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6년 2월 '서울대학교 제60회 학위수여식'이 서울 관악구 서울대 종합체육관에서 열려 학사 3139명, 석사 1725명, 박사 583명 등 총 5583명에게 학위를 수여했다.오마이뉴스 권우성
요즘 언론들이 가짜 학위자 들추기에 재미를 붙인 모양이다. 사회지도층들의 위선과 이면의 추악함을 드러내어 분노하는 국민의 정서에 철저하게 서비스하려는 노력을 어찌 비난할 수 있을까? 그러나 그 들추기가 옳지만은 않을 뿐만 아니라 재미도 없으니 애닮을 뿐이다.
가짜 학위 파문의 원인은 딱 두 가지다. 학벌사회나 개인의 악행이 바로 그것. 중간을 좋아하는 분들은 이 둘을 결합시켜 괴물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이러한 관점만을 가지고 있다면, 학위를 가지고 장사를 하는 이들 때문에 불거진 문제라는 점을 놓치기 쉽다. 또 하나 여기에서 꺼내려는 이야기는 가짜 학위자보다 진짜 학위자가 더 문제일 수 있다는 점이다.
우선, 학위 검증의 양상이 '학위가 없는 이들은 가짜'라는 낙인찍기로 번지고 있다. 학위가 없으면 강단에 설 수 없는 괴상한 모순을 외면하고 말이다. 여기에서 '강단에 선다'는 것의 의미는 단순히 강사가 아니라 전임교수 이상의 임용을 말한다. 게다가 갈수록 학위가 없으면 강사되기도 힘들다.
천재에게 누가 학위를 줄 것인가
어찌된 일인가. 법이 있지 않나. 교수자격기준 등에 관한 규정 제2조·제4조·제11조(자격인정의 대상)에 따르면 대학을 나오지 않고도 관련 업적이 있을 경우, 교수임용에는 결격사유가 없다. 학위에 관계없이 교수에 임용될 수 있다. 하지만 거의 100%에 가까운 대학이 이를 무시하고 있다.
실력있는 이라면 당연히 그의 실력을 계속 계승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그것이 교육제도의 존재이유다. 대학이라는 고등교육기관이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천재를 범인들이 어떻게 평가를 한다는 말인가. 아니, 천재가 아니라고 해도 한 분야의 대가에게 누가 학위를 줄까. 무엇보다 한국의 대학은 범인(凡人)이 학위 제도라는 완장을 내세워 대가와 천재, 아니 훌륭한 인재들을 고사시켜 버린다.
만약 조용필이 강단에 서려면 대학부터 다시 다녀야 한다. 고졸이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코스는 대학 4년에 대학원 석사 과정 2년, 박사과정 2년이다. 그리고 학위 통과 기간까지 합하면 통상 최소 10년이 소요된다. 10년 동안 조용필은 예술적 활동을 제대로 못한 채 남의 이론이나 써놓은 책과 씨름해야 한다. 그 사이 자신의 예술적 영감을 죽인다. 서태지는 고졸 검정고시부터 다시 보아야 한다.
대중문화만이 아니다. 극작가 이강백은 무학이다. 그러나 극작과 연출에서는 자타가 공인하는 대가다. 그런데 현재의 강화되는 시스템을 보면 대학에 교수로 있기 위해서는 그는 초등학교부터 다녀야 한다.
물론 그는 다행히 서울예전 교수다. 그러나 그것은 이제 옛말이다. 현재도 수많은 유명 문학인들이 대학원에 다닌다. 작품으로 이미 인정받는 그들이 불필요하게 대학원에 다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렇다. 그래야 강단에 설 수 있기 때문이다. 자, 이럴 때 학위가 없다고 그들이 가짜일까? 많은 매체들이 학위가 없는 혹은 학위를 속인 사람들을 잡아내어 폭로하는데 재미를 붙이고 있다. 그리고 논설들은 그것을 지원사격하고 있다. 그러나 정작 학위 제도의 모순이나 학위 있는 가짜들에는 관심이 없다. 이는 단지 논문 실적이 몇 편인가 하는 수량적인 기준을 바탕으로 하는 평가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학위를 입은 진짜 '가짜'들
정말 문제는 학위가 가짜들을 가려주는 혹은 합리화 시켜주는 기제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특히 문화예술계에 학위가 무엇이란 말인가. 그들은 학위라는 이름으로 이론만 알지 실제로 문화예술을 몸으로 구현하는 이들을 압박한다.
우수한 학생들을 '찌질이'로 만드는 데 더 심각성이 있다. 예술적 재능이 있는 학생들이 이론만 아는 이들의 눌림을 받는다. 이론만 강조하면 창발성은 위축되거나 아예 죽어버린다.
조용필·서태지·이강백이 제도권 교육에 계속 있었다면 자신들의 문화 업적을 이룰 수 없었을 것이다. 창작을 못하는 이들이 학위라는 완장을 찼다는 이유로 창작자들을 대학에서 모두 쫓아내는 것만큼 더 큰 문제가 있을까?
그들은 이론적인 놀음을 하다가 정년 때까지 아무런 생산적 활동 없이 학생들의 등록금을 월급으로 타간다. 그리고는 오히려 학생들 공부 안 한다고 타박하거나, 자신의 이론에 학생들의 재능을 꺾어 버린다. 바쁘기는 하다. 끊임없이 자신의 종족번식을 위해 패거리를 지어 다녀야 하기 때문이다. 이는 교수 사회에 대한 비판이 초점이 아니라 학위제도에 대한 근본적인 되물음이다. 그러나 이러한 물음도 공허하다.
학벌사회나 학위를 검증하지 못한 대학에 대한 비난만 있지 학위 장사를 하는 대학의 행태에 대한 비판은 찾아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대학은 학문의 전당이 아니라 학위 장사의 전당이다.
대학이 전국 순위를 올리려거나 시험 성적이 좋은 학생들을 뽑기 위한 것은 우수한 인재들을 길러내려는 것이 아니다. 성적이 우수한 학생들이 많이 몰려야 학교 이미지가 좋아지고, 그 이미지에 기대어 다시 학위 장사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밤에 불야성을 이루는 특수대학원은 물론 최고위 과정 같은 기기묘묘한 상품들이 모두 마찬가지 사례다.
학위제도는 실력을 가늠하기 위한 잣대지만, 반드시 실력을 의미하지는 않고 오히려 실력 있는 이들을 쫓아내고 있다. 그것은 학벌사회라는 모호한 존재가 아니라 자기종족 번식에 휩싸인 교수사회와 대학에 직접적으로 책임이 있다.
국내 학위조차 의미가 없는 것은 말할 것도 없지만, 교육부가 이를 방조하고 있으니 검증시스템의 강화가 공허하다. 학벌 없는 사회를 부르짖는 이들조차 학위의 문제에 대해서는 무감각하니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문제는 학위 장사하는 대학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