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부 박 하나 안 사나? 박 하나 사라"

시원하고 하얀 박 이야기

등록 2007.08.18 17:34수정 2007.08.18 1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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쪼개서 바가지로 만들어 물을 뜨니 얼음물 같이 차고,
온전한 대로 호리병 만들어서 담으니 옥 같은 술이 맑구나.
막힌 마음으로 펑퍼짐하니,
큰 것을 근심할 것이 없네.
어지간히 커지기 전에 삶아 먹어도 좋으니까.
- 이규보, <동국이상국집> 제4권



박을 어떻게 요리해 먹어요?

a 흥부 박 하나 안 사나?

흥부 박 하나 안 사나? ⓒ 송유미

동네 할머니들이 차린 채소전 지날 때마다 고개를 외면하지만, 할머니들은 이상하게 나만 보면 불러세운다.

"흥부 박 안 사나? 박 하나 사라."

이 더운데 수박도 아닌 무거운 박을 어떻게 들고 가느냐고 말하고 싶지만, 할머니들이 부르니 걸음을 안 멈출 수 없다.

"할머니, 난 박을 그냥 줘도 요리해 먹을 줄 몰라요. 다음에 살게요."


지나다닐 때마다 사나른 채소를 다 먹지 못해 버려야 하는 판국에 박 요리는 해 본 적도 없어 능청을 떠니, "내가 박 껍질을 다 깎아 주고 요리하는 법도 가르쳐 줄 테니 걱정 말구 하나 사라구"라고 하신다.

채 대답도 하기 전에 할머니의 칼에 박 껍질이 벗겨지기 시작한다. 박 껍질을 벗기는 할머니의 칼날이 너무 무뎌서 껍질이 벗겨지지 않아 애를 먹는다. 왠지 가슴이 두근거린다. 혹시 저 박 속에서 흥부처럼 황금이 쏟아진다면? 저 박은 할머니 박인가, 내가 산 박인가?


엉뚱한 상상은 나래를 펴고, 할머니들은 "요즘 젊은 사람들은 정말 박을 몰라. 박이 얼마나 시원한데, 채를 썰어 조개 넣고 기름에 볶아 봐. 얼마나 반찬으로 좋은데…." 빈정거림인지 나무람인지 중얼거리신다.

둥근 박은 세상을 밝게 다스린다는 상징

a 박껍질 벗기는 할머니들

박껍질 벗기는 할머니들 ⓒ 송유미

신라 시조 박혁거세는 박 같은 알에서 나왔다 하여 성을 박(朴)이라고 했고, 그리고 백마가 그 알 옆에서 절하는 형상을 하다가 하늘로 올라갔다. 알에서 나온 동자를 목욕시키니 몸에서 광채가 나고 천지가 진동하며 일월이 청명하였다 하여, 혁거세왕이라고 이름 한다는 것을 모두 알고 있다.

우리 무속에는 무당이 굿을 할 때 박으로 만든 바가지를 마루에 엎어 놓고 두 손으로 마루를 문질러 소리를 내거나 장대 끝에 바가지를 매어 두면 병이 신기하게 사라진다고 믿는다. 사람이 죽으면 사자밥을 문전에 베풀어 놓고, 전염병이 돌면 잡귀가 먹고 멀리 가게 하기 위해 밥과 음식, 짚신을 큰길 삼거리에 놓아둔다. 이때에도 꼭 바가지를 함께 놓거나 음식을 바가지에 담아서 놓아둔다.

가을날 초가지붕에 박이 주렁주렁 얹힌 모습에서 풍요와 다산을 느낄 수 있다. 농경사회에서 박과 바가지는 중요한 생활용품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바가지를 쓰는 집이 없고 장식품으로도 이제 귀한 것이 됐다.

불교에서 박은 세상의 목탁이다. 원효는 파계하여 요석궁 공주와 사이에 설총을 낳은 후, 우연히 광대로부터 무롱(舞弄)하는 큰 박을 얻었는데 그 형상이 기괴하였다고 한다. 원효는 이 무애호를 두드리며 노래를 지어 부르면서 수많은 촌락을 춤추며 돌아다녔다. 그리하여 가난하고 몽매한 백성을 깨우쳐 부처의 이름을 기억하고 염불케 한 교화의 큰 힘을 나타냈다고 한다. 그러니까 무애호(박)는 바른 삶으로 인도하는 목탁을 상징한다.

고무함지 이고 돌아가는 할머니의 남은 박이 흥부 박일까?

a 굴러온 복을 차는 건 아닌가?

굴러온 복을 차는 건 아닌가? ⓒ 송유미

열심히 힘들게 껍질까지 벗긴, 하얀 박값은 천원짜리 두 장이란다. 무게에 비해 도무지 값이 나가지 않는다. 땡볕에서 흘린 땀의 수고비도 나오지 않을 복덩이 같은 박 한덩이 사들고 돌아서는 발걸음은 무겁지 않다.

할머니들의 박보다 하얀 마음씨 때문에 오늘 저녁 반찬은 소고기를 총총 다져 썬 박국과 초고추장을 넣어서 버무린 박나물과 조개를 넣어서 볶은 박나물 등 하얀 박으로 넘쳐 나겠다.

혹시 모른다. 오늘 할머니들이 채 팔지 못하고 다시 고무함지에 이고가는 둥근 달처럼 생긴 하나 남은 박이 혹시 흥부의 축복된 박일지…. 나는 못내 아쉬운 듯 고개가 자꾸 돌아간다.

굴러들어 온 복을 차는 사람과 굴러들어 온 복을 느끼지 못하고 살아가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면, 나는 어느 쪽일까. 새삼 복이란 할머니들의 마음처럼 순수하고 깨끗한 마음속에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혼탁한 이 세상과 상관없이, 저 혼자 굴러다니는 지붕 위에 달덩이 같은 둥근 박 속에서 오늘 밤은 하얀 박꽃보다 눈부신 달빛이 쏟아질 것인가. 그래서 이 푹푹 찌는 대낮의 땡볕은 박 속보다 더 하얀 것일까.

돌담을 끼고 황혼이 돌아 나간 외딴 오두막
호젓한 박꽃이 종이등같이 커지는 저녁
세월은 물처럼 흘러간다해서
물처럼은 되돌아 올 줄 모르고
백발이 들창 밖에서 애기처럼 보채니
수양버들 한사 싫어라 손을 젓는다
구름이 양떼 같이 내려오는 잔디밭에
내 토끼처럼 누워서 잠을 자고
꽃잎이 지는 호수에
어족처럼 쉬다가 가려오
- 이설주(李雪舟), '박꽃'
#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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