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이별도우미, 호스피스

부산의료원 호스피스들을 만나다

등록 2007.07.27 10:56수정 2007.07.27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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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훈
김성자씨를 따라 병실에 들어가 보기로 했다. 그녀가 '옷'을 건넨다. 호스피스 가운이다. "오늘 처음 실습 나오신 분이라고 할게요. 일반 병실에서는 그래야 할 것 같네요. 2층에 갈 때는 호스피스 취재 나오신 분이라고 해도 될 것 같은데." 환자들의 특성, 간병인의 유무와 가족의 심리상태 등 자기가 알고 경험한 것을 바탕으로 한 김성자씨의 조심스런 권유다.


왜 다른 병실과 달리 2층에서는 나의 '정체'를 밝혀도 '될 것 같다'는 것일까. 부산의료원이었다. 의료원 '2층'은 기초생활수급자나 행려병자만이 입원해 있는데, 간병인이나 보호자가 거의 없다고 한다.

김성자씨는 죽음을 앞둔 이를 돌보는 호스피스 일을 10년 넘게 해왔다. 부산의료원 호스피스 봉사팀장이다. 의료진으로부터 '소생 불가'(기대수명 6개월 이내)로 진단 받은 환자에게 호스피스 돌봄을 묻는데, 가족이나 환자 본인이 거절할 때가 많다. 여러 호스피스 자원봉사자와 환자들의 '짝'을 지어주는 것이 팀장의 일이다.

죽음을 앞둔 환자나 가족이 극히 예민한 상태인 것은 두 말 할 것도 없다. '실습' 나왔다는 거짓말을 나는 작은 예의라고 생각했다. 온 마음으로 하는 선의의 거짓말. 아니 오늘 나는 정말 호스피스 실습 나온 사람이다.

의사가 환자를 둘러보는 회진처럼, 김성자씨도 병실을 오르락내리락 했다. 열 남짓한 환자들 중 4층의 이동훈씨와 2층의 황재풍 아저씨 이야기는 이 자리서 할 수 있을 것 같다. 호스피스 일을 통해 알게 된 환자들의 신상명세나 비밀을 병실 밖으로 알리는 것은 금기지만, 이들의 이름을 밝히는 것은 '일종의 총체적인 판단'에 의해서다. 지금 이 판단은 김성자씨가 아니라 내가 하는 것이다.

지난 주만 해도 8인실에 있었다는 이동훈씨는 주말을 지나면서 1인실로 옮겨졌다고 했다. 병세가 급격히 악화된 것이다. 할머니가 소파에 앉아 있었다. 동훈씨의 배는 물이 차올라 불룩했고, 노랗게 된 두 다리가 아이를 낳기라도 하려는 듯 벌어져 있었다. 주말에 서울 친구들이 내려왔을 때만 해도 의식이 있었지만, 내가 본 동훈씨의 모습은 숨이 오가는 목울대만 딸깍딸깍 움직일 뿐이었다.

동훈씨는 엄연한 '공인(公人)'이다. 말하자면 '작가 이동훈'이다. 다음(Daum) 소설게시판에 올린 그의 연재소설은 조회수 15만 회를 기록할 때가 있었다. <본드걸은 죽었다>는 책으로 발간되기도 했다. 부산에서 태어나 자랐고, 대학 졸업 후 서울로 갔다. 객지 생활의 식사는 불규칙할 수밖에 없었고, 무리해서 글을 썼고, 앓고 있었던 B형 간염은 간암이 되었다.


김성자씨가 동훈씨의 손을 잡고 말했다. "동훈씨처럼 글 쓰는 분이 왔어요. 듣고 있어요?" 아주 여리게나마 그는 의식이 있었다. 힘겹게 눈을 떴다가 다시 감는 것이다. 나도 모르게 손을 잡았다. 손은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았다. 미지근한 따뜻함이 느껴져 왔다.

병실을 나왔다. 동훈씨는 작년 부산대학병원에서 말기 암 진단을 받고 퇴원해 집에서 민간치료를 했고, 꽤 호전됐다고 한다. 그는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러다 갑자기 상태가 위중해져 20여일 전 부산의료원에 입원했다. 가족은 호스피스 돌봄을 거절하지 않았다. 김성자씨가 오래 전 아들을 병원에서 잃은 적이 있고, 그 아들이 지금 살아 있다면 꼭 동훈씨 나이였을 것이다. 그게 동훈씨 부모님의 마음을 열었다.


이제 동훈씨는 어떻게 될까? 이대로 의식불명이 되어 숨을 거둘 수도 있다. 그러나 다시 의식을 되찾고, 호전될 수도 있다. 따뜻한 생명의 피는 병자의 몸 속을 돌며 할 수 있는 한 자신의 일을 하고 있었다. 부산의료원에는 임종실이 따로 없어 그를 1인 특실로 옮겨놓은 것은 의료진이 할 수 있는 하나의 대비일 뿐, 시시각각의 예후는 누구도 모른다.

'죽었다'는 과거형이 아닌, '죽을 것이다, 죽는다'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언어가 아니다. 진행형의 임종 경험이 한 번도 없는 나는 더욱 판단을 못 내리겠다. "진행이 (예상보다) 빠르다"라는 김성자씨의 말에서 애써 짐작해볼 뿐이다. 동훈씨 본인은 얼마만큼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일까.

4층의 다른 병실에는 오전에 호스피스 대기실에서 같이 준비하고 각자의 병실로 출발했던 자원봉사자 배영숙씨가 있었다. 그녀는 다른 간병인과 함께 침대에 앉은 환자의 등을 손으로 하염없이 쓸어주고 있었다. 고개를 푹 수그린 환자는 60대 남자였다. 방금까지 누워 있던 환자가 불편함을 호소했고, 그를 일으켜 세워 속을 편케 하려는 두 사람의 노력인 것 같았다.

호스피스 봉사는 '주 1회 3시간'이 기본인데, 3시간 활동 후 대기실에 모여 일지에 환자와 가족의 심리상태와 서로 나눈 이야기를 기록하고, 팀장 중심으로 회의를 진행해 공유한다. 이튿날 다른 봉사자들이 병실로 출발하기 전, 팀장이 중심이 되어 전날의 내용을 인계한다.

배영숙씨가 있는 침상은 말이 거의 없는 무거운 분위기지만, 다른 침상은 유머러스하기까지 했다. 바로 옆 침상에 누운 할머니를 돌보는 아줌마가 "우리 엄마 하고 대화 좀 해봐요. 얼마나 웃기는지 몰라요" 했다. "엄마, 일어나 봐요" 눈을 데꾼하게 뜬 할머니는 치매를 앓고 있었다.

"누가 왔는지 알겠어요?" "싫어!" "할머니, 저 하고 눈도 안 마주치시네요" "몰라!" 그런 할머니가 내 쪽은 뚫어져라 본다. "우리 엄마가 남자는 좋아하시나 보다" "할머니 이 사람 누구예요?" "몰라!" 할머니는 마치 술이 깨지 않은 사람처럼 머리를 몇 번 흔들었다.

또 다른 병실에서도 남편을 간병하고 있는 한 아줌마와 김성자씨는 농을 주고 받았는데, 안쓰러운 웃음도 웃음이었다. 암도 암이지만, 허리디스크로 꼼짝 못하는 환자 역시 실낱같은 농을 하고 있었다. 김성자씨와 환자가 손을 맞잡았는데, 외간 여자 손을 언제 이렇게 맘껏 잡아보냐는 농에 아내가 "난 괜찮아요, 꼭꼭 맘껏 잡으세요" 하고 비슬비슬 웃는 것이다.

박정훈
4, 5층을 돌고, 다시 호스피스 대기실로 가는 길에 동훈씨 병실에 들렀는데, 어머니가 있었다. 소파에는 <이 목 좀 따줘!>라는 책이 놓여 있는데, '박창환 신부의 말기암 환자 호스피스 사목일기'라고 되어 있다. 동훈씨 어머니는 김성자씨에게 주말 동안 있었던 일을 전해주고는 '(권해주신) 책을 읽었다'고 말했다. "(의식을 차린다면) 동훈이도 읽었으면 좋겠는데…" 이미 긴 투병이 있었고, 어떤 의미에서 어머니는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니 호스피스 돌봄을 받아들였을 법하다.

'2층' 병실은 점심 먹고 가보기로 했다. 그러는 새 서울에서 박정훈 사진작가가 왔다. 같이 지하식당에 갔다. 고슬고슬한 쌀밥, 양념이 잘된 갈비찜, 시원한 오징어국이 뷔페식으로 나왔다. 우리는 맛있게 먹었다.

배영숙씨가 말했다. "호스피스 일을 하면서 내가 이렇게 부족한 사람이었나, 뼈저리게 느껴요. 환자 분한테 뭐라 입도 벙긋 못하고, 손 잡아드리고 팔 다리를 말없이 주물러드릴 때가 더 많아요" 아까 병실에서 보았던 상황이 그랬던 것 같다. 그때 그녀는 우리에게도 눈으로 많은 말을 하고 있었다.

부산의료원의 경우, 4층 사회복지실에 호스피스 대기실이 생긴 게 얼마 되지 않는다. 아니 의료원에 '호스피스 서비스'가 처음 들어온 것이 2004년이다. 그때 자기 진료실에 호스피스 방을 내준 이가 윤경일 신경정신과 과장이다. 식당에서 만나 그의 진료실로 가서 차를 마셨다. 새로 짓고 있는 건물이 '노인병동'인데, 사실상 호스피스 병동이 될 거란 기대를 그는 가지고 있었다.

환자가 약물로 '떡이 되도록' '연명치료'에만 의존하는 것이 능사가 아닌 것을 요즘은 모두들 안다고 그가 말했다. "보통 통계학적으로 5%의 예외가 있다지만, 호스피스 활동은 압도적인 95%를 봅니다" 호스피스 돌봄을 받아본 가족의 90% 이상이 만족해 했고, 다른 이에게 호스피스를 권하겠다는 비율이 매우 높다는 설문조사도 있었다.

폐암으로 부친을 떠나보냈던 그의 개인적 경험, 병원을 둘러싼 우리 시대 '죽음의 문화'가 어떤지를 오랫동안 지켜본 의사만이 할 수 있는 아주 강력한 표현이 '떡이 되도록'이었다. 암 말고도 소생 불가능한 온갖 말기병을 앓는 환자들의 남은 삶의 질을 집중적으로 고민하는 고도의 정신적 서비스가 호스피스 활동이다.

"인권위원회가 왜 여기에 관심을 가지죠?" 하고 그가 되물었다. 사람과 제도에 의해 '인권침해'가 발생하는 곳이 아니다. 임박한 죽음을 환자가 어떻게 긍정적으로 수용하느냐의 문제다. 어쩌면 인권이란 개념이 해체되는 곳인지 모른다. 모든 이성적 언어를 던지고 생명이 발가벗는 곳이다.

'2층'은 확실히 분위기가 달랐다. "이 곳 간호사들은 정말 고생을 많이 해요" 김성자씨가 말했다. 환자를 돌보는 간병인이 정말 한 명도 눈에 띄지 않았다. 가족이 침상을 둘러싼 풍경도 없다. 'ㄷ'자 건물 안의 쉼터에는 병에 찌든 환자들이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복도에서 한 환자가 김성자씨를 붙들었다.

그녀는 그에게 아이스크림이라도 먹기를 권했다. 소화기관이 좋지 않기 때문에 아이스크림은 흡수가 부드럽게 되고, 속의 열도 식힐 수 있는 음식이다. 환자는 병실로 그녀를 데려가서 서랍 속의 지갑을 열더니 동전 몇 개를 건넨다. 잘 걷지 못하는 환자를 대신해 그녀가 매점을 다녀왔다.

다른 병실에 들어갔다. 간밤에 잠을 한숨도 못 잤다는 한 환자는 아무리 깨워도 일어날 기척이 없다. 다른 침대에는 설사를 한 횟수와 시간을 쓴 메모가 붙어 있었고, 작년 6월 발행된 <월간조선>이 놓여 있었다. 그 옆자리가 황재풍 아저씨였다. 이런 말은 좀 이상하지만, 간호사와 호스피스 봉사자 사이에 아저씨는 인기가 좋았다.

통증을 잘 참고, 열심히 남의 말을 듣고, "예, 예" 하고 대답을 참 잘하시고, 아저씨의 표정은 슬픔이나 짜증이 전혀 아니고, 그렇다고 기쁨, 즐거움도 아닌… '말 잘 듣는 착한 아이'처럼 보였다. 뱃속에 들어찬 아주 딱딱한 그 무엇은 수술도 할 수 없는 상태라고 한다. 병원에 오기 전, 노숙을 했던 것은 아니고, 이런저런 잡일을 했다고 한다.

"고향이 어디십니까?" 하고 여쭈었다. 김성자씨가 수줍어하는 황재풍 아저씨 대신 대답해주었다. "우리 재풍 씨는 고아원에서 자랐기 때문에…" 병실을 나와서 물어보았다. 결혼은 하신 분인가요? 아니라고 한다.

부산의료원 호스피스 봉사자 중 남성은 딱 한 명이 있었다. 대학 교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분인데, 동훈씨와 많은 얘기를 나누었을 뿐 아니라 지난 주말에 <본드걸은 죽었다>도 구해 읽었다고 한다. 저녁에 그가 왔는데, 같이 병실에 들어갈 수 있는지, 부탁을 드렸다.

그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내가 동훈씨 입장이라고 생각해 본다면, 전혀 원하지 않을 것 같다'는 것이다. 이야기 중 '죽음'이란 단어가 내 입에서 불쑥 나왔는데, 동훈씨 본인이 아직 준비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이동훈씨의 죽음'을 미리 생각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안 된다는 것이다.

때로 환자가 죽음 앞에 직면하도록 하는 것도 호스피스이다. 무섭고 두려운 일이다. 언제 그렇게 하라는 매뉴얼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고, 환자의 심리상태를 예민하게 또 끈질기게 살피다가 인생의 총체적인 지혜를 동원하여 순간순간 결단해야 하는 일이다. 아직 누구도 동훈씨에게 사태의 진상을 알려주지 못하고 있다.

이튿날 부산의료원으로 갔더니, 밤새 동훈씨의 '대세(代洗)'를 치렀다고 한다. 어머니가 예전에 영세를 받았고 세례명도 있어서 신부님을 급히 모셔 천주교 입교 절차는 건너뛰고 사실상 임종세례를 받게 한 것이다. 병실에 들어갔을 때, 동훈씨 아버지가 와 있었다. 그는 '이렇게 관심 가져 주셔서 고맙다'고 말했다. 그리고 주치의 선생님을 만나 자신도 모르게 화를 냈다는 이야기를 했다.

지금 아들은 동공이 풀린 상태라고 한다. 마지막에 동훈이에게 해야 할 말이 있었는데, 대화가 불가능한 상황이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다는 것이다. 의사는 '내가 이미 말하지 않았느냐'고 했지만, 아버지가 들은 의사의 말은 슬쩍 지나가는 듯 매우 불명료한 표현이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커다란 수건으로 눈을 몇 번 닦았다. 천주교인 김성자씨가 '천주교인 이동훈씨'의 손을 잡고 기도를 올렸다. 동훈씨의 목울대는 어제처럼 계속 딸깍거리고 있었다.

2층의 황재풍 아저씨를 만나러 갔다. 김성자씨는 3년 전부터 아저씨를 알고 있는데, 한 번 퇴원했던 아저씨가 다시 몸이 많이 아파 병원에 와야 했는데도 '기초생활수급자는 얼마의 기간 동안 두 번 입원하면 생활보조금이 깎인다'는 풍문을 듣고 한 달 반이나 집에서 고통을 참고 버텼다며 아저씨를 딱해 했다.

평생 가난하게 살아온 삶이 진하게 느껴진다. 늘 낮은 자리에서 지내온 아저씨의 몸에 배인 겸허함이 사랑스러웠다. 아저씨와 김성자씨가 함께 웃고 있는 모습을 박정훈씨가 찍었다. 사진을 액자로 만들어 보내드릴 테니 침대 옆 사물함 위에 올려놓으시라고 했다. "나하고 사진까지 찍었으니 재풍씨는 진짜 오래 살아야 됩니다" 호스피스 일을 하는 사람답지 않은 김성자씨의 말이지만, 진심이 가득 담겨 있었다.

보건복지부의 자료에 의하면, 의사 2명의 최종적인 진단에 따라 기대수명이 6개월 이내의 환자일 때, 호스피스 대상이 된다고 한다. 죽음을 직시하고, 죽음을 이해하고, 수용하고, 지난 삶을 정리하고, 남은 시간을 열심히 살고 잘 마무리하도록 돕는 것이 호스피스 일이다. 말이 그럴 뿐, 현실은 많이 다르다.

최근 <한겨레21>에 '호스피스' 관련 보도가 실렸는데, 호스피스 병동이 따로 지어져 있고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호스피스 전문의가 있는 성바오로병원 관계자의 말을 재인용하면, "호스피스 취지를 살리려면 통상 3~6개월 정도 남은 시점부터 돌봄이 필요하지만, 우리 병원만 해도 환자들이 평균 1주일 정도를 남겨놓고 온다"는 것이다. 끝까지 죽음을 인정하지 않고 기적과 같은 소생에만 매달리는 경우가 훨씬 많은 것이다.

환자 본인이 스스로 죽음을 수용하는 태도의 변화를 보이지 않는다면, 몸과 마음의 국지적인 불편을 호소할 때마다 그 부분을 '편하게 해주는' 수동적인 노력이 대체적인 현실의 호스피스 활동인 것 같다. 탁월한 몇 명의 호스피스 봉사자가 어찌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죽음이란 피할 수 없는 인생의 사건을 보다 겸허하게, 또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사회문화의 문제일 것이다.

오후 2시쯤이었다. 동훈씨가 숨을 거두었다는 소식이 전해져왔다. 내 마음 속의 한 곳이 덜컹 했다. '다음 순간이 어찌될지 우리는 진정 알지 못한다'는, 우리 인간의 본능과 같은 희망 하나가 깨끗이 부러진 것이다. 병실 문이 약간 열려 있었다. "절대 안 된다…" 하고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다. 곧 안에서 문이 닫히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김성자씨가 내게 말해주었다.

"동훈씨한테는 진통제가 들어가지 않았거든요. 마지막에 몸의 고통은 없었던 편이에요. 다른 환자에 비해 작은 축복이랄 수 있어요. 나중에 어머니께 전화를 드려야지요. 누군가 잊지 않고 있다는 것이 위로가 됩니다. 저와의 인연이 여기서 끝은 아닐 거예요."

잊지 않음의 위로, 작가 이동훈과 황재풍 아저씨의 이름을 굳이 밝혀 적은 것은 그 믿음 때문이다.

덧붙이는 글 | 이 원고는 국가인권위원회에서 발간하는 <인권>잡지 5, 6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글쓴이 김곰치님은 르포 산문집인 「발바닥, 내발바닥」을 냈습니다. <인권>은 비매품으로 무료로 배포하고 있으며, 구독신청은 국가인권위 홈페이지, 이메일로 받고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 원고는 국가인권위원회에서 발간하는 <인권>잡지 5, 6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글쓴이 김곰치님은 르포 산문집인 「발바닥, 내발바닥」을 냈습니다. <인권>은 비매품으로 무료로 배포하고 있으며, 구독신청은 국가인권위 홈페이지, 이메일로 받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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