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마음 속 상처 말 없이 다스리는 나무

전남 장성 백암산 약사암

등록 2007.08.03 15:26수정 2007.08.04 1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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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사암으로 가는 길. 몇 백년 묵은 비자나무 숲길이 한 동안 이어진다. ⓒ 안병기

백양사를 나와 약사암 가는 길로 방향을 잡는다. 선뜻 앞으로 향하는 발길과 달리 내 머릿속은 잠시 멈칫거린다. 옛 국립공원 관리 사무소인 '시인의 마을'에서 약사암에서 백학봉을 거쳐 상왕봉에 오른 다음 다시 백양사로 하산하는 백암산 일주 코스에 걸리는 시간을 물었더니 족히 6시간은 걸릴 것이라고 한다. 이곳에서 시간을 너무 지체하게 되면 내 여행 계획이 터무니없이 길어지지 않을까 싶기 때문이다.

그러나 깊고 그윽한 비자나무 숲길은 나를 오래 망설이도록 버려두지 않는다. 깊고 그윽한 비자나무 숲을 향하여 발길을 내딛는다. 비자나무는 주목과에 속하는 회갈색 나무껍질을 가진 나무다. 줄기는 사방으로 퍼지며 잎은 딱딱하고 짙은 녹색이며 겨울에도 푸른 잎을 단 상록 침엽교목이다. 백양사는 천연기념물 제153호 비자나무분포 북방 한계지역으로 알려졌다.

타원형으로 생긴 비자나무 열매는 예로부터 구충제로 쓰였다. 우리 어렸을 적엔 학교에서 일년에 두 차례씩 산토닌이라는 구충제를 나눠주곤 했는데 1970년대만 해도 백양사 스님들은 가을에 비자 열매를 거두어 사람들에게 구충제로 쓰라고 나눠 주었다고 한다.

얼핏 봐서는 비자나무는 잿빛이 나는 암갈색 나무껍질을 가진 전나무와 쉽게 구별되지 않는다. 그래서 비자나무 숲 사이로 난 길을 걸어가노라니 마치 부안 내소사나 오대산 월정사 전나무 숲길을 걷는 듯한 느낌이 든다.

그러나 굳이 다른 점을 말한다면 부안 내소사나 오대산 월정사 전나무 숲길이 나무를 동무 삼아 한 없이 걷고 싶은 길이라면 약사암으로 가는 비자나무 숲은 주저앉아 마냥 쉬고 싶은 길이라는 점이다. 그만큼 숲이 주는 맛이 깊고 그윽하다는 뜻이다.

나무들은 모두 약사여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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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막히도록 가파른 오르막길. ⓒ 안병기

한참 걷다 보니 나라에 전염병이나 재앙이 발생하였을 때 제사를 올렸다는 국기단 터가 나온다. 그냥 갈까 하다가 잠시 둘러보고 나서 다시 길을 간다.

나는 지금 나는 지금 약사암으로 가는 길이다. 약사암이라는 이름으로 봐서 그곳에는 아마도 약사여래가 주불로 모셔져 있을 것이다. 손에 약그릇을 든 약사여래는 모든 중생의 질병을 구제해준다는 의미를 지닌 부처이다.

따지고 보면 약사전에 좌정하고 있는 약사여래 뿐 아니라 이 땅에 있는 모든 나무들은 한 그루 한 그루가 실질적인 약사여래인지 모른다. 나무들은 사람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산소를 내뿜을 뿐 아니라 피톤치드(Phytoncide)라는 자연살균제를 발산함으로써 스트레스로 찌든 사람의 몸을 정화하기도 한다.

국기단 터를 지나온 탓일까. '어쩌면 국가의 존재와 역할 역시 저 나무들과 같아야 하는 게 아닐까'라는 데 생각이 미친다. 저 나무들처럼 소리 소문 없이 민중의 마음을 치유해 주는 기능이 국가의 존재 이유가 아닐는지. 그러나 이제까지 국가는 우리에게 억압의 장치로만 기능 했을 뿐이었지 않는가 말이다. 국가가 기층민중의 진정한 약사여래의 역할을 담당하는 그날은 언제쯤에나 올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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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사암 요사. ⓒ 안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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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사암 요사 계단에서의 조망. ⓒ 안병기

십 여분쯤 더 걸었을까. 이번엔 두 개의 다리가 나란히 놓인 계곡이 나온다. 옆에 놓인 다리에서 스님 한 분이 한가로이 걸어온다. 스님이 걷는 게 옛 다리고 내가 걷는 다리가 새로 놓은 다리인 모양이다.

다리를 건너 조금 더 올라가자 이번에는 갈림길이 나그네에게 선택을 요구한다. 직진하면 선원인 운문암으로 가는 길이요, 왼쪽 길을 따라가면 약사암을 거쳐 백학봉으로 가는 길이다. 약사암으로 오르는 길은 몹시 가파르다. 적어도 60~70˚의 경사는 되는 것 같다. 이 급경사가 내게 설하는 의미는 무엇일까.

오르막길은 상승감을 안겨준다. 높은 곳으로 올라감으로써 세상을 좀 더 멀리 보게 되고 오른 높이만큼 내 존재의 영역이 덩달아 확대되는 셈이다. 등산은 땅 위에 바짝 붙어사는 하찮은 동물인 인간이 가장 확실한 상승감을 누릴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인지도 모른다.

"에헤라 가다 못 가면 데헤야 쉬었다 가세. 호박같이 둥근 세상 둥글둥글 삽시다." 느닷없이 젊은 시절의 노랫가락 몇 소절이 떠오른다. 쉬엄쉬엄 오르다 보니 어느덧 약사암이다. 약사암 요사 옆 계단에 비켜서서 풍경을 조망한다. 앙증맞고 고운 애기단풍 잎들이 눈 아래 풍경을 하나의 액자로 만들어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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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사암 법당. ⓒ 안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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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사암에서 내려다 본 풍경. 백양사가 한눈에 들어온다. ⓒ 안병기

약사암은 백양사 뒤 백학봉 중턱에 있다. 백양사의 전경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곳에 제비집처럼 둥지를 틀고 있다. 약사암은 예로부터 이름 높은 스님들을 많이 배출한 곳으로 이름난 곳이다.

특히 환양선사가 이곳에서 설법을 베풀 때 흰 양이 그 설법을 듣고 사람으로 환생하여 극락으로 가게 되었다는 전설이 탄생한 곳이기도 하며 그 때문에 절 이름이 정토사에서 백양사로 바뀌었다고 전한다.

저 아래 백양사가 한눈에 들어온다. 일목요연이란 이런 걸 두고 말하는 것이리라. 이곳에서 바라보는 백양사는 한 척의 반야용선이다. 반야용선이란 사바세계에서 극락정토로 건너갈 때 타고 가는 상상의 배를 말한다. 마치 백암산 전체가 백양사라는 한 척의 반야용선을 타고 극락정토로 흘러가고 있는 느낌이다. 백양사에 와서 이 약사암에 오르지 않은 채 가버린 사람은 식사를 끝내고 나서 구수한 숭늉 맛을 보지 않은 채 그냥 가버린 사람이나 다름없으리라.

위태로운 장독대는 수행의 경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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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를 굽어보며 명상에 잠겨 있는 스님. ⓒ 안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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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사암 장독대. ⓒ 안병기

전망대에선 스님 한 분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 아래를 굽어보고 있다. 다가가서 조심스럽게 말을 건넨다.

"백양사에서 공부하시는 학인승려신가요?"
"예."
"전망이 참 탁월한 곳이네요. 백양사가 음의 기운이 강한 곳이라 오래 머물면 몸이 시름시름 아프다고들 하던데 스님은 어떠십니까?"
"이곳에서 공부하는 스님들 역시 그런 말을 하곤 하지요. 그래서 저도 몸이 늘어진다 싶으면 운동 삼아 이곳에 올라오곤 합니다."

어쩌면 백양사가 수행처로 이름난 까닭은 백학봉이 내뿜는 음의 기운이 스님들이 지닌 양의 기운을 지그시 누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전망대 아래 놓인 장독대가 유난히 정갈하다. 어느 스님의 손길이 먹고 사는 세간살이의 남루함을 저렇듯 한 단계 더 높은 성스러움으로 끌어올렸을까. 내려다보니 장독대 끝은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다.

비유하자면 장독대란 케케묵은 일상이다. 절벽은 팽팽한 긴장을 불러일으키는 절체절명의 장소이다. 그러므로 장독대를 저런 위태로운 절벽 끝에 둔 것은 절묘한 발상이 아닌가 싶다. 군덕내 날 만큼 케케묵은 간장 같은 일상에 대한 경계(警戒)로는 저 위치만 한 곳을 어디서 찾을 수 있겠는가.

한없이 머물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억누른 채 스님과 인사를 나누고 약사암을 떠나 영천굴로 향한다. 올가을엔 여기 와서 약사암 애기단풍이 자신을 얼마나 아름답게 단련시켰는지 들여다보리라.

덧붙이는 글 | 7월 24일 다녀왔습니다.

덧붙이는 글 7월 24일 다녀왔습니다.
#백암산 #약사암 #비자나무 #백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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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곳을 지향하는 눈(眼)과 한사코 사물을 분석하려는 머리, 나는 이 2개의 바퀴를 타고 60년 넘게 세상을 여행하고 있다. 나는 실용주의자들을 미워하지만 그렇게 되고 싶은 게 내 미래의 꿈이기도 하다. 부패 직전의 모순덩어리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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