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를 원한다면 평화를 가르쳐야 한다

[편집자리뷰] 콜먼 맥카시의 <평화수업>

등록 2007.08.19 14:11수정 2007.08.19 1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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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평화수업 표지

평화수업 표지 ⓒ 책으로여는세상

평화를 싫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누구나 평화를 원하고 평화롭게 살려고 한다. 심지어 다른 사람을 향해 총을 쏘아대면서도 평화를 위해서 그렇게 한다고 말하기까지 한다.

유엔에는 여러 나라의 군인들이 모인 ‘평화 유지군’이 있다. 그런데 평화 유지군이라는 이 아름다운 이름의 군대는 아쉽게도 ‘평화’를 무기로 가지고 있지 않다. 대신 그들이 갖고 있는 무기는 총이다. 그들은 손에 총을 들고, 그 총을 누군가에게 들이대고, 필요하면 쏘기 까지 하면서 평화를 유지하는 임무를 해 내고 있다.


이 무슨 어이없는 모순인가? 누군가에게 총질을 해 대면서 유지해 나가는 그 평화는 도대체 누굴 위한 것인가? 그 총에 맞아 죽고 다치는 사람의 평화는 어디서 보상받고 위로 받을 수 있단 말인가?

총이라는 무기가 가지고 있는 일방성(한쪽에서 쏘면, 다른 쪽에서 죽거나 다치는)을 이해한다면, 총은 결코 평화를 유지하는 도구가 될 수 없다. 그래도 총이 평화를 유지할 수 있다고 고집한다면, 그것은 총을 든 자의 평화만 유지해줄 뿐이다. 하지만 그 평화는 진정한 평화라 할 수 없다. 총에 맞아 죽거나 다치는 쪽의 희생 위에 보장받게 되는 평화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평화라기보다는 오히려 폭력이며, 나아가 범죄 행위일 뿐이다.

다른 사람의 희생 위에 보장 받는 자신의 안락함이 사실은 폭력의 결과임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엉뚱하게 평화라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은 우리 사회가 평화에 대해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말로는 평화를 외치면서도 정작 평화가 무엇인지, 평화를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에 폭력과 범죄 행위를 평화라고 착각하고, 평화를 위해서는 폭력도 저지를 수 있다는 잘못된 생각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고 있는 것이다.

차라리 평화를 가르치고 싶습니다

제3세계에 대한 미국의 군사적 폭력을 정면으로 비판하는 글을 많이 썼던 워싱턴 포스트의 칼럼니스트인 콜먼 맥카시는 1982년 워싱턴 D.C에 있는 '담장 없는 학교'에서 일일 교사로 글쓰기 수업을 했다. '담장 없는 학교'는 일종의 진보적인 대안 고등학교였다. 수업을 마친 뒤, 콜먼 맥카시는 자신을 일일 교사로 초청해 준 교사에게 “오늘 아이들과 함께한 수업이 너무나 즐겁고 재미있었다”고 소감을 말했다. 그러자 그 교사는 “그렇게 좋았다면 다음 학기부터 정식으로 글쓰기 수업을 해 주시는 게 어떻겠습니까?”라고 말했다. 그런데 콜먼 맥카시는 엉뚱하게도 이런 대답을 했다.


“그보다는 차라리 평화를 가르치고 싶습니다.”

이렇게 해서 콜먼 맥카시는 1982년 가을학기부터 '담장 없는 학교'에서 ‘평화수업’이란 이름으로 폭력을 없애고, 갈등을 평화적으로 해결하는 방법에 대해 아이들과 함께 생각하고 토론하는 수업을 하기 시작했다. 그 수업은 점차 미국 전역의 고등학교와 대학교, 심지어 소년원과 교도소까지 퍼져 나갔다.


평화에 대한 무지 vs. 폭력에 대한 과잉 학습

콜먼 맥카시는 평화수업을 할 때 언제나 재미있는 퀴즈로 시작한다. 그가 즐겨 내는 퀴즈는 몇 가지가 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100달러짜리 퀴즈’다. 그의 지갑에는 언제나 빳빳한 100달러 지폐가 한 장 들어 있고, 그는 수업을 시작하면서 그 지폐를 책상 위에 올려놓는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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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러스트 서윤석

“지금부터 내가 말하는 6명의 이름을 모두 알아맞히는 사람에게는 이 돈을 드리겠습니다.”

학생들은 잔뜩 호기심 어린 얼굴로 서로를 쳐다보기 시작한다. 그러면 콜먼 맥카시는 6명의 이름을 이야기 한다. 그런데 학생들 대부분은 앞의 3명은 잘 아는데, 뒤의 3명은 전혀 모르는 경우가 많다.

콜먼 맥카시가 말하는 6명 가운데 앞의 3명은 대부분 전쟁영웅이다. 평화를 위한다며 총과 칼로 다른 사람을 죽이는데 앞장섰던 사람들로, 사실은 평화를 깨트리는데 앞장섰던 사람들이다. 예컨데 이런 사람들이다. 로버트 리(미국 시민전쟁에서 남군을 지휘했던 장군), 율리시스 그랜트(미국 남북전쟁에서 북군을 지휘했던 장군), 노만 슈워츠코프(걸프전을 승리로 이끈 장군).

반면 뒤의 3명은 비폭력적으로 참된 평화를 위해 노력한 사람들이다. 예컨대 저넷 랭킨(반전 평화주의자. 미국 최초의 여성 하원의원, 2차 세계대전 참전에 유일하게 반대표를 던진 사람), 도로시 데이(가톨릭 노동 운동의 선구자로 노동자의 어머니라 부름), 조디 윌리엄스(평화운동가. 국제지뢰금지운동으로 1997년 노벨평화상 받음) 같은 사람이다

그런데 학생들은 전쟁 영웅에 대해는 너무나 잘 알면서 평화를 위해 노력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잘 몰랐다.

이 책은 미국 학생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우리나라 학생들도 예외가 아니다.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김유신 장군이나 을지문덕, 이순신 장군처럼 나라를 구하기 위해 군대를 일으키고, 전쟁에 나가 싸운 사람들에 대해 과잉학습을 한다. 그 결과 그들의 ‘폭력 행위’는 나라를 위한 위대한 정의가 되고, 그것은 곧바로 평화를 이룩한 밑거름이 되고 말았다.

그런 교육을 받으면서, 아이들은 자신도 모르게 폭력이 정당한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내가, 그리고 우리 가족이, 우리 동네가, 우리나라가 잘 되기 위해서는 필요하다면 폭력을 쓸 수도 있다고 생각 하고 말았다. 그때 사용하는 폭력은 정당하고 정의로운 것이며, 그것이 평화를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고 말았다. 평화에 대한 비뚤어진 생각을 갖게 되는 출발점이었던 셈이다.

평화를 가르치지 않으면 평화는 점점 더 멀어질 것이다

우리가 책을 읽을 수 있는 이유는 글자를 배웠기 때문이다. 돈 계산을 할 수 있는 것은 산수를 배웠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평화롭게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당연히 평화롭게 사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평화를 배우기 위해서는 누군가, 어디선가 평화를 가르쳐야 한다. 그런데 평화를 가르칠 수 있는 가장 좋은 조건을 갖고 있는 학교에서는 평화를 가르치지 않는다. 평화를 가르치기보다 오히려 폭력을 가르치는 경우가 더 많을 때도 있다. 그리고 폭력의 좋은 자양분이 될 수 있는 경쟁을 더 가르치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아이들이 평화롭지 못하고 폭력적으로 자란다고 개탄하기도 한다.

이제라도 늦지 않다. 초·중·고등학교는 물론이고, 유치원에서 대학교까지 평화를 가르쳐야 한다. 그 어떤 실용적인 학문보다 더 실용적이고 필요한 것이 평화롭게 살 수 있는 기술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콜먼 맥카시가 쓴 <평화수업>은 우리 모두를 반성하게 하고, 재촉하게 한다. 어서 평화를 가르치라고.

덧붙이는 글 | <평화수업>을 기획하고 진행한 편집자입니다

덧붙이는 글 <평화수업>을 기획하고 진행한 편집자입니다

비폭력 평화수업

콜먼 맥카시 지음, 이철우 옮김,
책으로여는세상, 2013


#평화 #비폭력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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