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언론매체가 어제 오후에 이랜드 그룹 계열의 홈에버 오상흔 대표를 인터뷰한 기사를 게재하였다. 기사에서 소개된 그의 발언만을 모아 보면 다음과 같다.
"과연 이 나라가 시장경제 국가, 자유민주주의 국가가 맞는가 하는 암담함과 좌절감을 느끼기도 한다. … 영세업체들이 매장 침탈로 생계를 위협받고 있는 상황에서, 민주노총은 오는 21일 만 명 이상을 동원해 매장 60개를 점거 타격하겠다고 말하고 있다. … 수백억의 재산피해를 입고 있는데, 사회여론이 무서워서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다. … 노조가 자발적으로 농성을 풀기를 기대한다." 이데일리, <이랜드, "시장경제 맞나 좌절감 느껴">, 2007. 7. 19
"이 나라가 시장경제 국가, 자유 민주주의 국가가 맞습니까?"라는 오상흔 대표의 발언은 현재 비정규직 문제로 노사갈등을 겪고 있는 이랜드 그룹의 심사를 가장 잘 나타낸 것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비정규직 문제가 이랜드 그룹에서 비롯된 것도 아니고, 자신들은 그저 '법대로 경영하겠다'는 것인데, 그걸 못하게 막고 있으니 그들의 항변에도 일리는 있어 보인다.
하지만, 이것은 동시에 이랜드 그룹이 갖고 있는 인식의 한계이다. 자본주의 경제체제가 국가의 경제적 기본질서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우리가 사는 시대와 사회는 오직 '자본주의 시장경제 원리'만이 관철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가 '기본적인 질서'라고 해서 그것이 '국가와 사회의 최고 지도원리'는 아니라는 것이다. 더불어 사회문제와 그 갈등상황에 직면하여 '시장경제'니 '자유민주주의'니 하는 식의 원론에 가까운 다소 이념적 접근으로 대응하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할 수 있다.
이랜드 그룹의 비정규직 노동자나 노동계가 바라는 것은, '시장경제질서에 대한 도전'이나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부정'과 같은 거창한 것이 아니다. 그들이 이랜드 그룹의 경영권을 부정하고, 자신들이 경영권을 행사하겠다는 것도 아니다.
몸부림 칠 수밖에 없는 그들이 바라는 것을 가장 단순하게 이야기하면, '노동자와 함께 가는 책임 있고 인간적인 경영'을 해달라는 것이다. '값 싸고 언제든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노동력'만을 추구하여 노동자를 손쉽게 잘라내지 말고, 노사가 인간적인 신뢰관계 속에서 함께 나아갈 수 있는 경영을 해달라는 것이다. 그런 요구가 현대의 시장경제 질서에서 용납될 수 없는 성질의 것인가? 또는 자유민주주의에 위배되는 것인가?
노동자의 요구 '시장경제질서에 대한 도전' 아니다
홈에버 오상흔 대표는 그렇다는 것이지만, 전혀 그렇지가 않다. 근대의 참혹했던 자본주의에서라면 모를까 그 모순을 수정한 현대 자본주의에서는 얼마든지 주장할 수 있고 또한 요구할 수 있는 것이다.
비록 실정법에 문제가 있어 그러한 권리를 제대로 보장받지 못한다고 해도, 그런 주장과 요구 자체가 '시장경제나 자유민주주의를 부정하는 것'처럼 매도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 점에 있어서는 오히려 오상흔 대표가 주장하는 시장경제, 그가 생각하는 자유민주주의가 어떤 것인지 따져 볼 일이다. 혹 그가 바라는 시장경제나 자유민주주의는 '사회적으로 어떤 문제가 있건 기업이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닌가?
기업활동에 있어 자유가 보장되어야 한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그러나 현대자본주의에서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도 강하게 요구되고 있다는 것 역시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이러한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기업홍보 차원으로만 이용하거나 자선사업으로 적당히 보여주는 정도의 것으로 이해할 뿐, 근본적인 경영철학의 차원에서 실천하려 들지 않는 기업들이 많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 자신들이 고용한 노동자의 현실을 배려하는 데서 출발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기업들이 많다는 것이다. 이랜드 그룹은 과연 어느 쪽의 기업인가?
기업의 목적은 당연히 '이윤추구'이다. 그러나 오늘 날의 시대에 '이윤추구만 하는 기업', '이윤추구를 위해서라면 노동자의 현실은 고려하지 않는 기업'을 제대로 된 기업이라고 할 수 있을까? 경영에 있어 항상 '노동현실'이 우선적으로 고려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윤을 위해 노동현실을 쉽게 외면하는 기업은 결코 '책임 있는 기업'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런 기업은 사회적으로 지탄받아 마땅하고, 시민들에 의해 불매운동의 대상이 되어도 할 말이 없는 것이다.
기업가들에게 "이윤추구하지 말고 노동운동하라"는 불가능한 일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의 기업가들에게 기대하는 것은 한마디로 '인간적인 경영'이다. 우리는 그런 기업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비정규직조차 정규직으로 끌어안고, 노동자를 한 가족으로 여기며, 노동자와 함께 발전하려고 노력하는 기업들이 실제로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런 기업의 경영자가 시장경제를 부정하고 이윤추구는 뒷전으로 미루어 둔 채 사회주의를 실천하는 것도 아닌데, 그 기업들은 오히려 더 건실하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모범기업'으로 칭송받는다. 불매운동의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니라 대다수가 노동자인 소비자에게 강한 신뢰와 감동을 준다.
기업가에게 기대하는 것 '인간적인 경영'
반면에 지금의 이랜드 그룹은 어떠한가? 입점해 있는 영세 매장 업주들의 피해도 오로지 노조에게만 책임이 있다고 하고, 자신들은 양보할 걸 이미 다 양보했으니 노조가 알아서 그만 두든가 아니면 공권력 투입을 요청하는 것밖에는 해결방법이 없다고 하고 있다.
"사회여론이 무서워서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다"고 하면서, 자신들의 기업에 대한 사회여론이 왜 그런지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 끝까지 사회여론 따위는 관계없다는 태도이다. 시장경제와 자유민주주의를 부정하는 '노조와 사회여론'이 잘못이지 자신들에게는 아무런 잘못도 없다는 것이다. 이랜드 그룹을 이끌어 가는 경영자들은 과연 올바른 판단을 하고 있는 것인가?
나는 이랜드 그룹이 잘못된 길을 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올바른 자본주의의 길도 아니고, 이랜드 그룹이 지향하는 기독교 윤리에 부합하는 길도 아니며, 기업경영으로서도 최악의 길을 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미 누구도 돌이킬 수 없을 것 같은 때에 용기 있는 결단을 내리는 것만큼 아름답고 멋진 일은 없다는 것도 알았으면 한다. 사회여론이 무서운 것을 경험했다면, 용단을 내렸을 때에 사회여론이 얼마나 관용 있고 호의적인지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이랜드 그룹이 이 길을 포기한다면, "이 나라가 시장경제 국가, 자유 민주주의 국가가 맞습니까?"라는 오상흔 대표의 자기반성 없는 불만에 가득 찬 물음은 고스란히 이랜드 그룹으로 향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랜드 그룹은 이 나라의 올바른 시장경제 체제와 자유민주주의에 부합하는 책임 있는 기업 맞습니까?"라는 시민들의 정당하고 차디 찬 물음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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