거대한 대상을 껴안고 생의 종지부를 찍을 것이 틀림없는 사람”이라고 했다.

a 80년 ‘미국에 산다’ 포스터에서(왼쪽이 송승환씨).

80년 ‘미국에 산다’ 포스터에서(왼쪽이 송승환씨). ⓒ 여성신문

평론가 유민영은 백성희를 “한국의 사라 베르나르이다. 연기를 하다가 무대 위에서 장미꽃에 코를 박고 죽기를 갈망했던 프랑스 불후의 명 여배우 사라 베르나르의 한국 현신이 백성희가 아닐까. 그녀는 사라 베르나르의 연극인생처럼 연극을 자신의 인생 그 자체로 인식하고, 무대를 제단으로 여겼으며 종교로까지 승화시키고 있다”고 표현한다.

평생을 걸고 연극을 해온 거인(巨人), 평생을 통해 배우가 되기 위해 수련한 수도자(修道者), 모든 것의 위에 연극을 놓았던, 연극과 사랑에 빠진 열애자(熱愛者)이다.

[참고자료]

- 해방 이후 현대 한국 연극 60년의 중심적 존재: 백성희론, 한국예총집 연극·영화·무용편, 김윤철
- 무대 밖에서, 백성희, 예술가의 삶, 혜화당, 1994
- 백성희 삶과 연극, 배우의 거울, 김남석, 연극과 인간, 2004
- 삶과 연극을 조화시킨 무대의 달인 백성희, 한국인물사, 유민영, 2006


a 89년 ‘여자의 역할’ 공연 중 분장실에서 후배들과 함께. 왼쪽부터 박정자, 김금지, 윤소정, 백성희, 장미자, 구희서.

89년 ‘여자의 역할’ 공연 중 분장실에서 후배들과 함께. 왼쪽부터 박정자, 김금지, 윤소정, 백성희, 장미자, 구희서. ⓒ 여성신문

1956년 오델로(세익스피어 작, 유치진 연출), 느릅나무 그늘의 욕망(유진 오닐 작 유치진 연출)
1957년 신앙과 고향(카발 쉐인헤 작, 홍해성 연출), 태풍경보(고프먼 하이드 작, 이진순 연출), 딸들 자유연애를 구가하다(하유상 작, 박진 연출)
1958년 시라노 드 벨쥬락(에드몽 로스탕 작 이진순 연출), 릴리움(훼렌츠 본나르 작 이원경 연출), 나의 독백은 끝나지 않았다(박동화 작, 박진 연출)
1959년 뜨거운 양철 지붕 위의 고양이(테네시 윌리엄스 작, 이해랑 연출)
1960년 여인천하(박종화 작, 서항석 연출), 미풍(하유상 작, 이해랑 연출), 태양을 향하여(차범석 작, 이진순 연출)
1962년 젊음의 찬가(이용찬 작, 박진 연출), 침종(하우프트만 작 서항석 연출), 산불(차범석 작 이진순 연출)
1963년 결혼중매(손튼 와일더 작, 이기하 연출), 해풍(박만규 작, 이진순 연출), 푸른 명맥(이응찬 작, 박진 연출)
1964년 욕망(이근삼 작, 최현민 연출), 베니스 상인(셰익스피어 작, 이진순 연출), 만선(천승세 작, 최현민 연출), 순교자(김은국 작, 허규 연출)
1965년 여성만세(하유상 작, 박진 연출), 울어도 부끄럽지 않다(제임스 리 작 오사랑 연출), 바꼬지(이재현 작, 이진순 연출), 수선화(이원경 작, 박진 연출)
1966년 열대어(차범석 작, 표제순 연출), 갈매기(안톤 체홉 작, 이진순 연출), 이 길고 지루한 여름(김병원 작, 박진 연출)
1967년 세 자매(안톤 체홉 작, 이해랑 연출), 밤과 같이 놓인 벽(전진호 작, 허규 연출), 사계절의 사나이(로버트 볼트 작, 이기하 연출), 이끼 낀 고향에 돌아오다(윤조명 작, 서항석 연출)
1968년 북간도(안수길 작 이해랑 연출), 엄마의 모습(이원경 연출), 수전노(몰리에르 작 이진순 연출)
1969년 이민선(김자림 작, 전세권 연출), 헨리 8세의 여인들(몰리에르 작 임영웅 연출)
1970년 금삼의 피(박종화 각색, 박진 연출), 전쟁과 평화(톨스토이 원작, 이진순 연출)
1971년 꽃상여(하유상 작, 이진순 연출), 달집(노경식 작, 임영웅 연출), 손달 씨의 하루(전진호 작, 허규 연출)
1972년 환절기(오태석 작, 임영웅 연출), 환상여행(차범석 작, 이기하 연출)
1973년 성웅 이순신(이재현 작, 허규 연출)
1974년 활화산(차범석 작, 이해랑 연출)
1975년 징비록(노경식 작, 이해랑 연출), 고랑포의 신화(윤조병 작, 이진순 연출)
1976년 함성(김의경 작, 이진순 연출), 손탁호텔(차범석 작, 이해랑 연출), 페르퀸트(헨리 입센 작, 이진순 연출)
1977년 인생차압(오영진 작, 이승규 연출), 파우스트(괴테 작, 이해랑 연출), 크리스토퍼의 죽음(시드니 하워드 작, 이진순 연출)
a 90년 예총예술상을 수상한 후 며느리(오른쪽)와 함께. 그는 외동아들에 대해 “연극이 먼저”여서 늘 미안했다고 한다.

90년 예총예술상을 수상한 후 며느리(오른쪽)와 함께. 그는 외동아들에 대해 “연극이 먼저”여서 늘 미안했다고 한다. ⓒ 여성신문

1978년 에밀레종(하유상 각색, 임영웅 연출), 천사여 고향을 보라(토마스 울프 작, 이해랑 연출), 물보라(오태석 작 연출)
1979년 봉선화 피는 언덕(나오이 깅야 작, 이노우에 연출) 베케트(장 아누이 작, 임영웅 연출), 무녀도(김동리 작, 허규 연출)
1980년 북간도(안수길 작, 이해랑 연출), 산수유(오태석 작, 허규 연출)
1981년 세종대왕(이재현 작, 허규 연출), 귀향(이근삼 작, 정호영 연출)
1982년 장화 신은 고양이(루드비히 티이크 작, 오태석 연출), 삭풍의 계절(김의경 작, 이해랑 연출)
1983년 바리데기(김진희 작, 손진책 연출), 나래섬(오태석 작, 허규 연출)
1984년 옛날 옛적에 훠어이 훠이(최인훈 작, 김정옥 연출), 하늘만큼 먼나라(노경식 작, 임영웅 연출), 내일 그리고 또 내일(이근삼 작, 허규 연출)
1986년 인종자의 손(전진호 작, 이해랑 연출), 비몽사몽(이강백 작, 이승규 연출)
1987년 황금연못(어네스트 톰프슨 작, 이해랑 연출), 들오리(헨릭 입센 작, 이해랑 연출)
1988년 뇌우(조우 작, 이해랑 연출)
1989년 여자의 역할(다리오 포 작, 김효경 연출), 간계와 사랑(쉴러 작, F. 아놀드 연출)
1990년 남한산성(김의경 작, 정일성 연출), 외로운 도시(윤조병 작, 오태석 연출)
1991년 넋씨(이현화 작, 강영걸 연출), 물거품(이강백 작, 이병훈 연출), 검찰관(고골리 작, 김철리 연출)
1992년 맹진사댁 경사(오영진 작, 김상열 연출), 법에는 법으로(셰익스피어 작, 김창화 연출)
1993년 홍동지는 살아 있다(김광림 작, 이윤택 연출), 앙드로마끄(라신느 작, D. 아미아스 연출), 여관집 여주인(골도니 작, 베로나디 연출), 피고지고 피고지고(이만희 작, 강영걸 연출)
1994년 이성계의 부동산(이근삼 작, 김도훈 연출)
1995년 반도와 영웅(김의경 작, 장진호 연출), 리차드 3세(셰익스피어 작, 김철리 연출), 혼자 사는 세 여자(백성희 연극 50주년 기념공연, 이반 멘첼 작, 정일성 연출)
1996년 춘향아 춘향아(이근삼 작, 김광림 연출), 원더미어 부인의 부채(오스카 와일드 작, 정진수 연출), 혼없는 여자(A.아스트롭스키 작, B. 마로조프 연출), 십이야(셰익스피어 작, 박원경 연출)
1998년 목포의 눈물(기국서 연출)
1999년 아Q정전(뤼신 작, 김효경 연출), 무의도 기행(함세덕 작, 김석만 연출), 운상각(오태석 작, 연출)
2000년 솔베이지의 노래(입센 작, 임경식 연출), 광대들의 비나리(구히서 작, 박은희 연출), 마르고 닳도록(이강백 작, 이상우 연출)
2001년 나 어릴 적에(김정숙 작, 연출)
2002년 강 건너 저편에(2002년 한일국민교류의 해 한일 합동공연) 일본 신국립극장 공연, 예술의 전당 토월극장 공연
2003년 문제적 인간 연산(이윤택 작, 연출)
2004년 백성희 무대 60주년 기념공연 배우 백성희 자전극 <길>, 바냐 아저씨(안톤 체홉 작, 전 훈 연출)
2005년 강 건너 저편에(한일 우정의 해 기념공연), 멧돼지와 꽃사슴(이근삼 작, 김종석 연출)
2006년 어느 계단 이야기(안토니오 부에로 바에오 작, 이송 연출), 태(오태석 작, 연출), 아버지(A. 스트린드 베리 작 그리고리 지치코프스키 연출)
#백성희 #원로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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