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난 왜 고추가 없어?"

양성평등교육은 영유아 시기부터 필요

등록 2007.08.22 13:30수정 2007.08.22 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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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놀러 온 남자 아이가 오줌을 누는 광경을 지켜보던 29개월 된 딸 아이의 눈이 갑자기 동그래진다. 대소변 가리기를 이제 완전하게 다 끝낸 딸 아이의 눈에는 아빠가 아닌 자기 또래의 남자 아이가 서서 소변을 누는 모습이 신기하게 보였나 보다. 게다가 자기와는 다르게 생긴 남자 아이의 성기도.

자기도 오줌을 누겠다며 조그만 자기 변기에 앉더니 궁금하고 신기하다는 듯 자꾸 자신의 성기 부분을 들여다보고 또 만져 본다. 만지다 못해 남자 아이가 성기를 잡고 오줌을 누던 것처럼 자기의 속살을 마구 잡아 뜯기까지 한다.

남자 아이의 엄마와 함께 그런 딸 아이의 모습을 보고 한참을 웃었다. 기저귀도 못 떼던 아이들이 이제 대소변을 가리고, 또 남성과 여성의 신체적 차이에 눈 떠가는 과정이 대견하고 기특했기 때문이다.

남자 아이의 엄마가 친절하게 설명해주기 전까지는 그랬다. 나름대로 자신의 인생관과 가치관이 뚜렷하다고 지금까지 느껴온 그 옆집 엄마는 이렇게 말했다.

"오빠는 남자니까 고추가 있고 너는 여자니까 고추가 없지."

딸 아이의 시무룩한 표정이 없었더라면 난 그냥 넘겨버릴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러한 설명에 약간 풀이 죽은 듯 "엄마, 나는 고추가 없어?"하고 되묻는 딸 아이를 보니 지극히 평범하고 어찌 보면 합당해 보이는 이 대답이 과연 옳은 것인가, 우리 아이에게 이렇게 가르쳐도 되는 것인가에 대해 의문이 들었다.

프로이트는 여성들이 남성의 성기를 경원한다고 했지만 어렸을 적부터 '있다'와 '없다'로 가르칠 때 오히려 그러한 생각은 학습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아이를 출산하기 전 엄마와 주변 사람들은 아이의 성별을 가장 궁금해한다. 그 아이가 어떤 특성을 지닌 고유한 존재인지를 떠나 딸인지 아들인지(물론 많은 경우 아들을 선호하기도 하고) 갖은 속설로 점찍어보는 것이다.

그리고 성별이 정확히 밝혀지자마자 딸이라면 분홍빛 계열, 아들이라면 푸른 색 계열의 옷과 물건을 산다. 성별을 모른 채 보면 여자아이인지 남자아이인지 분간도 안 되는 갓난아이들을 유일하게 판단할 수 있는 방법은 바로 그들이 입고 있는 옷 색깔이다. 우리 아이의 경우 분홍색 옷을 입히고 머리핀을 꽂으면 어른들은 '천상 여자'라고 했고 하늘색 옷을 입혀 밖에 나가면 '여자였어요?'하고 되묻기 일쑤였다.

하지만 아이들은 어렸을 적부터 여자 혹은 남자에게 적절하다고 여겨지는 색깔을 입고서 자라나게 마련이다. 여자아이들 옷은 온통 분홍 일색이기에 연두나 노랑, 파랑 계열의 옷과 물건들을 일부러 사주려고 해도 그마저 힘든 일이었다. 그렇게 분홍색 옷을 자주 입고 푸른색 옷만 입고 다니는 옆집 남자 아이를 보며 자란 우리 아이는 두 살 무렵 파란색을 볼 때마다 그 남자 아이의 이름을 붙여 '**이 색'이라고 말했다.

분홍색과 푸른색의 옷을 입고 자란 아이들은 그들에게 가장 친숙한 물건인 장난감에 있어도 확실한 성별 분리 관점 속에서 자라난다. 여자아이들에게 로봇이나 자동차를 사 주고 남자아이들에게 소꿉놀이 세트를 사주는 부모나 친지는 흔치 않다.

아이들이 즐겨 보는 텔레비전 프로그램 역시 마찬가지다. '좋은 프로그램'이라고 알려지고 많은 상을 받은 EBS의 <방귀대장 뿡뿡이>나 <뽀롱뽀롱 뽀로로> 등의 프로그램조차 양성평등적인 시각에서 볼 때는 부족한 부분이 많다.

뿡뿡이는 보조 주인공을 '짜잔 형'이라고 부르는 걸로 보아서 주황색 캐릭터이긴 하지만(그나마 파란색이 아닌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할까) 분명히 남자아이로 설정되었고, 보조 캐릭터로 분홍색의 뿡순이가 등장한다.

남자 아이 캐릭터가 주인공이고 여자 아이 캐릭터는 보조적 역할에 불과한 건 <뽀롱뽀롱 뽀로로>도 마찬가지다. 뽀로로는 덤벙대지만 활발하고 씩씩한 남자 아이고, 여자 펭귄은 그저 상냥하고 '여성적'인 인물로 등장한다. 다른 여자 캐릭터인 '루피'의 특기는 요리이며 역시 상냥하고 얌전하며 착해서 늘 친구들을 먹여 살리는 역할로 나온다. 똑똑한 발명왕 '에디'도 남자아이이고 우직한 '포비'도 남자아이다.

왜 이렇게 전형적일까. 양성평등교육적인 관점이 아닌 유아교육의 측면에서는 반드시 이렇게 전형적인 성 양상과 성역할이 등장해야 하는 것일까 생각해보고 외국의 프로그램들도 자세히 지켜보았지만 외국 프로그램의 경우 그렇지 않아 보였다.

보통 유아 프로그램의 경우 성별에 따른 성격차이는 거의 나타나지 않으며 성별 자체를 부각시키지 않고 있다. 어린이 프로그램의 경우에는 오히려 모험심 많은 주인공 여자아이가 탐험과 여행을 떠나거나 중세의 기사가 되어 정의를 위해 싸우기도 한다.

어렸을 적부터 가정과 사회에서 이렇듯 무수한 코드를 학습하면서 자란 아이들의 무의식에 남성과 여성은 과연 어떠한 이미지로 자리를 잡을까. 그리고 그들이 자신을 특정 성으로 인식하고 자리 잡아 가는 과정에서 또 어떤 역할을 할까.

요즘 들어 초등학교 교육에서 양성평등교육이 주요 이슈 중의 하나인 점은 참으로 바람직하고 고무적인 일로 여겨진다. 하지만 양성평등교육이 영유아 시절부터 제대로 자리매김 되는 것이야말로 교육의 시작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영유아들은 교육제도나 사회제도와는 어느 정도 분리된 채 가정에서 주된 생활을 하고 있기에 부모와 친지들의 의식만으로도 이 일은 충분히 가능하리라고 본다.

그래서 나는 오늘 우리 딸 아이에게 말한다.

"너는 왜 고추가 없냐니…. 없는 게 아니라 다르게 생긴 거야."
#딸 #양성평등 #성교육 #고추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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