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는 번개나 정모에만 있지 않다

너도 나도 <대한민국 사용후기>를 쓰자

등록 2007.07.23 10:36수정 2007.07.23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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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사용후기> ⓒ 갤리온

어느 모임에서건 꼭 '분위기 띄우는' 사람이 한둘 있다. 이런 친구가 단순한 재담수준을 벗어나 지적 교양과 더불어 날카로운 풍자까지 곁들이면 금상첨화가 아닐 수 없다. 우스갯소리지만 새겨 볼수록 생각하게 하는 말. 나를 빗대서 욕을 하는 것 같은데 밉기보다는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말. 그런 언변을 가진 친구와 며칠 지내게 되었다. 바로 <대한민국 사용후기>라는 한 권의 책이다.

'제이 스콧 버거슨'이라는 미국 젊은이가 한국에서 11년째 살면서 쓴 책인데 한국에서 태어나고 줄곧 한국에서 살아온 내가 무심코 지나쳐 오던 많은 현상들을 이 젊은이는 범상치 않은 세계화된 안목으로 통찰한다. 여기서 말하는 '세계화'란 더블유티오나 에프티에이로 대변되는 경제적 통합 개념이 아니고 범인류적인 보편적 가치를 말한다.

책에는 '피맛골의 대학살'이라는 대목이 있는데 '피맛골'은 종로1가에서 4가까지 이어지는 뒷골목 길을 말한다고 한다. 나도 처음 듣는 지명인데 종로 거리에는 으스대는 사대부 양반들이 지나다니니까 그네들이 오갈 때마다 머리를 조아리는 것이 싫기도 하고 또 거들먹거리는 양반들 꼴이 보기 싫은 사람들이 다니는 길로 '말을 피해가는 골목길'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저자가 이 골목길을 다니는 10년 동안 꾸준히 담장이 헐려나가고 멋들어진 한옥은 뜯겨나가는 것이었다. 인정 많던 여주인이 인상적이던 '광화문 만나회관' 자리에 고층빌딩이 들어서고 식당은 지하로 내려 가 버렸다.

건물의 1층에는 '샤넬'이나 '구찌' 같은 외국 상표가 붙은 가게들이 들어서고 거기서 일하는 알바들은 한결같은 말투와 몸짓으로 단련된 깍듯한 예절로 인정머리 없이 손님을 맞이하더라는 것이다.

입을 열기만 하면 반만년 역사와 빛나는 문화전통을 되뇌는 대한민국이 실제로는 역사와 전통을 여지없이 강간하고 있는 건 아닌지 의아해하는 저자의 체험 사례들은 줄줄이 이어진다. 그러면서 묻는다. 우리의 일상생활에 전통과 역사가 어느 정도 포함되어 있느냐고.

내가 입은 옷, 먹는 음식, 하는 말, 쓰는 글, 습관, 자는 집, 몸을 치료하는 의술 등등 그러고 보면 툭 하면 내세우는 반만년 역사의 어느 한 부분도 내 삶에 들여 놓고 있지 않음을 깨닫게 한다.

강북인 종로의 끊임없는 강남화를 저자는 어설픈 미국화와 다름없다고 혹평한다. 중국이나 일본에만 관심을 가지고 한국은 두 나라 사이에 끼인 어중간한 모방문화에 불과하다는 대체적인 외국인들의 인식이 어디에서 비롯되겠느냐면서 지방자치단체마저도 돈벌이에 전통문화를 천박하게 색칠하고 있는 건 아닌지 안타까워한다.

인도의 한 아쉬람에서 청년기를 보냈고 유럽과 일본, 그리고 중국에서 오래 산 책의 저자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문화비평가로 활동했었는데 역사와 인문학에 대한 높은 식견을 가지고 한국을 들여다 보고 있다.

편협한 민족주의에 '엿 먹이는' 책

'당신들의 대한민국'을 쓴 박노자 선생의 책들이 철저한 고증에 입각한 점잖은 정통서술방식이라면 버거슨의 필치는 완전히 인터넷 글쓰기 류다. 그러나 비평적 사회인식과 인문학적 소양이 워낙 뛰어난지라 한국에 대한 여행기 정도로 이해하고 이 책을 펼쳤던 나는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

인도네시아 수도 자카르타에서 한국인이 운영하는 '도레미'라는 가라오케 이야기는 한류를 저자가 단도직입적으로 '섹시한류'라고 부르는 데 대해 할 말을 잃게 한다. 이곳에서 일하는 자카르타 대학 2학년인 여대생과 인터뷰한 글인데 이곳에서 한국인들이 어떻게 이곳 젊은 여성들을 대하는지, 한국인들의 평균적인 삶이 얼마나 비틀려 있고 경쟁과 돈과 권력을 추구하는 수준을 넘어 거기에 묶여 사는지 적나라하게 나온다.

이 책은 아주 노골적이다. 반만년 역사에 빛나는 우리의 조국 대한민국을 아주 대놓고 '엿' 먹이고 있는 책이다. 편협한 민족주의를 대놓고 비방한다. 미국에 사는 한국 유학생들이 툭하면 유색인종에 대한 미국의 차별 운운하면서 한국에 와서는 동남아 등지에서 온 외국인을 아예 벌레 보듯 하는 풍조를 비판한다.

동성애자에 대한 이성애자들의 편견과 박해를 긴 인터뷰를 통해 고발하기도 하는데 특히 이 책에서 재미있는 곳은 저자가 2005년 평양에서 열린 아리랑 축전을 참관하고 와서 하는 이야기이다.

한국와 북한은 똑같은 형제라는 것이 한 마디로 담을 수 있는 이 미국인 저자의 관람평이다. 다른 것보다 닮은 것이 너무도 많다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남과 북이 닮은 게 얼마나 많은가. 우리는 그것을 한번도 주의 깊게 보지 못하고 살았지만 외국인 눈에는 그게 단번에 보인 것이다.

'후기'는 번개나 정모에만 있는 게 아닌 것이다. 한 나라에 대해서도 후기를 쓸 수 있다면 회사가 문제 있는 상품을 회수해서 수리해 주듯이 나라도 백성들에게 항상 보증수리를 외쳐서라도 서비스를 강화해야 할 듯싶다. 너도나도 대한민국 사용후기를 쓰자.

덧붙이는 글 | 갤리온 출판사. 제이 스콧 버거슨이 쓴 책. 값 12,000원.

덧붙이는 글 갤리온 출판사. 제이 스콧 버거슨이 쓴 책. 값 12,000원.

대한민국 사용후기 - J. 스콧 버거슨의

스콧 버거슨 지음, 안종설 옮김,
갤리온, 2007


#대한민국사용후기 #제이 스콧 버거슨 #후기 #피맛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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