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내라, 여름꽃들아!"

[포토에세이] 무더위 속에서도 꿋꿋하게 피어나는 꽃들

등록 2007.07.16 21:45수정 2007.07.17 1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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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추리 ⓒ 국은정

강렬한 태양이 이글거리는 여름이 돌아왔다. 이렇게 숨 막히게 뜨거운 여름 한낮에도 산과 들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꽃들이 피어난다. 봄에 피는 꽃들이 그 계절을 닮아 앙증맞고 여릿여릿한 느낌을 전해주는 데 비해, 여름에 피는 꽃들 역시 계절을 닮아 강렬하고 시원시원한 느낌을 선사한다. 봄꽃이 지고 난 공백이 얼마나 계속됐을까? 도심을 조금만 벗어나면 어렵지 않게 화려한 여름꽃들을 만날 수 있다.

산과 들에서 가장 쉽게 만날 수 있는 여름꽃에는 백합과의 나리꽃 종류가 가장 많을 것이다. 참나리, 중나리, 땅나리, 하늘나리, 원추리, 각시 원추리, 노란 원추리 등 쌍둥이처럼 서로 닮은 모습을 하고 보는 이들의 시선을 붙드는 꽃들! 산이나 숲에서 우연히 만나는 나리꽃도 아름답지만, 바위틈이나 절벽 위에 홀로 핀 나리꽃을 보는 기분은 말할 수 없이 기쁘고 떨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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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추리 꽃무리. ⓒ 국은정

깎아지른 듯한 바위틈, 위태로워 보이는 자리에 핀 꽃이라니! 그 신비로운 생명의 경이 앞에 서 있으면 마치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입을 다물 수 없다. 그러면서 문득 신라 성덕왕 때 불렸다는 향가 중 하나인 '헌화가'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절벽에 핀 꽃에 넋을 잃은 수로부인에게 기꺼이 꽃을 꺾어다 바쳤다는 한 노인! 나는 이상하게 이 향가에 등장하는 꽃이 철쭉이 아니라 바로 이 나리꽃의 하나가 아닐까 하는 다소 엉뚱한 상상을 하곤 했다. 절벽 위에 핀 꽃을 보고 발길을 멈출 정도였다면 철쭉보단 나리꽃 쪽이 훨씬 더 잘 어울린다는 생각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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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 원추리 ⓒ 국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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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나리 ⓒ 국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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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부채 ⓒ 국은정

야생 나리꽃처럼 여름을 대표하는 꽃 중 하나가 바로 원추리 꽃이다. 흔히 집 화단이나 길가에서 피어나는 붉은빛의 원추리는 야생에서 피어나는 노란 원추리와는 그 느낌이 사뭇 다르다. 그래서 가끔은 어느 것이 진짜 원추리인지, 그 진위 여부에 핏대를 세우는 사람들도 있다. 분명 두 종 모두 원추리인 것은 틀림없다. 어느 것이 진짜인지 아닌지, 그런 것에 에너지를 낭비할 시간이 있다면 차라리 각각의 꽃이 가지고 있는 특유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기 위해 애쓰는 편이 낫지 않을까?

물레방앗간의 물레바퀴를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의 물레나물 역시 여름이면 들이나 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꽃 중의 하나다. 다섯 장의 노란 꽃잎이 금방이라도 굴러갈 것처럼 생동감이 넘친다. 물레나물에 코끝을 대어보면 약간 매콤한 고추 냄새 같은 게 난다. 어릴 적 나는 이 물레나물 꽃향기를 맡는 것을 좋아했다. 한밤에 피는 달맞이꽃 향기보다는 달콤하지 않지만, 은근하게 매운 물레나물의 향기도 한번 맡아 보게 된다면 그 꽃의 매력에 한껏 더 취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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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레나물 ⓒ 국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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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자꽃 ⓒ 국은정

흔하게 볼 수는 없지만, 숲이나 그늘에서 다소곳이 피는 동자꽃을 만난다면 자신도 모르게 '아!' 하고 작은 탄성을 지를 것이다. 하지만 밝은 주홍빛의 꽃 어디선가 슬픈 기색을 느낄지도 모를 일. 바라보기에도 아까울 만큼 예쁜 동자꽃에는 슬픈 전설 하나가 전해 내려온다.

깊은 산속 암자에서 늙은 스님과 함께 살던 동자가 있었다. 어느 해 겨울, 스님은 식량을 구하기 위해 어린 동자를 암자에 남겨 놓고 길을 떠났다. 식량을 구한 스님이 암자로 돌아가려 하자 엄청나게 많은 눈이 내려 스님의 발은 그만 꽁꽁 묶였다. 한참이 지나고 눈이 녹을 무렵 스님은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암자에 올라갔지만, 동자는 이미 죽은 후였다. 그 동자가 죽은 암자에서는 동자의 얼굴을 닮은 아름다운 꽃 한 송이가 피어났다.

동자꽃에 얽힌 이야기가 슬퍼서일까? 동자꽃을 보면 애타게 스님을 기다리던 동자의 커다란 눈망울을 마주하고 있는 느낌이 든다. 꽃에 얽힌 이야기치고 슬프지 않은 것은 없다고들 하지만, 왜 유독 이 동자꽃에 얽힌 전설만은 이다지도 애잔하게 나의 가슴을 치는 것일까? 동자꽃이 뿜어내는 특유의 밝은 이미지가 전설과 만나면서 훨씬 더 슬픈 느낌으로 바뀌어 버려서인가 보다. 아무리 보아도 안쓰러움이 가득 묻어나는 동자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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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라지꽃 ⓒ 국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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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꽃방망이 ⓒ 국은정

여름꽃들 중에는 붉은색과 노란색 계열의 꽃이 가장 많긴 하지만, 선명한 보랏빛의 꽃들도 적지 않다. 하늘의 별들이 잠시 내려와 쉬어가고 있는 모습을 연상케 하는 도라지꽃과, 아무리 그 꽃대로 맞아도 하나도 아플 것 같지 않은 자주꽃방망이, 긴 동물의 꼬리를 떠올리게 만드는 꼬리풀까지, 보랏빛을 가진 꽃들이 뿜어내는 매력도 뜨거운 여름을 수놓는 데에는 부족함이 없다.

지금 우리의 산과 들에는 다양한 여름꽃들이 벌이는 향연이 끊이지 않는다. 조금만 더 눈을 떠 바라보면 무더위 속에서도 자신들의 생명을 지켜가기 위해 땀을 흘리는 꽃들의 아름다운 얼굴을 만날 수 있다.

덥다고 짜증 내고 싶을 때, 그런 기특한 여름꽃들의 얼굴을 떠올려 보는 것은 어떨까? 선풍기 하나 없이 맨몸으로 이 긴 여름을 나야 할 여름 꽃들에게 '힘내라'는 짧은 응원의 메시지라도 한번 띄워 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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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리풀 ⓒ 국은정

#물레나물 #나리꽃 #원추리 #동자꽃 #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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