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관련기사 삭제' 이후 편집권 독립을 위해 싸워왔던 시사저널 기자들이 26일 전원 사표를 제출하며 사측과 결별을 선언했다. 서대문 시사저널 본사 앞에서 정희상 노조위원장이 사태의 경과를 밝히고 있다.오마이뉴스 남소연
어쨌든 이제 투기의 광풍이 수그러들 줄 모르는 물질주의의 시대에 <시사저널> 기자들이 선 자리는 어느덧 고도(孤島)로 변한 것처럼 보인다. 그들이 대변하는 가치는 변방으로 밀려나고 고립되었다.
그들이 1년 넘게 고통스런 투쟁을 벌이는 동안 거대언론들이 이를 외면했던 것만이 문제는 아니다. 어쩌면 더욱 중요한 사실은 물질주의가 키워온, 사회적 정의에 대한 불감증의 만연인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바로 이 사실 위에 거리로 나간 기자들을 주목할 이유는 더 커진다. 시장의 이름 아래 인간의 얼굴이 잊혀지고 경쟁의 명분 아래 숱한 패배자들의 고통이 정당화될 때 사회가 건강한 생명력을 되찾기 위해 절실히 필요로 하는 것은 바로 인간다운 사회를 향해 원칙과 근본을 끈질기게 상기시키려는 어리석을 정도의 단순함이다.
비판 언론의 이름으로 숨겨진 이익들이 거침없이 여론을 왜곡시키는 냉소적인 언론 풍토에서 대의를 위해 소승적 이익을 던져버리는 우직함은 그 어느 때보다도 소중해졌다.
기자들이 '참언론실천시사기자단'을 결성하고 새로운 매체를 창간하기 위해 나섰다고 한다. 그들은 소액주주와 정기독자들로부터 투자를 받아 오는 9월 새 매체를 창간한다는 구체적인 청사진까지 마련했다.
잡지는 잡지를 만드는 사람을 떠나서 존재할 수 없다면, 그래서 <시사저널>의 기자들이 있는 곳에 <시사저널>의 정통성이 함께 한다면, 그리고 이 기자들이 언론의 현장을 떠나는 것은 한국 언론과 사회의 상실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면, 이들을 언론 현장에 다시 보내는 과제는 당연히 우리 모두의 관심사가 되어야 한다.
언론은 국민의 관심을 먹고 자라는 나무
나는 몇 해 전 태국 차오파야 강에서 환경교육을 위해 개조한 바지선의 벽에 이런 구절이 쓰여 있는 걸 읽은 적이 있다.
"결국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는 것만 보존하게 된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가 이해하는 것만 사랑한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가 경험하는 것만 이해한다."
우리는 거대 이익에 봉사하지 않는 언론을 원하는가? 우리는 자신에게 돌아갈 불이익을 기꺼이 감수하면서 사회가 앓고 있는 질병들을 끈질기게 고발하는 순수한 목소리를 듣고 싶은 것인가? 그렇다면 당면 과제는 <시사저널> 기자들이 겪고 있는 사태의 진상과 그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그럴 때에만 이해가 사랑으로, 사랑이 보존으로 연쇄반응을 일으킬 수 있게 되리라.
그러므로 그 출발은 관심이다. 진부한 표현의 틀을 빌리자면 참 언론은 국민의 참 관심을 먹고 자라는 나무다. 이 시점에서 자유언론의 전선은 <시사저널>사태를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다면 그 기자들은 당연히 국민적 관심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생명력 있는 언론을 키우기 위한 작지만 중요한 첫 단서가 거기에 있다. 사실 생명은 연계가 그 본질이다.
보다 일반화한다면 단절에서 연계로 나아가는 것이 생명력을 잃어가고 있는 우리 사회를 살리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