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벌주의가 '신정아' 키웠다

언변에 로비에 학교·미술계 모두 속아

등록 2007.07.23 09:35수정 2007.07.23 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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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합뉴스

[김나령 기자] 광주 비엔날레 예술감독으로 발탁됐다가 학력 및 논문 조작이 들통나 미술계를 충격에 빠뜨린 동국대 조교수 신정아(35)사건을 계기로 우리 사회의 뿌리 깊은 학벌 지상주의를 성토하고, 큐레이터에 대한 검증 시스템이 마련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큐레이터는 여성이 70% 이상을 차지할 정도로 여성들 사이에 선망의 직종이자 미래 유망직종의 하나로 꼽히며 최근 10년 사이 급부상했다.

그렇다보니 국내 미술시장의 경우 큐레이터에 대한 수요에 비해 공급인력이 넘쳐나 석·박사 학력을 갖추고도 낮은 임금과 힘든 업무량을 견뎌야 하는 '겉 다르고 속 다른' 직종이라는 것이 실제 큐레이터 직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의 전언이다. 뿐만 아니다. 체계적인 양성시스템이 없다보니 제대로 된 인사검증이 어려워 언변 있고 로비 잘하는 신씨 같은 사람이 '간판 큐레이터'로 뜨는 실정이다. 따라서 전문가들은 "이번 기회에 미술관들도 주먹구구식 경영에서 벗어나 제대로 된 큐레이터 교육과 검증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고 한 목소리로 지적했다.

다행히 미술계 내부에서 '제2의 신정아'를 막기 위한 자정노력이 일고 있어 눈길을 끈다. 오는 8월18일 출범을 앞둔 한국큐레이터협회(위원장 박래경) 준비위원회의 윤상진 독립 큐레이터는 "이번 사건을 계기로 큐레이터에 대한 문제가 부각된 만큼 자체 검증과 권익 보호를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밝혔다.

한편, 박사학위는 물론 캔자스대 학·석사 학위까지 모두 거짓으로 판명난 신씨는 지난 16일 "예일대 박사학위 증거를 찾아오겠다"며 사실상 미국으로 도피한 상태다. 이어 18일 광주 비엔날레가 신씨를 위계에 의한 공무집행방해 혐의로 광주지방검찰청에 고발하고, 동국대 윗선의 '감싸기 의혹' 증거가 속속 포착됨에 따라 신정아 사건은 제2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다.

'신정아 사건' 계기로 본 큐레이터 세계
박봉에 고된 업무'백조'같은 직업

광주비엔날레 공동 예술감독 임명에서 철회된 신정아 동국대 교수의 학위 조작 사건을 계기로 '큐레이터'라는 직업에 대한 일반 대중의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여성이 70% 이상을 차지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을 만큼 큐레이터는 특히 여성들에게 선망의 직종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정작 이번 신정아 학위 조작 사건을 계기로 들여다본 큐레이터 세계의 실상은 많은 여성들이 품고 있는 '장밋빛 환상'과는 상당 부분 동떨어져 있다. 큐레이터를 목표로 석·박사 학위를 받기 위해 쏟아부은 노력에 비해 금전적인 대우는 박봉에 가까우며 육체적으로도 고된 노동에 시달리고 있어 큐레이터들은 자신들을 가리켜 '백조와 같다'고 표현할 정도다. 물 위로는 우아한 자태를 뽐내고 있으나 물 속에서는 필사적으로 발길질을 해야 하는 겉 다르고 속 다른 것이 큐레이터의 세계라는 것이다.


큐레이터는 어떤 직업?

큐레이터(curator)란 미술관이나 박물관에서 전시기획을 비롯해 소장품의 수집 및 조사, 관리를 담당하는 전문가를 일컫는다. 국·공립 미술관이나 박물관에서 근무하는 경우에는 '학예사' 혹은 '학예연구원'으로 불리기도 한다. 외국의 경우 큐레이터는 소장품 연구와 기획을 주로 맡는다(영국의 '키퍼'와 프랑스의 '콩세르바테르' 등). 또 전시기획자, 작품 반입·반출 담당, 보존과학자, 전시디자이너 등으로 다양하게 분류된다. 하지만 국내에선 업무 구분이 없이 이것 저것 다 하는 그야말로 '일당 백'으로 일하고 있어 확실한 업무 정립조차 돼 있지 않은 상태다.


전시기획에서 작가 선정 및 섭외, 작품 선정, 도록 제작, 전시장 세팅, 전시홍보, 오프닝 준비, 교육프로그램 기획, 관람객 안내까지 도맡고 있는 실정이다. 소규모 사립미술관의 경우에는 관람객 안내와 더불어 외부에서 예산을 조달하는 '펀딩'까지 겸하고 있다.
큐레이터는 미술에 대한 이해뿐 아니라 능통한 외국어가 요구되는 등의 자격조건 때문에 대부분 석사 이상의 학력을 가지고 있고 외국 유학파들도 다수를 차지한다.

국내 큐레이터들이 받는 평균적 대우는?

국내 큐레이터의 경우 이처럼 고학력에다 강도 높은 노동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으로 보수는 낮은 편이다. 한국고용정보원 '산업·직업별 고용구조 조사'(2006년)에 따르면 국내에서 큐레이터로 활동하는 종사자 수는 2867명이며, 평균 연봉은 2886만원으로 조사됐다. 하지만 업계 종사자들에 따르면 신입 큐레이터의 경우 낮게는 연봉 1200만원부터 시작하며 스타 큐레이터의 경우도 5000만원을 넘기 어렵다고 한다.

또 국·공립 미술관 및 박물관을 제외하고는 인맥 위주의 채용이 많은 데다, 대부분 계약직이라 신분조차 불안정하다. 한 사립미술관에서 일하는 신입 큐레이터는 "인턴 시절 일당 1만원을 받으면서도 일에 대한 열정으로 견뎠다"면서 "인턴이라도 될 수 있었던 것은 운이 좋은 케이스"라고 전했다.

큐레이터에도 국가자격증 제도가 있지만 강제조항이 아니기 때문에 대부분의 미술관 및 박물관에서 외면하는 실정이다. 이런 열악한 고용구조에도 불구하고 큐레이터는 최소 5년에서 10년 이상 경력을 쌓아야 인정받을 수 있다. 그래서 중도 포기자가 많은 편이다. 그러다보니 이번 사건의 당사자인 신정아 교수의 경우 만 25세에 금호미술관 인턴 큐레이터로 출발해 수석 큐레이터, 성곡미술관 수석 큐레이터와 학예실장을 거쳐 30대 초반에 동국대 전임교수에까지 올라 큐레이터들 사이에서는 '신데렐라'로 불려왔다.

그래도 큐레이터는 유망직종?

그럼에도 불구하고 큐레이터는 그동안 각종 자료에서 미래 유망직업으로 꼽혀왔다. 중앙고용정보원이 발간한 '2007 한국직업전망'은 큐레이터를 소개하며 '국민소득 향상과 주5일 근무제 정착 등으로 국민의 문화·여가 수요가 증대하고, 정부에서 2011년 박물관 건립 500관을 목표로 하는 등 향후 5년간 큐레이터 고용은 증가할 것'으로 내다봤다. 지난 2004년 여성가족부가 선정한 '여성 유망직업 100선'에도 포함돼 '여성 신직업 온라인 페스티벌'에서 자세하게 소개될 정도로 여성들에게 유망직종으로 선전돼왔다.

전문가들은 큐레이터라는 직업에 대한 위상정립부터 제대로 돼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김은영 경기도미술관 학예팀장은 "개인미술관 지킴이에게까지 큐레이터라는 이름이 남발되고 있는 것이 문제"라며 "학술적 연구에서 기획력까지 갖춘 학예연구사로서의 큐레이터 직에 대한 사회적 위상 확립이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또한 "큐레이터 양성 학과들이 지나치게 늘어나면서 수요에 비해 공급이 지나치게 과열되고, 제대로 된 교육도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면서 "전문적인 큐레이터를 양성할 수 있는 교육시스템의 마련이 시급하다"고 그는 강조했다.

현직 큐레이터에게 들어보는 7문 7답
인턴땐 연봉없이 차비만

한미애(45·사진) 한국큐레이터연구소 소장은 서울시립미술관과 일본 나고야 시립미술관 큐레이터를 지낸 큐레이터 경력 15년차의 전문인. 현재는 미술 전시기획 및 큐레이터 연구·양성기관인 한국큐레이터연구소를 운영하며 부설 예술복합공간인 '스페이스 틈새'를 통해 참신한 신진작가를 발굴하고, 창의적인 전시를 기획하는 데 힘을 쏟고 있다. 큐레이터라는 직업세계를 직접 몸으로 부딪혀온 한 소장으로부터 큐레이터에 대한 이모저모를 들어보았다.

-큐레이터가 되기 위해 어떤 과정을 거쳤나?
한국에서 큐레이터 붐이 분 건 10년이 채 안됐다. 나는 큐레이터 15년차로 내가 처음 시작할 때만 해도 아직 체계가 잡히지 않았다. 일본에서 유학하고 그곳에서 실제 전시기획 업무를 많이 배웠다.

-인턴시절 연봉은 얼마?
나의 경우, 일본에서 큐레이팅한 경력이 인정돼 1998년 서울시립미술관 공채로 들어갈 때 월 250만원 정도를 받았다. 꽤 높은 편이었다. 하지만 요즘은 대우가 그나마 괜찮은 국·공립 미술관(현재 국내 국·공립 미술관은 7개 정도)도 행정직 공무원 연봉 수준으로 학사출신이 월 90만~100만원, 석사출신이 120만원 정도를 받는다. 수석큐레이터가 되려면 최소한 석사졸업하고 8~9년은 돼야 하는데 월평균 300만~350만원 정도를 받게 된다. 또 대부분의 미술관은 채용 전·후 2~3개월 인턴과정이 있는데 이때는 아예 연봉 개념이 없고 차비 정도가 지급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근무조건은 어떤가?
아무래도 전시를 기획하는 작업인 만큼 전시가 시작되면 최소 일주일은 밤을 샌다. 또 평소에도 작가들을 발굴, 관리하고 좋은 작품들을 찾아다니려면 야근은 감수해야 한다. 사실 열정이 없으면 하기 힘든 직업이다.

-열악한 근무환경에도 불구하고 큐레이터를 희망하는 사람들 많다. 왜 그럴까?
요 몇년 사이 문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미술산업도 급속도로 팽창했다. 또 앞으로 전망도 밝다. 이제는 미술계도 중간매개자가 없으면 안되는 시대다. 큐레이터, 갤러리스트, 딜러 등 화가와 소비자를 연결해주는 직업군단이 꼭 필요하며, 앞으로도 각광받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큐레이터는 대부분 여자다. 왜 그런가?
보수가 적기 때문이다. 사실 큐레이터란 직업에 매력을 느끼는 남성들도 많지만 생계유지가 안되다 보니 포기하는 경우를 많이 봤다.

-큐레이터 산업이 발전하려면 무엇이 선행돼야 하나?
이번 신정아 교수 사건으로도 알 수 있지만, 큐레이터 업계가 갑자기 팽창하다보니 문제가 많다. 시스템 부재, 인력 부족 등의 문제가 해결돼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우선 제대로 된 교육기관이 필요하다. 큐레이터 관련학과가 우후죽순 생겼지만 미학과 교수가 큐레이팅에 대해 가르치는 등 아직 체계가 안잡혔다. 또 너무 이론 중심이다. 학벌 위주의 미술계도 문제다. 사실 서울대파, 홍대파, 유학파가 아니면 크기 힘든 데가 미술계다. 학벌을 요구하는 대신 제대로 된 큐레이터 검증시스템이 시급한 시점이다.

-큐레이터의 자격요건 세 가지만 꼽는다면?
비판적으로 작품을 읽어내는 눈, 어학능력(외국어 한 가지 정도는 완전히 마스터해야), 상황을 포착하는 순발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무엇보다 열정이 있고 기획전시 능력이 뛰어나면 유학파보다 먼저 성공하고 롱런할 수 있는 게 이 분야다.
#신정아 #학벌사회 #동국대 #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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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여성신문은 1988년 국민주 모아 창간 한국 최초의 여성언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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