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판 정통 느와르 멜로의 탄생

[드라마 리뷰] <개와 늑대의 시간>

등록 2007.08.17 10:42수정 2007.08.17 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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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드라마 <개와 늑대의 시간> ⓒ MBC

느와르 장르의 주인공들은 비정하고 어두운 세계가 자신의 의지를 배반할 때, 세계와 맞서다 끝내 패배하는 비극적 인물들이다. 2000년대 새롭게 쓰인 홍콩 느와르 <무간도> 시리즈는 그 세계와의 대결에서 밀려나 결국 나는 누구인가 하는 자신의 정체성의 문제에 몰려 고통 받는 인물들을 그려냈다.

그리고 반갑게도 뒤를 이어 2007년 태국과 한국을 오가는 TV판 정통 느와르 멜로 <개와 늑대의 시간>(한지훈·유용재 극본, 김진민 연출, MBC 수목미니시리즈)이 탄생했다. <무간도>의 주인공들이 어린 시절부터 상대 조직에 침투해 스파이로 키워진다면, <개와 늑대의 시간>의 수현(이준기 분)의 경우는 좀 더 극적으로 엄마를 살해한 범죄조직 보스에 대한 복수를 위해 그곳에 위장 잠입한다. 그리하여 <무간도>가 운명이 뒤바뀐 두 남자의 고통을 주로 다룬다면, <개와 늑대의 시간>은 수현의 변신으로 인해 벌어지는 수현, 민기(정경호 분), 지우(남상미 분) 세 사람의 운명적 대결과 비극적 사랑을 담아낸다.

이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 둘은 주인공의 정체성의 혼란과 위기에서 비롯되는 비극적 정조가 작품의 핵심적 매력을 구축한다는 점에서 동일선상에 놓여진다. 확실히 <개와 늑대의 시간>의 사건들은 죽음을 넘어 몇 번의 운명적 부침을 겪는 수현의 불투명한 정체를 둘러싸고 발생한다. '해질녘, 저 멀리서 다가오는 실루엣이 내가 기르던 개인지, 나를 해치러 오는 늑대인지 분간할 수 없는' 그 정체의 불투명함. 그는 친구인가 적인가.

그러나 진짜 물음은 그 자신의 내부를 향해 있다. 나는 아군인가 적군인가. 나는 조직원인가 스파이인가. 도대체 나는 누구인가. 이수현인가 케이인가.

엄마를 죽인 청방 계열의 보스 마오(최재성 분)에 대한 복수심에 불타 섣부른 행동으로 조직규율을 위반하고 국정원에서 쫓겨난 수현은 양아버지 강실장(이기영 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정부장(김갑수 분)의 언더커버(위장잠입) 제안을 받아들여 케이라는 뒷골목 건달로 다시 태어난다. 이를 위해 그는 교통사고를 위장한 죽음으로 자신의 존재를 지워야만 했다. 그는 자신의 존재를 증명할 모든 것이 완전히 지워진 유령의 상태로 남게 된 것이다.

케이가 된 수현에게 무엇보다 견디기 힘든 것은 연인인 지우에게마저 자신이 이미 죽은 존재라는 사실이다. 지워진 존재로 인한 그의 고통은 그의 죽음의 상처를 조금씩 극복해가던 지우가 그와 형제처럼 자란 민기의 오랜 사랑을 받아들이기 시작할 무렵 극에 달한다.

조급해진 수현이 청방에 대한 주요 정보를 손에 넣고 제자리 복귀를 고대하던 찰나, 또 한 번의 운명적 전환이 그를 덮친다. 마오의 딸인 지우를 구하고 쫓기다 총상과 차량사고로 기억상실증에 걸리는 것이다. 이제 그는 자신의 기억과 함께 그토록 돌아가고 싶었던 과거의 존재를 송두리째 잃어버린다. 케이로 위장한 수현이 아닌, 수현에서 케이로 완전히 탈바꿈한 전혀 다른 존재로 거듭나는 것이다. 적으로 위장했던 그가 진짜 적이 되는 순간이다.

청방과 국정원 사이에서 갈등하고 번민하던 그는 이제 마오의 총애를 받는 조직원이 되어 원수인 그를 아버지처럼 따르게 된다. 조직원의 운명이 헌신적 몰입과 기계적 자발성에 있듯이, 그는 마오에게 맹목적 충성을 바친다. 그가 마오를 향해 겨누던 총구는 이제 정반대로 자신을 언더커버로 몰았던 국정원을 향해 겨누어진다.

이로써 수현과 민기는 친구에서 적으로, 각각 청방 조직원과 국정원 요원으로 처음으로 본격적인 목숨을 건 대결을 벌이게 된다. 지우와 아버지 강 실장의 애정을 한 몸에 받는 수현에 대한 미묘한 질투와 열등감에 시달렸던 민기에게 새롭게 나타난 케이는 이제야 한 번 도전해볼만한 정당한 적수가 된다. 게다가 아버지를 죽인 범인으로 오인되어, 그리고 이제 겨우 자신의 여자가 된 지우를 도로 빼앗아갈 위험한 연적이 되어, 케이는 민기에게 증오와 복수의 대상이 된다.

자신의 과거를 잃고 문득문득 자신이 누구인지 혼란에 휩싸이는 자의 고통은 친구를 적으로 맞이해야 하는 자의 고통과 짝을 이룬다. 과거의 연인과 빼닮았으나 전혀 이질적인 케이라는 인물로 인해 혼란을 겪게 된 지우 역시 고통스럽기는 마찬가지다. 그녀가 잔인한 범죄자인 친부와 따뜻하고 선한 양부 사이에서 혼란과 갈등의 고통을 겪는 것처럼.

그렇게 세 사람은 모두 정체성의 혼돈 속에 갇힌 인물들이다. 국가정보기관과 범죄조직, 친부와 양부, 친구와 적, 연인과 친구 등, 이들은 이러한 두 가지 대립물 사이의 갈림길에 놓여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선과 악이라는 원초적 대립각 위에 서있다.

흥미로운 건 두 가지 대립물들 사이에서 선과 악을 가르는 절대적 변별점이 잘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국가정보기관과 범죄조직은 정확히 닮은 꼴 조직이다. 두 조직 모두 상명하달과 절대복종의 규율로 이루어지며, 이면에 거래와 암투가 도사리고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비정한 두 보스, 정 부장과 마오가 닮아있는 것처럼. 아니 비정하고 잔인하기로는 정부장이 마오보다 한 수 위다. 그는 조직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요원들의 생사나 존엄 따위 쉽사리 눈감아 버릴 수 있다.

그렇게 기억상실로 스파이로서의 이용가치가 사라져버린 수현은 정 부장으로부터 언제 버려질지 모르는 위기에 놓인다. 과거 정보국 스파이로 이용되다 비루하게 버려지고 다시 이용당할 운명에 처한 변동석(성지루 분)처럼.

또한 지우에게 친부와 양부의 지위가 뒤바뀌고, 강 실장에게 친아들과 양아들의 구분이 무의미한 것처럼, 수현과 민기는 친구와 적의 경계를 넘나든다. 지우가 케이에게서 감지하는 그리운 연인과 낯선 타인의 혼재된 기운에 당황해 하고, 민기에 대한 연인과 친구의 감정 사이에서 흔들리는 것처럼.

그러나 정말 흥미로운 것은 수현과 마오의 관계이다. 성장한 수현이 마오를 다시 만난 순간 그는 어린 시절 자신의 눈앞에서 어머니를 살해했던 어마어마한 위력의 악인 마오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에 사로잡힘과 동시에 통제 불능의 사무치는 원한과 복수심에 시달린다. 그런데 문제는 마오에 대한 수현의 공포와 원한이 이 적대자에 대한 어쩔 수 없는 매혹과 뒤섞인다는 데 있다.

마오는 카리스마 넘치는 위력적 모습과 동시에 한없이 자애로운 풍모를 보여준다. 수현에게 그는 온화하고 포용력 있는 보스 이면에 있는 잔인한 살인자의 본색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악한 살인자의 이면에 있는 인간적이고 의리 넘치는 사나이로 나타나는 것이다. 수현은 확실히 이 적대자에게 완전히 포획된 것처럼 보인다. 그가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의 친부라는 뒤늦게 깨달은 사실은 단지 수현의 내면적 갈등을 더욱 부채질했을 뿐이다.

어쩌면 그의 기억상실은 자신의 화해시킬 수 없는 당혹스런 내적 갈등을 해소하기 위한 무의식적 반응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과거의 기억을 지움으로써 그는 엄마의 원수를 아버지로 받아들이는 비극적 인물로 탄생된다. 그는 아버지를 자임하는 자신의 적을 위해, 자신이 사랑하고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총을 겨누는 비극적 인물이 되는 것이다.

이처럼 비극은 우리의 주인공들이 자신의 부모를 선택할 수 없었듯이, 선과 악을 구별할 수 없다는 그 사실에 있다. 다가오는 존재가 개인지 늑대인지 분간할 수 없으며, 자기 스스로도 자신이 개인지 늑대인지 알 수 없다는 것. 그리하여 자기 앞에 놓인 두 가지 갈림길에서 어떠한 단호한 선택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자신의 의지대로 살아갈 수 없는 나약한 인간의 무력함에 다름 아니다. 잔인한 운명에 휘둘리는 이러한 무력함이야말로 현대 느와르의 주인공들을 비극적으로 만들어주는 원인이 되며, 그들이 숭고하고 비장한 영웅과는 정반대의 길을 걷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것은 또한 안쓰럽도록 위태로운 그들에게 우리가 온통 마음을 빼앗기는 주된 원인이기도 하다.
#개와 늑대의 시간 #청방 #국정원 #이준기 #정경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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