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힘들었을 때 선생님 얼굴을 봤어요"

34명의 '사제동행' 지리산 종주에 동행하고

등록 2007.07.28 09:29수정 2007.07.28 11:48
0
원고료로 응원
a

구름에 싸인 지리산 천왕봉 오르는 길 ⓒ 서종규

무더운 여름철 지리산 종주, 늘 꿈을 꾸지만 종주에 들어가면 인간의 한계를 느낍니다. 한계를 느끼는 극한 상황에서도 앞사람의 발꿈치만 보고 걸어가야 합니다. 걷다 보면 이렇게 힘든 지리산 종주에 왜 참가했을까 후회를 하고 또 후회를 합니다. 아니 다시는 지리산 종주에 참가하지 않겠다고 다짐도 합니다.

중산리에서 지리산 천왕봉을 향하여 오르는 수직의 길에서 기진맥진한 승기(중1)는 발걸음을 떼지 못하고 있습니다. 승기뿐만 아니라 중3 나래, 유진이도 자꾸 주저앉습니다. 중1 형석이와 인성이는 친구들은 시원한 방에 않아서 게임에 열중하고 있을 것인데 무엇 때문에 이렇게 힘든 산을 오르는지 모르겠다고 투덜댑니다.

다행히 지리산 천왕봉을 구름이 감싸고 있어서 천왕봉을 눈앞에 둔 오르막에서도 주저앉지 않고 위로 한발 한발을 뗍니다. 정신은 흐릿하여지고 발걸음이 후들거려서 안갯속에 하얗게 핀 지리터리꽃에게 인사 나눌 정분도 없습니다.

남들은 중산리에서 출발하면 세 시간이면 등정한다는 천왕봉이었지만 우리는 6시간 만에 '한국인의 기상 여기에서 발원하다'라는 지리산 천왕봉 표지석을 껴안을 수 있었답니다. 몇 번이고 포기하려고 속으로 눈물까지 흘렸던 지리산 천왕봉 정상에 말입니다.

a

구름에 싸인 천왕봉에 오른 34명의 사제동행 지리산 종주팀의 모습 ⓒ 서종규

7월 25일부터 3일간, 전국교직원노동조합 광주지부 국공립서부지회(지회장 김애영)에서 주관하는 사제동행 지리산 종주 등반에 중학생 24명과 10명의 교사가 참여하였습니다. 각급 학교에서 자원을 받은 교사 1명에 중학생 3명이 한 짝이 되어서 사제동행 지리산 종주 등반에 나선 것입니다. 23명 중에서 여학생이 3명이었고, 1학년 학생이 9명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올해부터는 국립공원 대피소 이용 규정이 바뀌어서 대피소를 예약하는 데 힘이 들었답니다. 지도 교사가 국립공원 홈페이지에 가입하여 15일 전에 예약을 하고 다음날까지 이용금액을 입금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지리산의 뱀사골 대피소를 폐쇄시키는 바람에 연하천 대피소를 예약해야 하는데, 대부분의 지리산 대피소는 예약 시작 몇 분만에 다 차버리는 바람에 여간 애를 먹은 것이 아니었답니다.

겨우 첫날은 세석 대피소를, 둘째 날은 노고단 대피소를 예약하여 지리산 종주 등반이 가능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석 대피소를 예약하다 보니 첫날 천왕봉에 올라야 하게 된 것입니다. 사실 등산을 많이 하지 않은 청소년들이 첫날부터 천왕봉(1915m)에 오른다는 것은 보통 힘든 것이 아닙니다.

지도교사들이 그렇게 주의를 주었건만 학생들은 소풍가는 것처럼 음식물이며 옷가지들로 가득한 가방을 메고 나타났습니다. 심지어 조그마한 가방만 달랑 들거나, 등산용이 아닌 불편한 가방을 메거나, 등산화 대신 운동화를 신고 나타난 아이들을 본 선생님들의 얼굴엔 걱정이 가득하였습니다.

그래서 중산리 주차장 출발부터 학생들의 입에서 불평들이 쏟아져 나온 것입니다. 차 안에서 단단하게 주의를 주고, 정신 교육을 시켰지만 지리산 종주에 대하여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은 학생들이 몇 걸음 걷지 않아서 쏟아지는 땀에 무거운 배낭이 불평의 대상이었던 것입니다.

a

지리산에 자생하고 있는 지리터리풀꽃 모습 ⓒ 서종규

중산리 주차장에서 오전 10시에 출발하여 오후 1시에 로타리 산장에 도착해서 점심을 먹었습니다. 그렇게 힘들어하던 학생들의 주름이 펴지면서 왁자지껄 요란입니다. 꿀 같은 점심을 먹고 다시 출발하는 얼굴들이 찡그려지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구요.

천왕봉을 오르는 길 중 어렵지 않은 길이 어디 있겠습니까만 특히 중산리 코스는 짧은 거리에 비하여 급경사를 이루고 있어서 대단히 힘이 듭니다. 그래서 초행길인 경우는 중산리를 권하지 않는 것이 보통입니다.

끝없이 오르는 길에 허덕거리는 학생들이 모습이 안쓰럽습니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도 없는 지리산 종주여서 지도교사 자신들은 힘든 줄도 모릅니다. 학생들을 챙기느라고 잊은 것이겠지요. 때로는 악을 써가며, 때로는 달래가며, 손에 들고 있는 짐들을 빼앗아 대신 짊어집니다.

a

지리산 천왕봉 밑 고사목 지대에 바람에 먼저 눕는 풀 ⓒ 서종규

오후 4시, 천왕봉에 도착하였을 땐 구름이 가득했습니다. 순간 난리가 났습니다. 어떤 학생들은 천왕봉 표지석을 보듬고 놓아주지를 않습니다. 휴대폰을 켜서 통화를 하는 학생, 괴성을 지르는 학생까지. 그들의 함성, 그들의 표정은 인간 한계점에서 자신을 극복하고 정상에 오른 희열 그대로였습니다.

천왕봉엔 바람이 거세게 불었습니다. 그렇게 많은 땀을 쏟던 학생들이 춥다고 야단입니다. 지도교사가 아직도 올라오고 있는 학생들이 다 도착하여야만 단체사진이라도 찍고 내려가겠다고 말하자 밑을 향하여 악을 쓰고 빨리 올라오라고 소리칩니다. 그래도 마지막으로 올라온 승기에게 많은 박수를 보냈습니다.

a

첫날 천왕봉을 지나 세석 대피소에서 맞은 저녁 식사 준비 ⓒ 서종규

장터목 대피소를 지나 세석 대피소까지 구름이 가득했습니다. 구름 속에서 저 멀리 뻗은 지리산 줄기들을 볼 수는 없었지만 하얗게 가득 피어있는 지리터리풀꽃이며 범꼬리꽃이 하늘거립니다. 고사목 지대를 지날 때는 지나가는 바람에 풀들이 먼저 눕습니다. 그 눕는 풀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고사목들이 빨리 가라고 손짓을 합니다.

오후 7시에 세석 대피소에 도착하여 기진맥진 쓰러집니다. 약 13km의 길이었지만 천왕봉을 오른 여독이 가득했습니다. 교사들과 한 조가 되어 저녁을 지어야 하는데, 서툰 솜씨를 가르치는 선생님들의 목소리엔 힘이 들어 있었습니다. 어떤 학생은 양파를 씻어 오랬더니 껍질째 씻어 온 학생도 있었답니다.

a

세석 대피소 옆 영신봉에서 바라보이는 지리산 모습 ⓒ 서종규

둘째 날, 날씨가 너무 맑습니다. 아침 7시 세석 대피소에서 출발하여 영신봉에 올라 바라본 노고단까지 20여km를 걸어가야 합니다. 사실 노고단의 모습은 보이지도 않았습니다. 반야봉의 모습이 우뚝 앞을 가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득하게 멀리 보이는 저 지리산의 능선을 바라만 보아도 질리기 쉽습니다.

길에 가득 피어 있는 야생화며 발길을 가볍게 해 주려는 휘파람새 울음을 들으며 출발한 일행의 발걸음은 얼마 가지 못하여 느려졌습니다. 가다가 쉬고, 가다가 쉬고, 격려하고 챙기는 선생님들의 모습만 더욱 분주합니다.

벽소령까지 3시간, 벽소령에서 또 연하천 대피소까지 3시간, 오후 1시에 연하천에 도착하여 점심을 먹었습니다. 모두 지쳐 있었습니다. 가장 늦게 도착한 나래가 부모님과 통화를 하다가 울먹입니다. 밥을 먹는 학생들의 마음이 같이 가라앉았습니다. 오후 내내 걸어야 하는 발걸음을 더욱 무겁게 하는 것 같아서 담임인 고익종 선생님이 애써 위로를 합니다.

a

지리산 종주, 그 한없는 꿈과 인간 한계의 고통 ⓒ 서종규

오후 2시, 연하천 대피소에서 출발하여 토끼봉, 화개재, 240m에 해당하는 계단을 올라 삼도봉, 노루목, 임걸령, 노고단까지 모두 같이 출발하고, 같이 쉬고, 또 같이 출발하여 걸었습니다. 출발하던 당시 차 안에서 '지리산 종주에는 언제 도착하는가 물어보지 마라. 해가 지면 도착할 것이다'던 지도교사의 주의를 듣지 않고 수없이 언제 도착하느냐고 물어보곤 합니다.

오후 7시, 세석 대피소를 출발하여 꼬박 12시간을 걸어서 노고단재에 도착했습니다. 모두들 배낭을 던져 놓고 쓰러졌습니다. 일어날 줄을 모릅니다. 발에 불이 난 것처럼 화끈거린다고 뿌리는 파스를 찾는 학생도 있습니다. 양말을 벗어들고 맨발로 껑충대는 학생도 있습니다. 다행히 여름이어서 해는 아직 넘어가지 않았지만 멀리 보이는 천왕봉이며, 천왕봉에서 뻗어 온 거대한 지리산의 줄기들이 그대로 가슴까지 파고듭니다.

노고단 대피소에서 또 하룻밤을 잤습니다. 모두 일찍 곯아떨어졌습니다. 2박 3일간의 일정이 대피소 예약 관계로 1박 2일 일정으로 변해 더 힘들었던 것입니다. 어른들도 1박 2일 지리산 종주는 힘든 길인데, 가장 무더운 여름철, 구름 한 점 없었던 세석 대피소에서 노고단까지 20km의 길, 모두 그들에겐 벅찬 여정이었습니다.

a

여름 지리산에 가장 많이 핀다는 원추리꽃 ⓒ 서종규

천왕봉 오를 때 가장 힘들어하며 맨 뒤꽁무니에 도착했던 김승기(유덕중1)군은 힘든 것보다 재미있었다고 의젓하게 말을 합니다. 다행히 둘째 날은 선생님들이 승기군을 맨 앞에 세워서 훨씬 쉬웠다고 대견해합니다.

"재밌어요. 정말 재밌어요. 재밌기는 했는데, 정말 힘들었어요. 중간에 힘들 때는 그냥 쓰러져 헬리콥터라도 왔으면 했어요. 다시는 오기 싫었어요. 그래서 가장 힘들었을 때 선생님 얼굴을 보았어요. 혼자 가는 것보다 선생님과 친구들과 같이 와서 종주가 가능했어요."

그래도 종주 내내 잘 걸었던 김시경(중앙중 1)군은 의젓한 말을 합니다. 아주 유익했다는 것입니다. 선생님과 이야기를 하면서 지리산에 대해, 많은 자연에 대하여 배웠다는 것입니다.

"같이 걸어가면서 선생님과 나누었던 대화들이 너무 좋았어요. 몰랐던 것을 많이 알았어요. 모르는 꽃 이름을 알고, 모르던 새 울음소리를 알고, 벌레 소리도 들었어요. 그런 소리들을 들으며, 꽃을 보며, 구름을 보니 지리산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어요. 멀리 뻗은 길을 뒤돌아 보니 어떻게 내가 저 길을 걸어왔을까 대견하기까지 했어요."

a

학생 중 한 명이 손이 다쳐 치료를 하고 있는 김애영 선생님 ⓒ 서종규

유덕중 김주형 교사는 유익한 시간이었다고 합니다. 자신이 직접 지리산을 종주해본 경험이 그리 많지 않았는데 그것이 좋았고, 제자들과 함께하면서 고락을 같이 나누었던 기억이 소중하답니다.

"학생들과 같이 지리산 종주를 하니 참 좋습니다. 그동안 교실에서만 보았던 그들의 모습이 아니라 또 다른 모습을 볼 수 있었거든요. 세 명의 아이였지만 개인적인 행동을 하는 학생도 있고, 또 협동하는 행동을 하는 학생도 있었어요. 어려움을 참는 학생도 있고, 불평해 버리는 학생도 있고, 내가 교실에서는 발견하지 못한 모습들이었지요. 같이 동행한 다른 학생들과 선생님을 대하는 모습까지 모두 새롭게 발견했거든요."

a

세석 대피소에서 꼬박 12시간을 걸어서 도착한 노고단재 ⓒ 서종규

#지리산 종주 #천왕봉 #노고단 #사제동행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인간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다름을 서로 공유하는 것입니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대통령 온다고 수억 쏟아붓고 다시 뜯어낸 바닥, 이게 관행?
  2. 2 제발 하지 마시라...1년 반 만에 1억을 날렸다
  3. 3 '한국판 워터게이트'... 윤 대통령 결단 못하면 끝이다
  4. 4 "쓰러져도 괜찮으니..." 얼차려 도중 군인이 죽는 진짜 이유
  5. 5 이러다 나라 거덜나는데... 윤 대통령, 11월 대비 안 하나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