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우리는 여행을 보이콧했다

[늘근백수의 객적은 길 떠나보기 24]여행의 쉰내

등록 2007.08.16 09:03수정 2007.08.16 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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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어시간을 더달려 차는 롭슨산의 '전망 위치'앞에 멈추었다. 록키산맥에서 가장 높다는 롭슨산(3954m)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위치란다. 차에서 내리니, 과연, 구름을 제치고 하늘을 향해 당당한 위용을 들어내놓고 있는 산이 한 눈에 들어왔다. 마이클은 연신 찬탄하였다. "역시 우리팀은 운이 좋아. 일년이면 300일 이상 구름에 덮혀있는 저산이 오늘따라 구름 한점 덮임 없이 정상까지 선명하게 바라볼수 있다니…."

a 롭슨산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사람들

롭슨산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사람들 ⓒ 제정길

그의 말대로 구름은 산의 어디에도 범접하지 못하고 백댄서처럼 산 뒤에 머물러 우쭐대고 있었다. 산은 잘 다듬어진 보디빌더의 상체 같기도 하고, 철골로 쌓아올린 거대한 구조물 같기도 한 몸집을 하고 명상하듯 묵묵히 하늘을 우러러 정좌하고 있었다. 흙 한점 풀 한포기 실리지 않은 그의 몸매는 먼발치에서 쳐다보는 우리들을 주눅들게 할만큼 강인해 보였다. 그것은 높이뿐만 아니라 형태로도 완벽한 조형미를 갖추어서 그곳으로 올라가면 어디엔가에 천국으로 들어가는 비밀통로라도 있을듯 느껴졌다.


a 롭슨산 근경

롭슨산 근경 ⓒ 제정길

벨마운트라는 작은 마을에 도착한 것은 어스름녘이었다. 눈 덮인 산에 둘러싸인, 사람 몇 가구 살지 않을 것 같은 작은 마을에도 우리의 동포는 살고 있었다. 그의 식당에서 저녁을 먹었다. 한국에서 방송국의 PD 일을 했다는 식당주인은 우리를 살갑게 맞았다. 식당을 인수한지 얼마되지 않아서인지 어딘지 어색하고 서툴러 보였으나 그는 그의 새부인과 함께 손님들에게 정성을 쏟았다. 캐나다 여행 중에 메인디시(오늘은 불고기였다)를 무한정 제공하는 집은 이집이 처음이었다.

a 적막한 작은 마을 벨마운트

적막한 작은 마을 벨마운트 ⓒ 제정길

식사를 마치고 나오는데 부부는 문밖에까지 나와서 우리를 배웅하였다. 왠지 마음이 짠하였다. 겨울이면 온통 마을이 철시를 한다는 이 눈 많고 외진 척박한 땅에 와서 뿌리를 내리려고 안간힘을 쓰는 그들의 모습에서는 흙 한점 발리지 않은 롭슨산 같은 강인함과 풀 한포기 자라지 않은 쓸쓸함이 같이 묻어났다.

a 해가 지면 벌만한 모기들이 덤벼드는 황량해 보이는 숙소

해가 지면 벌만한 모기들이 덤벼드는 황량해 보이는 숙소 ⓒ 제정길

숙소는 식당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마을이 끝나면서 나무들이 얼기설기 하늘을 덮기 시작하는 길 저편으로 기역자로 꺾어진 2층 건물의 허름한 여관(Inn)이 우리가 잘 곳이었다. 주변에 인가 하나 없이 다친 산짐승처럼 모가지를 외로꼬고 웅크리고 있어 그것은 꽤 황량해 보였다. 이도 우리 동포가 하는 것이라하나 주인의 얼굴은 볼 수 없었다. 방밖에 의자를 내놓고 앉아 캔 맥주를 하나 따서 마셨다. 록키에서의 마지막 밤이 비척비척 어스름 뒤에 숨어서 다가오고 있었다.

a 아침 하늘가에 핀 나팔꽃

아침 하늘가에 핀 나팔꽃 ⓒ 제정길

아침이 다시 찾아왔다. 오늘은 밴쿠버로 돌아가는 날이라, 어제의 그 식당에서 조반을 들고 일찌감치 길을 떠났다. 하늘에는 구름이 아침 나팔꽃처럼 피어올라 우리를 배웅하여 주었다. 이제 와서 사람들은 포식을 하고 남은 음식을 보듯 길가의 경치에 심드렁해했다. 그들의 가슴에는 '록키를 가보았다' 는 뿌듯함이 훈장처럼 매달려 대룽거리고 있을 터였다. 차는 빠르게 달리고 사람들은 천천히 잠속으로, 또는 생각속으로 빠져들었다.

a 호텔에서 바라보는 일몰

호텔에서 바라보는 일몰 ⓒ 제정길

늦은 점심 무렵에 밴쿠버에 도착하였으나 학생들을 도심의 제 갈곳으로 내려다 주고, 패키지 관광이면 피할 수 없는 '물건 파는 곳'을 한 군데의 들렀다가, 그리고는 저녁식사를 마치고 호텔로 돌아오니 저녁도 이슥한 저녁이 되었다. 나흘 전에 우리가 묵었던 호텔은 그 사이에 제법 크고 호화로워진듯 보였다. 사실은 록키에서의 몇 밤을 허름한 여관 나부랭이에서 자다보니 우리 눈이 어느새 그만큼 낮아져 있기 때문이리라. 내일은 오전7시에 출발, 6시10분부터에 호텔식당에서 조식, 오전 5시30분에 모닝콜을 보내준다니 오늘 밤은 뒤척거리며 늦게까지 잠을 못 이루어도 별 무리가 없을듯 하다.


a 빅토리아 행 훼리

빅토리아 행 훼리 ⓒ 제정길

잠결에 전화벨이 울렸다. 모닝콜이리라 짐작하고 수화기를 들었다 놓았는데, 뒤미쳐 벨이 또 울린다. 수화기를 드니 다급하고 성마른 목소리가 수화기를 타고 흘렀다.

"제선생, 지금 당장 짐을 꾸려 내려오셔야 됩니다."
"아니, 무슨 일인데. 7시에 출발한다고 하지 않았소."
"허어, 그게 아니고, 지금 당장 내려오지 않으면 배를 못탄다는말이요."


수화기의 목소리는 첫날 밴쿠버에서 우리를 안내했던 '노(老) 가이드'였다. 부랴부랴 세수를 하고 옷을 입고 가방을 꾸려 로비로 내려오니 그는 얼굴이 붉으락 푸르락하며 전화통을 붙들고 있었다
.
"5시에 출발해야하는데 지금까지 안 내려와 있으면 어떻게 해요."

그는 내 얼굴울 보자마자 타박부터 하였다. 좀 어이가 없었다.

"어제 마이클이 분명히 7시에 출발한다고 얘기했는데 무슨 뚱단지 같은 소리요?"
"그게 아니고."

그는 말을 얼버무리며 이번에는 전임 가이드와 회사에 대한 불평을 들입다 토하더니 우리더러 차에 타라고 한다. 무언가 회사 내의 커뮤니케이션에 문제가 있은듯이 보였다.

"차에 타는 것은 급하지 않으니 사유나 알고 탑시다."

나도 불만 섞인 목소리로 느적거렸다.

a 오늘 가려는 부차드 가든 (1)

오늘 가려는 부차드 가든 (1) ⓒ 제정길

그러는 사이에 최 선생 부부가 내려왔다. 그들도 자다가 홍두깨를 맞은 것을 보니 우리와 같은 코스로 일정이 잡혀있는 모양이었다. 조금 있으니 이번에 기숙학교를 졸업한 여학생과 그 어머니가, 한참 후에는 첫날 만났던 할머니와 그 손녀들이 홍두깨를 맞고 로비로 모여들었다. 알고보니 모두 훼리를 타고 조지아 해협을 건너 빅토리아 관광 일정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a 오늘 가려든 부차드 가든 (2)

오늘 가려든 부차드 가든 (2) ⓒ 제정길

사람들은 제마다 툴툴거렸다. 가이드인 이 선생은 이 선생대로 무엇이 못 마땅한지 연신 언성을 높이며 신경질을 내었고, 영문도 모른 채 자다가 끌려나온 여행객들은 여행객대로, 가이드의 짜증에다, 제대로 세수도 못하고 급하게 나온 불만이 겹쳐 투덜거리며 짐가방을 끌었다. 차는 첫날 보았던 낡은 소형 밴이었다. 11개의 짐가방과 9명의 성인을 태우고 가기에는 차는 터무니 없이 작았다. 짐을 뒷칸에 싣고 억지로 종이짝처럼 구겨 앉아보니 맨위의 짐이 뒤에 앉은 사람의 머리를 내려눌렀다. 만약 급정거라도 한다면 짐들은 폭탄처럼 앞사람들의 목을 향해 쏟아질 태세였다.

도저히 위험해서 갈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길도 한발 두발이 아니라 빅토리아를 경유하여 씨애틀까지 가야하는 4~5시간의 장거리인데 말이다. 아무래도 안되겠다 싶어 이 차로는 도저히 갈 수 없다고 문을 박차고 나왔다. 최 선생도 내뒤를 따라 나왔다. 다른 사람도 다른 사람도. 결국 우리는 여행을 보이콧하고 말았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늘근백수의 객적은 길 떠나보기 21'에 이어서 계속되는 캐나디안 록키 여행기입니다. 그동안 글 쓰기를 잠깐 멈칫했다가 지난 주말 102일간의 여행을 마치고 귀국하여 글 올리기를 재개했습니다. 글의 구성상 처음부터 읽으심이 바람직하니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늘근백수의 객적은 길 떠나보기 21'에 이어서 계속되는 캐나디안 록키 여행기입니다. 그동안 글 쓰기를 잠깐 멈칫했다가 지난 주말 102일간의 여행을 마치고 귀국하여 글 올리기를 재개했습니다. 글의 구성상 처음부터 읽으심이 바람직하니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록키산맥 #롭슨산 #밴쿠버 #백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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