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박이 단호박이 아니네!"

17인의 동유럽 여행기, 세 번째 이야기

등록 2007.08.09 15:05수정 2007.08.09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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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25일 아우슈비츠를 둘러본 후 분위기는 착 가라앉아 있었지만, 산 사람은 그래도 먹어야 한다고 하지 않던가. 점심을 먹으러 예약해둔 식당에 들어갔다. 작은 꽃으로 식탁 위를 예쁘게 장식하고 색깔 있는 초까지 꽂혀 있었는데 초에 불을 붙이니 식탁 위에 빈 접시만 놓여 있는데도 진수성찬이 차려진 것처럼 화려해 보였다.

'나도 집에 가면 식탁 위에 꽃을 꽂아 봐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현지식이라는 점심을 기다렸다. 음식이 나오기 전 빵이 바구니에 담겨 놓여있었는데 모두들 잘 먹었다. 뜨거운 야채스프가 나오고 감자와 고기가 곁들인 메인요리가 나왔다. 노란색을 띤 감자가 맛나다. 돼지고기도 우리가 먹던 돈가스처럼 튀기지 않아 더 부드럽게 느껴졌다. 우린 당연히 식사 후에 커피나 차가 곁들여 후식처럼 나올 줄 알았는데 여기선 그렇지 않은가 보다. 커피로 입가심을 해야 하는데 아쉽다. 무척 마시고 싶었다.


a 광장으로 가는 골목

광장으로 가는 골목 ⓒ 허선행

오후에는 크라카우 중앙광장 주변을 둘러보는 좀 자유로운 시간이란다. 빡빡한 일정으로 서로 이야기할 시간도 없었는데 모처럼 자유시간인가보다. 폴란드의 수도였던 만큼 문화의 중심지이며, 구시가지의 중앙에 있어 중앙광장이라고 불리는 광장은 규모가 꽤 크다.

a 폴란드 크라카우 중앙광장에는 많은 사람들이 오고 갔다

폴란드 크라카우 중앙광장에는 많은 사람들이 오고 갔다 ⓒ 허선행

내 눈길이 닿는 곳은 모두 교과서에서만 보아왔고 세계사 시간에 들어왔던 고딕과 르네상스 양식이 혼합된 건물이 자리 잡고 있다. 자유 시간을 주면서 환전하는 곳과, 필요한 물건이 있으면 각자 사라고 하면서 이곳에는 호박이 유명하다고 알려 준다. 호박은 잘 골라서 사라며 친절하게 안내의 말까지 해줬다.

중앙광장에 있는 시장의 위치와 마리아성당과 구 시청사탑 등 가이드가 가리키는 곳에 눈을 두면서도 생각은 '커피 한잔 마실 곳은 없을까'였다.

건물의 길이가 무려 100m나 된다는 직물회관과 마리아성당을 배경으로 사진을 먼저 찍었다. 마리아성당은 외양보다 내부가 화려하니 꼭 둘러보라는 안내자의 말에 따라 제일 먼저 들렀다. 말 그대로 유명한 조각과 화려한 치장에서 눈을 떼지 못할 정도였다.

a 마리아성당과 직물회관

마리아성당과 직물회관 ⓒ 허선행

우리 일행은 흩어져 각자 자기가 먼저 보고 싶은 곳으로 갔다. 시원한 음료를 마시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작은 성당에 들어갔다. 아주 작고 소박한 성당이었다.(이 성당의 이름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곳에서 간절하게 기도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니 나도 모르게 숙연해진다.


어디를 먼저 둘러볼까 광장을 걷고 있는데 갑자기 사람들의 시선이 따갑게 느껴진다. 내 옷차림이 이상해졌나 내려다보는데 갑자기 "와" 하는 소리와 함께 웃음소리가 난다. 알고 보니 퍼포먼스하는 사람이 남편의 뒤를 아까부터 따라오며 뒷짐지고 걷는 모습 등을 흉내 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모르고 아직 뒷짐을 지고 걸어가는 남편 뒤를 흉내 내며 얼굴에 분장까지 하고 뒤따라오던 퍼포먼스하는 사람. 얼른 카메라를 꺼내 찍으려 하자 또 다른 곳으로 가서 다른 사람의 흉내를 내고 있다. 저 사람은 저렇게 해서 다른 사람에게 즐거움을 주는구나. 슬며시 웃음이 나온다.


a 노천카페와 멀리 퍼포먼스하는 사람

노천카페와 멀리 퍼포먼스하는 사람 ⓒ 허선행

아까 가이드가 말하던 120년 전통의 초콜릿 가게가 어딜까 둘러보니 바로 가까이에 그 가게가 있다. 우리 두 내외가 들어선 그 가게는 아주 작았지만 손님이 줄을 서 있다. 여러 가지 모양과 다양한 종류의 것 중에서 어떤 것을 어떻게 고를지 몰라 고민하고 있는데 마침 우리 일행이 줄 맨 앞에 서 있는 게 보였다.

손자들 주려고 큰 상자 두 개나 고른 것이 보였다. 그분도 맛있어 보이는 것으로 골랐다고 하시기에 나도 무작정 감으로 작은 걸로 달랑 한 개만 골랐다. 값은 또 왜 이렇게 싼가. 전통 있는 집이라 비쌀 것으로 생각했었는데 의외로 값도 쌌다. 우리나라에서 사는 가격 정도였다.(그런데 집에 와서 더 많이 사올 걸 하고 후회했다. 뒷맛이 달지도 않고 개운하면서도 깔끔한 것으로 잘 골랐기 때문이다.)

다른 곳을 둘러보려던 참인데 눈치 없게도 또 화장실이 가고 싶어진다. 아까 식당에서 들렀었는데 또 돈을 내고 화장실을 가야하나 하고 있는데 지인은 벌써 다른 건물에서 다녀왔다고 한다.

목도 마르던 참인데 차 마실 겸 노천카페에 자리를 잡았다. 벽에 걸린 꽃과 카페의 사람들을 둘러볼 틈도 없이 난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식당의 종업원에게 이 집의 건물이 맞느냐고 물어서 들어선 식당엔 남자 셋이 한가롭게 이야길 나누고 있었다.

화장실을 가겠다고 했더니 너무나 친절하게도 주인으로 보이는 남자가 따라와 불을 켜주고 문까지 닫아 주더니 이중문 밖에 서 있는 눈치다. 지나친 친절로 느껴져서인지 부담도 갔다. 아무튼 폴란드인의 친절로 손까지 닦고 나니 더 바랄 게 없다.

노천카페 의자에 앉아 있던 남편과 지인 두 내외가 무얼 시킬까 의논하고 있었다. 차보다는 목이 마르니 맥주를 마시면 어떨까라는 의견으로 모아졌다. 맥주를 시키고 나니 아까 언뜻 다른 곳에서 케이크 조각을 먹던 사람을 본 것 같아 그것도 시켜보자고 제안했다. 지인의 남편이 유창한 영어로 시키긴 잘했는데 뭐가 잘못되었나 보다.

느낌에 커다란 케이크로 잘못 알아들은 것 같다며 다시 종업원을 부르니 예감이 맞았다. 커다란 케이크를 먹을 뻔했다며 케이크 주문은 취소하고 맥주만 마시기로 했다. 내가 앉아 있는 주변의 건물은 300~400년이 넘은 건물이라니, 내가 마치 옛날로 거슬러 올라앉아 있는 느낌이다.

맥주의 맛은 잘 모르지만 혀에 감기는 듯 부드러워 나도 몰래 반 컵이나 들이켰다. 취기가 서서히 올라 비몽사몽. '이 맛에 술들을 하나' 할 정도로 기분이 좋아졌다. 혀도 말을 듣지 않고 꼬이는 것 같기도 하고 다리도 헛놓인다.

치과 치료를 받느라 회식자리에서조차 맥주 한잔도 안한 지가 일 년은 되었나 보다. 가뜩이나 마시지도 않았던 술을 마신 데다 그곳의 맥주는 도수가 더 있어서 처음 느낀 것처럼 부드러운 맛이지만 금방 취해 버렸다. 맥주 한잔에 적당하게 취기가 올라 오전의 수용소를 둘러보고 울적했던 기분도 잊을 즈음 광장주변을 더 둘러봐야겠다는 생각에 서둘러 다른 일행을 찾았다.


구 시청사탑 건물의 탑 내부에는 크라카우 시립박물관이 있고, 지하 감옥이었던 곳은 현재 극장 등으로 변해 있다.

a (구)시청사탑을 뒤로 사진 한 장

(구)시청사탑을 뒤로 사진 한 장 ⓒ 허선행

여럿이 탑의 전망대를 오르려고 하는데 카드 결제가 되지 않는다고 해서 환전을 하러 갔다. 환전을 해서 돌아오니 이미 전망대 입장시간인 4시 30분이 지났다고 입장이 안 된다고 한다. 꼭 둘러보고 싶다고 하던 지인의 남편이 화가 난 것 같다. 두 내외가 서로 표정이 밝지 않아 보인다. 나중에 들어 보니 그 두 내외는 시청사탑을 못 본 것을 아쉬워하며 바벨성 외관을 돌아보고 왔단다.

약속한 시간에 모여 숙소로 가기로 했었다. 광장을 돌아보는 마차를 타러 갔던 일행이 도착하자마자 우리를 기다리는 버스가 있는 곳으로 갔다. 버스로 가는 길에 눈에 띄는 것은 사람들이 모두 큰 개를 한 마리씩 데리고 다니는 것이다. 집에 두고 온 애완견이 보고 싶어진다. 안 그래도 아까 광장에서 비둘기를 볼 때 생각이 났었다.

비둘기를 잡으려고 자기가 안 보이게 몰래 다가가려는 생각으로 고개를 땅에 박고 비둘기를 쫓던 우리 애완견이 생각났었기 때문이다. 아! 정말 이곳 사람들은 개를 많이 좋아 하나보다. 지나가는 강아지를 하나하나 카메라에 담는 것으로 우리 애완견을 보고 싶은 마음을 달랬다. 바벨성이 보이는 곳에서 기념사진을 찍는데 햇볕이 좋아서인지 많은 사람들이 나와서 일광욕을 즐기고 있다.

버스에 타자마자 지인이 한마디 한다.

"난 글쎄 진짜 호박을 파는 줄 알았어요. 얼마나 호박이 유명하길래 여기서 호박을 사가라고 하나 했더니 그 호박이 단호박이 아니고 보석 호박이네."

그러자 이곳저곳에서 나도 그렇게 생각했었다며 시장을 둘러보고서야 알았다는 이야길 서로 해서 일행이 모두 웃었다. 왜냐하면 그분의 손가락에 큼지막한 호박 반지가 애초부터 끼워져 있었기 때문이다.

벼룩시장에서 비록 호박을 사지는 못했지만 구석구석 아주 재미난 물건들이 많았었는데 꼼꼼히 살펴 볼 시간이 없어 대충 훑어 본 아쉬움을 우스갯소리로 삼켰다. 하루 일정이 끝나니 저녁시간은 한가롭다. 호텔에 들어서는데 입구에 아담한 실내수영장이 보인다,

수영장에 대한 욕심 때문에 저녁에 모이자는 시간을 미루고 부리나케 수영장으로 향했다. 대규모의 수영장과는 달리 규모는 작지만 시설이 편리하게 되어 있었다. 손님이 많지 않아서인지 유독 친절하게 대하는 그곳의 안전요원은 내게 안타까운 눈길을 주었다.

수영장도 정해진 시간이 있나 보다.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ten minute"라고 외친다. 알았다고 했더니, 또 다른 안전요원으로 보이는 남자가 내가 수영하는 멀찌감치서 수영솜씨를 뽐낸다. 한판 겨뤄보자는 눈치다. 나도 질세라 열심히 여러 가지 영법으로 수영을 하니, 꼭 겨루기를 하는 것 같다.

우리 일행 중에 아무도 수영장에 오지 않더니, 제일 나이 많으신 지인의 친정어머니가 수영복을 입고 들어오셨다. 반갑기는 한데 금방 나갈 시간이 되었다고 말씀드렸다. 따님이 찍어주는 사진을 함께 찍으며, 광장시장에서의 호박이야기를 하며 다시 한 번 웃음 꽂을 피웠다. 아우슈비츠에서 울다가, 중앙광장에서 웃다 온 여행일정의 첫날은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폴란드 #크라카우 중앙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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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일찍부터 시작되는 일상생활의 소소한 이야기로부터, 현직 유치원 원장으로서 아이들과 함께 생활하며 벌어지는 이야기들을 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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