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산 일만이천봉을 이루는 산세는 기암괴석의 매혹적인 아름다움으로 눈길을 끈다.안경숙
떠난다는 것, 좋지 아니한가. 지긋지긋한 일상을 뒤로 하고 떠난다는 것은 상황여부를 떠나 어찌됐든 기분 들뜨고 설레는 일일 거라 믿었다간 그러나 낭패를 볼 수 있다. 지난 7월30일 구포역에서 금강산 행 19시25분발 무궁화호에 몸을 실은 나는 밀려드는 후회와 짜증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야 했다.
무박삼일, 소요날짜를 최대한 줄이면서 저렴한 경비로 금강산 유람을 할 수 있다는 광고에 혹한 사람들은 50, 60대가 대부분이었다. 그들 연령층에 무슨 편견을 가져서가 아니라(나 역시 40대, 편견 가질 처지가 아니다) 타자마자 작정한 듯 왁자지껄한 태도는 몇 시간을 싫은 내색 않고 가기에는 고문에 가까운 횡포였다.
부산을 출발하면서부터 한쪽에선 화투판을 펼치고 또 다른 쪽에선 술판이 벌어지는가 싶더니 아니나 다를까 새벽까지 고성방가가 이어지고 잠이라도 들라치면 통 큰 웃음소리가 기차간을 흔들었다.
난장판 그 자체인 이런 여행을, 짧은 휴가날짜를 쪼개가면서 왜 나는 기어이 떠나려 했던 것인지, 떠나갔던 그곳이 불과 며칠 새 비일상적으로 느껴질 만큼 멀어진 지금 한번쯤은 자문자답 해봄직도 하겠다.
우선은 호기심이랄까, 미디어를 통해 접한 북녘 땅을 내 눈으로 직접 보고 싶었다는 게 닷새의 휴가 가운데 사흘을 뚝 떼어낸 첫 번째 이유였다. 또한 수차례 이산가족들의 재회현장을 지켜보면서 코끝이 시큰해졌던 경험만으로 피의 끌림을 내세우긴 염치없지만 통일 염원의 정당성 같은 걸 북녘 땅에서 확인하고 싶은 마음도 없잖아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분명한 이유는 현대 아산에서 관광용으로 개발한 루트를 시멘트로 아주 도배를 해놓았더라는 소문에 더 미루다간 '원래의 금강산 유람은 물 건너가겠구나' 마음이 조급해진 탓이었다.
결국 이런저런 이유로 떠난 이번 여행에서 그렇다면 내가 만난 건 무엇이었는지 말 나온 김에 답해 버리는 게 좋겠다. 오고가는 데 걸린 시간을 빼면 실로 딸랑 만 하루에 불과한 북한여행에서 내가 만난 건 결국 나라는 인간의 정체성, 밑천 드러난 나 자신의 모습이었다.
생활 속의 진보를 표방하며 누구에게나 마음을 여는 척 폼을 잡지만 속내 들여다보면 단단한 경계의 끈을 풀지 않는 소심하고 겁 많은 나 자신이었다. 그리고 또한 내가 만난 건 근거 없는 미움과 경멸, 값싼 동정과 같잖은 우월감으로 무장한 중장년층의 자화상들이었고, 자본의 자장 안에서 하루하루 달라져 갈 것이 뻔히 내다보이는 남과 북 청년들의 미래상이었다.
여행사 패키지 상품명은 '그리운 금강산'이지만 강릉에서 갈아탄 버스로 세 시간가량 달려 북녘 땅에 내리면 그리운 금강산을 만나기 전 일단 북한 요원들을 먼저 만나야 한다.
검역을 담당하던 40세가량의 남자요원은 앞에 선 내 얼굴과 신분증 사진을 날카로운 눈길로 견줘보고는 뒤에 서있는 사람 쪽으로 고개를 홱 돌린다. 남북 CIQ 수속을 거치는 동안 '버스 이동 중에는 사진을 찍지 말라', '안내원들과 정치적 이야기를 나누지 말라' 등 간단명료하고 엄중한 경고사항들을 반복해서 들으니 북한 땅에 와있다는 게 실감됐다.
이번 여행에서 만난 북측 사람 가운데 몇몇의 인상이 또렷한 게 오래 기억에 남을 듯한 데 그중 한 명이 세관원인지 군인인지 알 수 없지만 신분증을 검사했던 불우한 예술가처럼 생긴 그 요원이고 또 한명은 구룡연 오르는 길에 만난 여자 안내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