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생의 사회협약, 누가 어깃장을 놓는가

등록 2007.07.23 14:20수정 2007.07.23 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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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랜드 사태가 새 국면을 맞았다. 경찰력 투입이후 강제해산된 이랜드 조합원과 비정규직원들은 실정법위반혐의로 사법처리를 기다리는 처지가 되었지만 누구도 이랜드 사태가 끝을 맺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랜드 매출제로’라는 목표를 향해 민주노총의 전 조직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교섭결렬과 공권력투입이 생산적 해결을 어렵게 만든 원인이 되었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IMF외환위기를 극복하면서 외생적으로 주어진 97년 체제는 가혹하다. 대량해고와 구조조정의 시간이 한국인들을 괴롭혔지만 그것도 ‘위기극복 때까지만’이라는 기대가 허물어지고 있다. 이제는 상시적인 고용불안에 떠는 체제로 굳어지고 있다.

노동시장의 유연성은 세계화시대에 불가피한 선택이라 하더라도 이 체제의 어딘가에 인간의 모습을 한 자본가나 기업인을 우리가 고대하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이 기대가 허물어지면서 우리는 인간 그 자체에 대한 심각한 불신에 시달리고 있다.

올해 7월부터 발효된 비정규직 관련법은 사회양극화해소를 위해 한국사회 전체가 약속한 것이다. 가능하면 비정규직을 늘리자는 취지가 아니라 줄이자는 취지에서 만들어진 법이다. 이 법에 대한 노사양측의 불만이 말해주듯 이 법은 비정규직과 관련해 어느 일방의 편에 서있지 않다. 수량적으로만 보자면 균형과 중도를 이루고 있다.

그렇다면 이 법의 취지를 올바로 달성하는 것은 이제 오롯이 이 법을 대하는 당사자들의 몫이다. 사용자들은 가능하면 기존의 비정규직을 2년이 지난 후에 해고하는 것이 아니라 정규직으로 채용해야 하고 노동진영은 이를 위해 더 이상의 불필요한 투쟁보다 생산성향상과 같은 기업의 책임주체의 일원으로서 성의를 보여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랜드 사용자측은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돌리는 생산성향상과 합리적 경영보다 손쉬운 대량해고를 선택하고 말았다. 들리는 말로는 1조8천억 원에 달하는 까르푸 인수자금 중 8천억 원을 차입했다고 한다. 당연히 경영상 자금압박에 시달릴 수밖에 없으며 이를 보전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 비정규직을 대량해고 하는 방법을 사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문제는 이 방법을 동원할 수밖에 없는 이랜드 경영진의 철학빈곤이다.

비정규직을 줄이자는 사회적 합의를 어기고 경영의 어려움을 손쉬운 대량해고로 해결하려는 게으른 발상, 이것은 이랜드가 창업정신이라고 하는 기독교에서조차 게으른 종을 질타한 하나님의 섭리를 외면한 게으른 해결방식이다. 그들이 섬기는 하나님을 그들이 모욕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앞에 놓인 문제를 풀 때 그 한 가운데에 항상 ‘사람’을 두어야 한다. 그리고 보다 많은 이윤을 추구할 때에도 보다 많은 고용을 전제로 해야 한다. 그것이 지속가능한 자본주의를 지향하는 현대자본주의의 특성이다. 그것이 인간목숨을 파리처럼 여겼다가 야만의 이름으로 역사에서 퇴장하고 있는 상업자본주의와 산업자본주의를 극복하는 길이다.

그래서 나타난 것이 이른바 뉴 패러다임으로서의 ‘협약의 정신’이다. 노동과 자본이 각기 계급적 이익을 위해 대립하고 투쟁하기보다는 인정하고 협력함으로써 서로의 파이를 만들어 더 좋은 일자리를 창출하고 더 많은 실업자를 구제할 수 있는 패러다임이다.

이 같은 사회협약정신은 수백 년 간의 계급투쟁으로 교훈을 얻은 북·서유럽이 전통을 이어오고 있으며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극복하는 강소국, 강중국 모델로 훌륭히 자리매김하고 있다. 그리고 한국사회도 21세기 들어 이 같은 새로운 모델국가에 대한 공부와 모색이 진행되고 있다.

특히 노동진영에서는 그간의 어용시비에서 벗어나려는 한국노총이 ‘사회개혁적 노동조합주의’라는 기치를 걸고 새로운 패러다임을 실천하고 있기도 하다.

문제는 자본이다. 기업인이다.

사회협약정신을 확립하기 위해 개별적으로 노력하는 기업인들이 없는 것도 아니다. 대선후보로 떠오르고 있는 문국현 사장의 유한킴벌리는 대표적인 사람중심의 회사다. 골리앗 투쟁으로 유명한 현대중공업도 90년대 후반이후 맺은 노사협약을 바탕으로 비약적인 매출고를 보이고 있다.

이런 와중에 사회적 합의라는 사회분위기에 흙탕물을 일으키는 미꾸라지가 바로 이랜드 사업주다. 전통적으로 노조를 인정하지 않는, 기독교 근본주의를 지향하는 기업이미지는 이번 사태로 그간 별다른 개선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랜드 노조가 정규직 임금인상안을 비정규직 차별철폐와 연계함으로써 사측과의 협상에 걸림돌로 작용한 측면이 있지만 지난 협상과정을 보면 협상결렬의 핵심이 비정규직의 외주 용역화 철회를 1년간 유예한다는 점에서 노조 측보다는 사용자 측의 무성의가 협상결렬로 이어졌다는 인상을 주고 있다.

물론 생각 같아서는 노조 측에게도 양보와 희생을 요구하고 싶다. 비정규직을 모두 정규직으로 돌리는 대신 정규직 직원들도 회사의 경영형편에 맞게 요구수준을 줄이거나 희생을 자처하는 자세도 필요하다고 본다.

즉 기업이윤의 일정비율을 지속가능한 연구개발투자비를 지출하고 나머지 이윤 중 일부를 정규직으로 전환된 전 직원들에게 성과급으로 돌리는 대신 기업이 적자를 내거나 채산성 악화가 예상될 경우, 스스로 임금을 삭감하거나 전환배치 등에 능동적으로 임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노조의 이런 유연한 전제가 있어야 사용자 측도 비정규직 문제해결의 여유가 생기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랜드 사용자가 노조의 유연성이 없다고 해서 비정규직을 손쉬운 정리해고로 대응한 것은 방법과 수순의 문제가 아니라 철학의 문제다. 그리고 그 철학의 빈곤은 현실적 불이익을 받을 때 교훈을 얻을 수밖에 없다.

그것은 민주노총과 시민단체들이 주도하고 있는 불매운동이다. 불법적 점거농성은 상징투쟁으로서 의미가 있지만 지속적으로 국민들의 동의를 얻기 어려운 투쟁 방법이다. 그보다는 사회적 합의를 어긴 기업에 대해 소비자들에게 직접 호소함으로써 기업생사여탈권이 시민사회에 있다는 점을 명확히 해주는 것이 훨씬 근본적이고 강력한 대응방식이다.

신자유주의 질서가 더욱 확연해지고 있는 지금은 조그만 틈을 벌리면서 각자의 이익을 추구하는 구시대 패러다임을 극복해야 한다. 협력하고 협동하여 더 많은 부를 창출하고 더 많은 일자리를 만들어 내야 한다.

이 점에서 한국노총이 어용시비에도 불구하고 투자를 적극적으로 유치하는 노선을 내건 것은 진정한 용기다. 그런데 이 같은 노동진영의 노력을 무위로 만드는 것이 바로 일부 기업인들의 전근대적인 노사관계인식이다. 함께 더불어 사는 방식보다는 손쉬운 구조조정이란 유혹에 너무도 쉽게 휘말려 드는 일부 기업인들의 철학빈곤이 상생의 패러다임 정착을 어렵게 하는 것이다.

이랜드 사태는 이미 단일 사업장의 범주를 넘어선 사례가 되었다. 사용자 측이 ‘사람중심의 성장모델’을 부정하는 한 이 같은 소모적 투쟁은 지속될 수밖에 없다. 반대로 사람중심의 뉴 패러다임에 적응하는 기업만이 생존과 번영을 구가할 수 있다. 그런 시대로 한국사회가 접어들었다.

따라서 사용자들의 철학빈곤을 극복하기 위해 장기적으로는 국민철학교육을 더욱 강화하는 것이 필요하겠지만 당장은 이랜드 계열사의 불매운동에 건강한 의식을 지닌 시민들의 동참이 매우 필요한 시점이다. 현실적 교훈을 줌으로써 뉴 패러다임의 토대를 쌓는 것도 소중한 과정이다.

나부터 그간 찾았던 뉴코아 할인점을 가지 않을 작정이다.
#이랜드 #민주노총 #한국노총 #패러다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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