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표지위즈 프레스
정치와 경제는 애증의 관계다. 불과분의 관계다. 달콤한 밀어를 속삭이며 같이 가기도 하지만, 예기치 않은 불화로 삐그덕거리기도 한다. 더 나은 사회를 만들어보자는 본질에서 둘은 다르지 않으나 결국은 기본가정과 방법론에서 차이를 보인다. 거칠게 보자면 정치는 권력과 인기를 쫓고, 경제는 경제의 안정성을 쫓기 때문이다. 정치권력을 대표하는 행정부와 독자적인 경제운용을 대표하는 중앙은행 사이의 갈등은 그래서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 결국은 기싸움으로 치닫게 되고, 정치논리가 경제논리를 누르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가장 합리적인 국가라는 미국도 예외는 아니었나보다. <미국 중앙은행 금리결정의 비밀>은 그것을 소개해준 책이다. 그래서 흥미롭다. 그러니 제목만 보고 각종 경제모형과 수치들이 나와서 골치 아프게 할 것이라는 걱정은 붙들어 매도 좋을 듯하다.
저자는 "금리가 돈의 흐름을 좌우한다(9쪽)"는 명제에서 출발했다. 그리고 미국 중앙은행이 1913년 연준법에 의해 처음 설립된 이후 어떻게 통화정책을 이끌어 왔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미국 중앙은행이 금리를 결정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면 경제를 의도하는 방향으로 이끌 수 있다는 얘기인데, 과연 그랬을까? 이는 신문 좀 본다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을 것이다. 미국도 예외는 아니어서 필연적으로 정치권력이 개입했다. 오히려 1935년 은행법 제정 이전에는 재무부장관이 FRB회의에 참석할 때는 의장을 맡아 회의를 주재할 정도(26쪽)였다고 하니, 한국보다 더 했다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명암이 있듯 정치권력이 권력의 달콤함에 빠져 경제를 운용할 때는 필시 예기치 못한 괴물이 나타난다. 인플레이션이 그것이다. "터널 끝에 보이는 빛은 광명천지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이쪽으로 질주해 오는 기관차의 불빛"이라는 경제학자 토드 부크홀츠의 섬뜩한 표현은 현실을 너무나 적나라하게 말했기에 더욱 섬뜩하다.
제1차 세계대전과 대공황, 제2차 세계대전, 한국전쟁, 1970년대 스태그플레이션 등 굵직굵직한 사건을 겪으면서 정치와 경제에 대한 인식은 차츰 달라지게 된다. 금융시스템을 원활하게 작동시키기 위해서는 단기적인 어려움을 초래하더라도 장기적으로는 국가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독립적으로 미국 중앙은행이 금리결정을 해야 한다는 소리다. 그리고 볼커가 FRB의장을 맡을 당시에는 20%가 넘는 초고금리 시대를 열었다. 베트남 전쟁 등으로 인한 인플레이션이 사회에 고착화되어 일단 인플레이션부터 잡자는 인식 때문이었다.
물론 미국과 세계경제에 은행 도산 등 금융불안과 외채급증에 따른 개도국의 디폴트가 수반되었음은 당연한 것이다. 이는 카터가 용인해 주었다는 것도 당연한 것이다. 놀랍지 않은가? 예전 같으면 상상도 할 수없는 그런 정책을 용인해 주었다는 것이 말이다. 물론 자업자득이지만, 당시 카터의 속이 얼마나 쓰렸을지는 불 보듯 뻔하다.
비단 정치권력 뿐만은 아니었다. 리 아이어코카 크라이슬러 회장은 금리인상으로 인한 달러 고평가로 인해 일본기업에 대한 경쟁력이 크게 떨어지고 있다고 불만을 토로했다(290쪽). 차의 성능, 생산성, 연비 등을 개선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해도 가격경쟁력에서 상대가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카리스마 넘치는 볼커 후임으로는 그 유명한 그린스펀이 취임하게 된다. 2002년 한국 증권시장에 가장 영향력이 큰 인물로 선정됐고, 클린턴이 르윈스키와 스캔들이 났을 때도 쌩뚱맞게 그린스펀이 경제호황을 이끌었기에 그 사건이 커지지 않았다는 분석만 보더라도 그에 대한 의심 자체가 사치다.
하지만 모든 이들이 천하의 그린스펀을 옹호하지는 않았다. 걸프전을 승리로 이끌어 엄청난 인기를 누리던 조지 부시가 그 희생양(?)이었다. 재선이 당연시 되던 부시에게 경기침체라는 복병이 기다리고 있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결국 금리인하를 바라던 부시의 바람을 뒤로 한 채 그린스펀은 독자적인 통화정책을 썼다. 그리고 클린턴이 대통령이 되어 그린스펀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게 된다.
공화당 소속인 그린스펀이 이런 결정을 내렸다는 것은 역사적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실제로 부시는 재선에 패배하고 몇 년 뒤 한 인터뷰에서 패배의 원인을 그린스펀에게 돌렸다.(90쪽)
미국 중앙은행을 접하면서 한국은행이 자꾸 떠오른다. 그것도 재정경제부의 등쌀에 밀려 우왕좌왕하는 한국은행이 말이다. 필자만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전 한국은행 박승 총재는 언젠가 총재 외 금통위원 6명 가운데 총재 추천은 1명뿐이고, 나머지는 사실상 정부 몫이라고 불편한 심사를 드러낸 적이 있었다. 쉬이 넘길 얘기는 아니다.
때마침 증시가 대활황이다. "증시가 미쳤다"라는 소리까지 나온다. 이럴 때 일수록 '돈의 가격'을 결정하는 중앙은행의 위치는 신중해 질 수밖에 없다. 다행히 이번 달 콜금리는 0.25% 올렸다. 그리고 연내에 추가적인 콜금리 인상을 시사했다. 현실은 말 그대로 현실이지만, 과거와 동떨어진 현실은 있을 수 없다. 그리고 그 끝은 언제나 인플레이션이라는 괴물이 기다리고 있었음을 우리는 수없이 목격했다. 이번만큼은 정치논리가 경제논리를 덮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 간절하다. <미국 중앙은행 금리결정의 비밀"이란 책의 일독을 그래서 권하고 싶다.
미국 중앙은행 - 금리결정의 비밀
김재홍 지음,
휘즈프레스,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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