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가는데 이천 원 우산 수리 기본 천 원"

비 그친 후의 어느 풍경-칼갈이 할아버지

등록 2007.07.23 19:42수정 2007.07.24 09:19
0
원고료로 응원
【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아저씨, 사진 좀 찍어도 됩니까?"
"찍으이소. 그런데 사람은 나오게 하지 말고."
"아, 예. 할아버지 얼굴은 안 나오게 해드릴게요."

마음씨 좋게 생긴 초로의 할아버지. 아파트 숲 속에서 우연히 만난 칼갈이 장수와의 만남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너무나 오랜만에 보는 풍경이라 조심스레 프레임에 담아보았다. 한참을 이리저리 찍고 있는데, 지나가는 중년 여인이 사진도 찍어주면서 '참 좋네요'라고 너스레를 떤다. 할아버지는 저번에도 어떤 젊은 사람이 카메라를 들이대고 난리였다면서 맞장구를 친다. 그러면서 요즘에는 이런 모습을 보기가 힘들어서 신기한 모양이라며 점잖은 결론을 내린다. 그 결론에 심정적으로 동의하면서 나는 열심히 셔터를 눌러댔다.

"칼 가는데 얼마예요?"
"한 번 가는데 이천 원!"
"우산은 수리하는데 얼마죠?"
"기본은 천원이고 우산대 상황에 따라 달라요."
"아, 그러세요. 다음에 고장 난 우산 가지고 올게요."
"그렇게 하이소."

사진을 그냥 찍는 것이 마음에 걸려 다음에 수리하러 오겠노라는 약속을 남기고 발걸음을 돌렸다. 아마 할아버지는 알 것이다. 내가 한 약속이 일종의 인사치레이며, 허언에 불과하리란 것을. 그나마 말이라도 그렇게 해주니 고맙지 않느냐며 스스로 위안하면서 말이다.

a

내 청춘 수레에 묻어 ⓒ 김대갑

할아버지는 하루 종일 저 자리에서 다문다문 찾아올 손님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하루 서푼 벌이라도 조금씩 벌어서 집에서 기다릴 손자나 할멈에게 과자나 쌀을 사 주실지도 모른다. 도대체 할아버지는 저 수레를 얼마 동안이나 사용했을까? 한눈에 보아도 수십 년은 족히 됨직한 수레였다. 어쩌면 저 수레는 참 고마운 수레일지도 모른다. 가난하고 힘든 시절에 그나마 일용할 양식이라도 제공해주었으니 말이다.

할아버지와 헤어지면서 돌아가는 길에 문득 머리에서 <난장이가 쏘아올린 공>에 나오는 어떤 장면 하나가 스치듯이 떠오른다. 옴니버스 식으로 구성된 그 연작 소설의 주인공은 난장이였고, 난장이의 직업은 수도설비 기능공이었다. 몸짓에 비해 너무나도 큰 배낭을 힘겹게 끌며 난장이는 각 집을 돌아다니며 수도설비를 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난장이를 별로 믿지 않았다. 그 작고 가냘픈 몸으로 무슨 일을 하느냐며 일거리를 주지 않았다. 그러나 난장이는 훌륭한 설비기능공이었다. 잘 안 나오는 수도꼭지를 간단한 기구 하나로 콸콸 나오게 만들었다. 그 얼마나 신기한지. 막혔던 체증이 한꺼번에 쑥 내려가는 느낌이란 바로 이런 것이었다.

a

다양한 숫돌과 우산대의 만남 ⓒ 김대갑

저 할아버지도 그런 시원함을 사람들에게 안겨줄 것이다. 칼끝이 무뎌져 무나 고기를 자를 때 힘들게 고생하던 주부들의 노고를 일거에 해결해 줄 것이다. 숫돌에 간 칼날로 가족들에게 줄 음식을 썩썩 자를 때의 쾌감이란!

우리 어릴 때의 동네 풍경은 참 소박했다. 아침에는 두부 장수들이 작은 종을 딸랑거리며 두부나 콩나물을 팔았다. 그보다 더 이른 시절에는 재첩 국 장수가 '재첩 국 사이소'를 외치며 돌아다니기도 했다. 오전 나절에는 개나 고양이를 사러 오는 개장수들이 '개 팔아라, 고양이도 산다'를 외치며 골목을 지나다녔다. 오후가 되면 소금 장수의 '소금 사시요잉'이라는 외침이 담 너머로 들려왔다. 그리고 비가 오기 전이나 비 갠 오후에는 우산기술자들이 수레를 끌며 우산을 고쳐주겠다고 외쳤다. 참 정겹고 그리운 외침들. 그 많은 외침들은 어느새 추억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말았다.

가만 생각해보니 저 할아버지는 참 재주도 많다. 칼도 갈 수 있고, 우산도 척척 고치니 말이다. 칼과 우산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 물건이지만 쇠로 만들어졌다는 공통점이 있기에 가능한 기술 결합이겠지.

다시금 그 난장이를 떠올린다. 작은 목소리로 골목을 돌아다니며 '수도꼭지 고쳐요'라고 외치는 그의 모습이 풍경화처럼 뇌세포를 자극한다. 가난하고 힘들었던 시대의 언어들, 소박한 사람들의 바람을 담았던 외침들, 그리고 좁은 골목길. 그 추억의 언어를 생각하며 비 갠 오후의 하늘을 쳐다본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유포터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유포터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칼갈이 #난장이가 쏘아올린 공 #난장이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소설가, 스토리텔링 전문가. <영화처럼 재미있는 부산>,<토요일에 떠나는 부산의 박물관 여행>. <잃어버린 왕국, 가야를 찾아서>저자. 단편소설집, 프러시안 블루 출간. 광범위한 글쓰기에 매진하고 있음.


AD

AD

AD

인기기사

  1. 1 "과제 개떡같이 내지 마라" "빵점"... 모욕당한 교사들
  2. 2 한국 언론의 타락 보여주는 세 가지 사건
  3. 3 우리도 신라면과 진라면 골라 먹고 싶다
  4. 4 한국 상황 떠오르는 장면들... 이 영화가 그저 허구일까
  5. 5 'MBC 1위, 조선 꼴찌'... 세계적 보고서, 한글로 볼 수 없는 이유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