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은 바이킹을 위한 '김치 담그는 법'

[세계여행길에서 만난 사람들⑤] 스칸디나비아의 늙은 바이킹 얀과 아이다

등록 2007.08.14 15:02수정 2007.08.15 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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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 오슬로를 향하는 새하얀 유람선 ⓒ 김향미 & 양학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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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 북쪽으로 가는 마을 ⓒ 김향미 & 양학용


바다를 보았다. 투명한 바닷물과 뱃전에 부딪치는 하얀 포말. 언제나 내게 바다는 설명하기 힘든 그리움이다.

고개를 들자 북극으로 가는 땅 스칸디나비아 반도가 보이기 시작했다. 언제 나타났는지 새하얀 유람선도 나란히 달렸다. 빙하가 녹아 만들어진 바다계곡 피오르드(Fjord)로 들어선 모양이었다. 왼쪽은 노르웨이 오른쪽은 스웨덴의 예쁜 마을이 이어졌다. 그 끝에 오슬로가 기다렸다.

"친구들! 어서 오게나. 두 늙은 바이킹이 환영한다네!"

얀(Jan)과 아이다(Aida)가 두 팔 벌려 안아주며 즐거워했다. 우린 베트남에서 만났다. 그것도 세 번씩이나. 늙은 그들은 비행기로, 젊은 우리는 버스로 이동했는데도 약속한 것처럼 다시 만나곤 했다. 세 번째로 헤어질 때 아이다가 아쉬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번엔 다시 못 만나면 어쩌지?"
"그럼…, 저희가 노르웨이로 찾아가죠 뭐!"

늙은 바이킹의 집은 너무 예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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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호이안에서 세번째 만나다 ⓒ 김향미 & 양학용

얀과 아이다의 집은 오슬로에서 15㎞ 남짓 떨어진 베케스투아(Bekkestua)라는 작은 마을에 자리잡고 있었다. 정원에 그네가 놓인 예쁜 3층집이었다. 1층은 손님방과 TV룸, 2층은 주방과 넓은 거실, 3층은 침실과 서재와 욕실로 그 쓰임이 나누어져 있었다.

"아이다! 집이 너무 좋아요. 마음에 꼭 들어요. 만약 저희가 너무 오래 머문다 해도, 절대 저희 잘못이 아니에요. 당신 집이 너무 예쁜 탓이에요! 아시겠죠?"
"물론, 당연하지! 바닷가에 여름 집도 있어. 작은 요트도. 다음에 오면 우리 거기로 가자."
"정말요? 그런데 두 분 부자인가 봐요."
"그건 아냐. 우린 평범한 연금생활자야. 30년 이상 성실하게 일하면 누구나 가지는 권리일 뿐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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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킹 박물관에서 ⓒ 김향미 & 양학용

아이다와 아내는 만나자마자 수다를 떨었다. 얀이 보여줄 게 있다면서 내 손을 잡고 서재로 데려갔다.

"자네들이 언제 오나 언제 오나 하면서 기다렸지."

그의 컴퓨터에는 아내와 나의 여행 사이트가 떠 있었다.

"한국어를 읽을 순 없지만 사진을 보며 점점 노르웨이로 오고 있구나 생각했지."

순간 감동해서 얀을 쳐다보았다. 그는 장난스런 표정으로 한 쪽 눈을 찡긋해 보였다.

감동은 그걸로 끝나지 않았다. 얀과 아이다는 오슬로가 한 눈에 내려 보이는 레스토랑의 창가 자리를 예약해 두었다. 웨이터가 와인을 따라주었고 연어 스테이크가 나왔다.

"아~ 행복해!"

가난한 여행자에게 자주 오지 않는 순간이었다.

다음날도 두 늙은 친구의 이벤트는 계속되었다.

"노르웨이에 왔으면 바이킹을 보러가야지! 그 옆에 아문센의 프람호 박물관도 있으니까."

박물관 투어를 끝내고 해변을 걸었다. 얀이 줄곧 얘기했다.

"사실 신대륙을 가장 먼저 발견한 것도 바이킹이었어. 그리고 아문센이…."
"어! 홍합이다!"

아내와 나는 바지를 걷어붙이고 바다로 뛰어들었다. 새까만 홍합이 지천이었다. 우린 신이 났다. 얀은 당황해하고 아이다는 배꼽을 잡고 웃어댔다. 얀이 잠깐만 기다려 보라더니, 변호사인 딸에게 전화를 걸었다. 곧 "지금 채취할 수 있는 시즌"이라는 답이 왔다.

냉동식품은 그만! 한국 요리 해드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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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홍합이다. ⓒ 김향미 & 양학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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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 전통 건축 양식의 교회 ⓒ 김향미 & 양학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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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다의 젊음을 위해 인도에서 사 온 헤나염색을 해드렸다. ⓒ 김향미 & 양학용

그날 저녁, 네 명의 친구들은 홍합탕을 맛있게 먹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요리 재료를 찾느라 지하 식품저장고를 뒤지다보니 온통 냉동식품뿐이었다.

"냉동 피자, 냉동 새우, 깡통 어묵…. 노인네들이 매일 냉동식품만…."

마음이 짠했다. 아내와 나는 머무는 동안만이라도 따뜻한 요리를 해드리기로 했다.다음날 아침 일찍 얀을 재촉해서 온갖 야채·고춧가루·베트남 액젓·소고기 등을 잔뜩 사서 돌아왔다. 때 아닌 아내의 요리강습이 시작되었다.

"김치의 핵심은 시간이에요. 배추를 절여두고 기다리는 시간. 담근 후에 맛 들기를 기다리는 시간. 아시겠어요? 자, 절인 배추는 여기 두고 이제 소스 만들기를 해봅시다."

얀은 깨알같이 적어가며 열성이었다. 김치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은퇴하기 전에 터널공사 전문가였는데, 서울에서 장기간 터널 공사를 한 적도 있단다. 김치와 순박한 사람들. 지금 그에게 남은 서울에 대한 기억이다.

아내는 내친 김에 불고기 강습도 했다. 이건 또 아이다가 가장 좋아하는 한국요리다.

"그리 어렵지 않죠? 가끔이라도 한 번씩 해 드세요. 인스턴트 냉동식품만 드시지 말구요."
"우리 어릴 때만 해도 이러지 않았는데. 부부가 맞벌이하고 핵가족이 되다보니, 간편한 요리에만 익숙해진 거지."

불고기 만찬 덕분에 밤늦도록 얘기가 이어졌다. 아이다는 음식문화에서 깎인 점수를 만회라도 하려는 듯이, 노르웨이의 노인 복지와 무상 의료와 무상 교육에 대해 얄밉도록 자랑을 늘어놓았다. 부러웠다. 얀이 한 마디로 정리했다.

"이것이 노르웨이 사회의 핵심이지(High tax and Equal 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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얀과 아이다의 귀여운 손녀. ⓒ 김향미 & 양학용

다음날이었다. 딸과 사위가 손녀를 데리고 왔다. 둘 다 변호사라고 했다. 얀과 아이다가 멀리서 친구들이 왔으니 다녀가라고 한 모양이었다. 그들은 조금 무뚝뚝했다. 손녀만 빼고.

"그랬구나."

그제야 두 늙은 친구의 보일 듯 말듯 한 그늘의 정체를 알 것 같았다. 딸네 식구가 돌아가자 얀에게 슬며시 물어보았다.

"자녀들이 자주 다니러 오나요?"
"음…. 얼마 전에 이 동네에서 노인 한 명이 죽었어. 자식들이 일주일이 지난 후에야 발견했다지 아마. 자네들 우리 부부가 아시아를 여행할 때마다 부러운 것이 뭔지 아나?"
"……"
"가족문화와 공동체문화라네. 잃어버리지 말아야 할 것들이지…. 친구들! 이건 서양을 따라 해선 안 돼."

모피코트를 입었는데, 가슴이 시리다

떠나는 날이었다. 아이다가 긴 모피코트를 아내에게 줬다. 그녀의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옷이라고 했다. 배낭 여행자에게 어울릴 턱이 없었다. 그래도 받아든 건 유럽에서는 중고차를 사서 여행 중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아이다의 마음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이제 아시아로 여행하기는 힘들 것 같아. 내 몸은 내가 알거든."

아이다가 어느 저녁 했던 말이다. 어떤 헤어짐인들 아쉽지 않던 적이 있겠냐만, 두 늙은 바이킹과의 이별은 가슴 한 쪽이 시리도록 아프게 했다.

'북쪽으로(Nor) 가는 길(Way)', 노르웨이의 북쪽으로 차를 몰았다. 내내 울창한 숲과 맑은 호수가 이어지는 풍요로운 길이었다. 한 나절을 달려도 차 한 대 만날 수 없는 적막한 길이기도 했다. 꼭, 얀과 아이다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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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내 피오르드 ⓒ 김향미 & 양학용

덧붙이는 글 | [후일담] 얀과 아이다는 베케스투아의 예쁜 3층 집을 팔았다. 얀은 일주일에 한 번씩 해오던 회사의 자문 역할마저도 그만두었다. 그리곤 바닷가 여름 집으로 이사했다. 다시 만나면 여름 집에 놀러가자던 아이다의 말을 기억한다.  

양학용 기자는 아내인 김향미씨와 결혼 10년째이던 해에 길을 떠나 2년 8개월 동안(2003년 10월 16일~2006년 6월 4일) 아시아·유럽·북미·중남미·아프리카·중동 등 세계 47개국을 여행했습니다.

덧붙이는 글 [후일담] 얀과 아이다는 베케스투아의 예쁜 3층 집을 팔았다. 얀은 일주일에 한 번씩 해오던 회사의 자문 역할마저도 그만두었다. 그리곤 바닷가 여름 집으로 이사했다. 다시 만나면 여름 집에 놀러가자던 아이다의 말을 기억한다.  

양학용 기자는 아내인 김향미씨와 결혼 10년째이던 해에 길을 떠나 2년 8개월 동안(2003년 10월 16일~2006년 6월 4일) 아시아·유럽·북미·중남미·아프리카·중동 등 세계 47개국을 여행했습니다.
#노르웨이 #오슬로 #스칸디나비아 #바이킹 #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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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섬 제주에서 살고 있다. 나이 마흔이 넘어 초등교사가 되었고, 가끔 여행학교를 운영하고, 자주 먼 곳으로 길을 떠난다. 아내와 함께 한 967일 동안의 여행 이야기를 묶어 낸 <길은 사람 사이로 흐른다> 이후, <시속 4킬로미터의 행복>, <아이들, 길을 떠나 날다>, <여행자의 유혹>(공저), <라오스가 좋아> 등의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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