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자는 피해갈 수 없는 한판승부

[태종 이방원 137]수구세력과 신진세력의 힘겨루기

등록 2007.08.07 12:27수정 2007.08.07 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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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이 야심차게 추진했던 노비변정도감이 혁파되었다. 시끄럽던 세상이 조용해지기를 기대했지만 오히려 더 소란스러워졌다. 관료는 관료들대로 백성은 백성들대로 불평불만이 터져 나왔다. 사명감에 불타던 관료들의 사기는 땅에 떨어졌다. 노비문제와 사적으로 연결된 관료들은 이해타산에 불만을 터뜨렸고 그렇지 않는 관료들은 정의가 죽어 가는데 전율했다.

혈기왕성한 신진 관료들 사이에서 수구세력을 척결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사헌부의 젊은 관리들이 총대를 멨다. 수구세력의 대표 인물 하륜을 탄핵하고 나선 것이다. 드디어 올 것이 왔다. 신진세력과 수구세력의 힘겨루기다. 태종 권력의 옆구리가 터진 것이다. 사헌집의(司憲執義) 이당이 하륜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다.

“재상은 임금의 덕을 도와 정치를 이룩하는 수상(首相)이라는 천직(天職)임에도 불구하고 하륜은 자기 첩자의 양부(養父) 변겸의 노비송사에 개입하여 전하로 하여금 형조와 대간(臺諫)이 고쳐서 바로 잡으라 명하시기에 이르렀습니다. 이것은 자기 한 몸에 흠이 될 뿐만 아니라 장차 전하의 다스림에 누가 될 것이오니 그 직을 파하여 외방에 안치하여 대신의 경계를 삼으소서.”-<태종실록>

패자는 피해갈 수 없는 한판승부

영의정은 임금이 임명하는 최고의 자리다. 모든 대소신료들의 우두머리다. 일인지하 만인지상을 사헌부에서 탄핵하고 나선 것이다. 물론 사헌부나 사간원에서 영의정을 탄핵할 수 있다. 그럴 능력과 권한도 있다. 하지만 상대가 하륜이다. 노회한 하륜과 정의를 앞세우는 신진 관료가 맞붙은 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패자는 파멸을 피해갈 수 없는 한판 승부다.

상소문을 받아든 태종이 장무지평(掌務持平) 정연을 불렀다.

“영의정의 일은 비밀로 하여 알기가 어려운데 너희들이 어떻게 알았느냐?”
“원의(圓議)의 일이므로 신은 감히 말할 수 없습니다.”

임금의 질문에 답변을 거부했다. 상소는 개인의 뜻이 아니라 회의에서 도출된 전체 의견이라는 뜻이다. 태종이 노기 띤 얼굴로 다시 물었다.

“누구에게서 들은 말이냐고 묻지 않느냐?”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정연의 태도는 완강했다. 노기를 풀고 태종이 다시 말했다.

“내가 죄를 가하고자 묻는 것이 아니다. 어서 말하라.”
“그래도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정연의 태도는 변함이 없었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의견 도출과정을 말 할 수 없다고 버텼다. 하륜을 탄핵하는 상소문은 한 두 사람의 귓속말이 아니라 사헌부의 결집된 의견이며 그 과정을 고해바칠 수 없다는 것이다. 임금이 주춤했다. 임금도 간원이 입을 열지 않으니 대책이 없었다.

간원들의 생리를 잘 알고 있다. 강직함을 최우선으로 하는 위인들이다. 그러한 인품에 무한한 신뢰를 보내고 때론 갈등을 겪는 것이 임금과 간원이다. 정연을 내보낸 태종은 편전으로 육조판서와 완산부원군(完山府院君) 이천우를 불러들였다.

“영의정의 일을 처결할 때 이를 안 사람은 지신사(知申事) 이관, 대언(代言) 유사눌, 조말생 세 사람뿐이다. 내가 비밀히 지시한 일을 외방에 누설하여 대원(臺員)으로 하여금 상소하기에 이르도록 한 것은 어떻게 된 것인가? 또한 대원이 원의(圓議)라 하여 숨기고 말하지 않는데 이것이 군신의 예(禮)란 말인가? 영의정이 비록 변겸에게 사정(私情)을 두었다 하더라도 그 마음이 어찌 나를 속이려 했겠는가? 궁중의 비밀을 외방에 누설한 것은 용서할 수 없다.”-<태종실록>

태풍을 예고하는 임금님의 분노

임금의 대노는 결연했다. 사건의 본질보다도 비밀이 누설된 배경에 분노의 무게를 두고 있었다. 노성(怒聲)에서 태풍을 감지한 육조판서와 이천우가 편전을 물러나와 집의(執義) 이당과 지평(持平) 안수산 그리고 정연을 불렀다. 들은 곳을 물으니 이들은 입을 굳게 다물었다. 사건을 원만하게 해결하려던 원로대신들의 노력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임금이 상소문을 올린 이당을 의금부에 내려서 국문(鞫問)하라고 명했다. 태종은 이당의 기개가 가상했으나 유쾌하지 않았다. 비밀한 궁중의 이야기가 누설되어 간원의 간쟁에 등장한 것이 불쾌했고 이당의 답변 거부에 모멸감을 느꼈다. 국문을 이기지 못한 이당이 결국 입을 열었다.

“원의(圓議)에서 말을 꺼낸 자는 형조판서 성발도였습니다.”
즉시 성발도를 하옥하고 국문하라 명했다.

“누설한 자는 이관입니다.”

성발도 역시 국문을 이겨내지 못하고 무너지고 말았다. 사건의 단초를 제공한 사람은 지신사 이관으로 밝혀졌다. 태종은 심한 배신감을 느꼈다. 자신의 가장 지근거리에 있는 사람이 비밀을 누설하여 평지풍파를 일으킨 것이 괘씸했다.

성발도는 공신의 아들이라 죄주지 않고 파직만 시킨 태종은 이관도 파직에서 멈췄다. 이관은 지신사로서 오랫동안 곁에 있었고 노모가 있는데 직첩(職牒)을 거두면 과전(科田)을 거둘 것이므로 노모에게 불효해서는 안 된다는 배려였다. 이당이 문제였다. 임금의 물음에 답변을 거부한 이당은 괘씸죄를 걸어 외방으로 내치고 싶었지만 걸리는 게 있었다. 거간이다.

거간(拒諫)이란 임금이 대간(臺諫)이 간(諫)하는 것을 거역한 것으로서 절대 권력을 가진 군주도 수치로 여겼다. 고민하던 태종이 이당 역시 파직으로 마무리 했다. 이당을 죄줌으로서 거간의 이름이 역사에 기록되는 것을 두렵게 생각한 것이다.

사건을 마무리 한 태종이 이조판서(吏曹判書) 한상경을 불렀다.

“사헌부에서 하륜을 탄핵하는 상소가 올라 왔을 때 내가 어디에서 들었느냐고 물으니 원의(圓議)를 핑계하고 사실대로 고하지 않았다. 이것은 나를 임금으로 부족하게 여겨 고(告)하지 않는 것인데 죄를 주고자 하였으나 너그러이 용서하였다. 또 성발도는 형조의 우두머리로 하륜의 일을 듣고 부당하게 여겼다면 즉시 나에게 고(告)하는 것이 마땅하지 3성(三省)에 말하여 번거롭게 소청(疏請)하게 만드는 것이 대신의 도리이겠느냐?”-<태종실록>

“상교(上敎)가 지당합니다. 성발도가 신에게 고(告)하기를, ‘부끄럽다.’고 하였는데, 신은 능히 그의 이러한 뜻을 이해합니다.”

“내가 듣건대 하륜은 변겸 송사의 시비를 알지 못하다가 형조와 대간(臺諫)에서 핵실(覈實)한 뒤에야 그 잘못을 알았다고 하는데 그러한가?”

“하륜은 아직 의혹을 해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한상경의 말은 의미심장하다.

조정의 공기를 간파한 하륜이 영의정을 사직하는 상서를 올렸으나 태종은 읽어보지도 않고 돌려주었다. 임금의 하륜에 대한 신뢰는 끝이 없다. 감읍한 하륜이 예궐하여 사례하고 상서원에 들러 중관(中官) 최한과 대언(代言) 유사눌 그리고 조말생을 비밀히 불러 변겸 사건에 대하여 모종의 귓속말을 하고 물러갔다.

조정의 공기가 심상치 않다, 수세를 공세로 전환하라

승정원에 심어둔 자기 사람들에게 전략을 숙지시킨 하륜이 상소문을 올렸다. 방어만 하던 하륜이 배수의 진을 치고 공세로 돌아선 것이다.

“대간과 형조에서 변겸의 노비 사건을 오결(誤決)하였습니다.”

상소문을 읽어본 태종은 잘 되었다 싶었다. 그렇지 않아도 하륜의 행적이 의문스러웠는데 철저히 파헤쳐 사건의 진실을 알고 싶었다.

“사건의 본말을 고찰하여 확실하게 보고하라.”

승정원에 특명이 떨어졌다. 허나 승정원에는 이미 하륜의 손길이 거쳐 간 뒤였다. 하륜은 대간과 형조가 연루된 상소문을 올릴 때 자신의 상소가 어디에 하명될 것인가 맥을 짚었다. 사간원이 전면에 나서지는 않았지만 사헌부와 사간원은 초록은 동색이라고 생각할 터. 그럼 어디로 내릴 것인가? 승정원에 하명될 것이라는 것을 예견한 하륜이 먼저 손을 쓴 것이다.

“삼성(三省)의 판결이 오결(誤決)이었습니다.”

임금의 명을 받은 승정원 형방대언(刑房代言) 조말생이 보고했다. 조말생의 보고를 받은 태종은 의금부에 명했다.

“삼성(三省)의 장무지평(掌務持平) 정연과 헌납(獻納) 안도, 형조좌랑(刑曹佐郞) 송명산, 형조좌랑 정용과 그리고 변정도감(辨正都監) 판관(判官) 하면, 변정제조(辨正提調) 유정현, 민여익과 도청사제용감정(都廳使濟用監正) 정초와 성발도를 하옥하라.”

하륜의 공세는 집요했다. 하륜을 향하여 각을 세웠던 사람들이 줄줄이 투옥되었다. 반대세력을 뿌리 채 싹 쓸어버린 것이다. 하면의 판결이 옳았고 성발도의 기개가 가상했지만 권세 앞에는 무력했다. 하륜 역시 사건의 진실 앞에 철저히 무너질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지만 공세는 성공했다. 왕심(王心)을 읽어내는데 동물적인 감각을 지닌 하륜의 뒤집기 한판승이었다.
#이방원 #노비변정도감 #하륜 #성발도 #지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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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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