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G3@칠흑같이 어두운 밤하늘에 별이 총총 떠오르면 누구나 동화작가가 되곤 합니다. 여기 저기 손가락을 가리키며 '이것은 북두칠성이네, 저것은 물병자리네' 하며 그것에 얽힌 작은 추억들을 이야기 하곤 합니다. 거기에 잠시 별똥별이라도 하나 떨어지면 두 손을 마주잡고 소원을 빌기까지 하지요. 그런데 인간의 욕망이 거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밤하늘을 더욱 아름답게 꾸미기 위해 불꽃놀이라는 것을 만들어 별보다 더 반짝이는 그림을 그리기도 합니다. 물론 이런 불꽃놀이는 비단 오늘날만 했었던 것이 아니고, 화약이 발명되고 나서는 세시풍속에도 들어갈 정도로 전통시대에도 보편화된 놀이로 정착되었습니다. 특히 조선의 불꽃놀이 실력은 중국과 일본의 사신들까지도 감탄할 정도로 대단했다고 하는데 그 이야기 속으로 잠시 들어가 볼까 합니다.불꽃놀이로 주변국들의 기를 죽이다 모두들 알다시피, 우리나라의 화약기술은 고려시대 때 최무선의 노력으로 체계화되었습니다. 최무선은 화약의 주원료인 초석의 채취기술을 중국에서 익혀 온 후 우리나라 최초의 화약무기 연구기관인 화통도감을 설치하고 화약의 대량생산과 각종 화약무기를 개발하였습니다. 이후 자신의 아들인 최해산에게 화약의 비법을 전수해서 조선의 군사력 강화에 많은 도움을 줬습니다. 이렇게 군사목적으로 만들어진 화약은 조선 초기에 큰 전쟁이 발생하지 않으면서 불꽃놀이로도 발전하였는데, 그 처음 사용 목적은 다름 아닌 '기죽이기 작전' 이었습니다. 비록 조선이 개국을 했지만, 북방의 야인들이나 일본의 왜구들은 아직 조선이라는 국가의 힘을 느껴보지 못한 상태였기에 뭔가 확실한 것을 보여주고자 택한 것이 바로 불꽃놀이라는 것입니다. 대표적으로 정종 1년(1399년)의 기록을 살펴보면, 일본국의 사신들이 조선에 오자 당시 화약무기를 담당하던 기관인 군기감(軍器監)에서 불꽃놀이를 보여 줬는데 일본 사신들이 입이 떡하니 벌어지면서 그 모습에 감탄하였습니다. 당시 그들의 말을 들어보면 '이것은 사람의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천신(天神)이 시켜서 그런 것이다'라고 이야기 할 정도로 그들이 받은 문화충격은 상상초월이었습니다. 물론 북방의 야인들도 해마다 한양에 사신들로 왔었는데 그들 또한 조선의 불꽃놀이를 보면서 속이 많이 쪼그라들었습니다. 특히 그냥 일반적인 형태의 불꽃이 아닌 화산붕(火山棚)의 경우는 하나의 붕(棚)마다 염초(焰硝)를 설치하여 불을 붙이는데, 불꽃이 별똥별처럼 하늘을 가르고, 우레와 같은 소리를 내어 더욱 놀라게 하였습니다.중국의 사신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IMG1@조선시대 이전부터 중국은 화약무기에 대한 최고의 기술을 보유해서 조선에도 전파할 정도로 그들의 자부심은 대단했습니다. 그래서 조선에 온 사신들조차 웬만한 것은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조선의 불꽃놀이가 화염(火焰)이 하늘에 치솟고 폭음이 궁궐전체를 압도할 정도로 대단하자 중국 사신들도 본국에서는 본적이 없는 기이한 광경이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상황이 이 정도가 되니 주변국에서 조선의 화약기술에 대한 깊은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화약기술은 군사기밀에 해당하는 것이기 때문에 화약을 만드는 방법을 함부로 누설하거나 화약무기를 국외로 빼돌리면 극형에 쳐해 졌습니다. 그래서 조선에서는 중국사신이 올 때에는 아예 불꽃놀이를 하지 말자라는 주장이 펼쳐지기도 했습니다. 특히 세종 때에는 화약기술이 급속도 발전하면서 이미 중국의 화약기술을 능가했기에 이러한 주장은 설득력을 얻었습니다. 당시 예조판서였던 허조(許稠)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화약이 한정이 있는데 한 붕에 허비되는 것이 매우 많습니다. 더구나, 본국의 불을 쏘는 것의 맹렬함이 중국보다도 나으니 사신에게 이를 보여서는 안 됩니다. 저들이 비록 청하더라도 마땅히 이를 보이지 마십시오." - <세종실록 54권, 세종 13년 10월 병오>이처럼 화약에 대한 것은 곧 군사적 목적으로 변형가능 하기에 금비책의 일환으로 보여주지 말자는 의견이 적극적으로 개진 될 정도로 조선의 화약기술은 당대 최고였습니다. 성종, 불꽃놀이에 푹 빠지다조선시대 임금들 중 불꽃놀이를 가장 좋아했던 임금은 다름 아닌 성종이었습니다. 특히 성종은 연말과 연초가 되면 불꽃놀이를 너무 자주 봐서 이를 빌미로 신하들에게 지탄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심지어 성종 8년 12월에는 불꽃놀이를 위해 화약을 준비하던 화약고(火藥庫)의 제약청(製藥廳)에 화재가 나서 4명이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2명이 화상을 입은 대형사고가 났지만 성종은 '쌀 6석과 황두(黃豆) 8석을 내려 주어라'고 대충 수습을 하는 둥 마는 둥 하다가 다시 불꽃놀이를 하겠다고 나섭니다. 이때 대신들 중 윤사흔·김국광·강희맹·이계손 등이 궁궐에서 펼쳐지는 불꽃놀이를 그만 하자고 하고, 사헌부 대사헌 이계손이 강력한 상소문을 올렸는데 그 내용을 보면 이렀습니다. "화산대(火山臺)는 진실로 적을 막는 기구도 아니고, 백성을 이롭게 하는 재물도 아닌데, 소비하는 것이 적지 아니하고, 또, 놀이에 가까우니, 비록 큰 재앙이 없다 하더라도 오히려 할 만한 것이 못됩니다. 하물며 지금 사상자가 많으니, 이는 진실로 큰 재앙입니다."그러나 성종은 불꽃놀이를 하고픈 마음이 너무 간절했는지 "이것은 군무(軍務)에 관계되는 일인데, 놀이라고 해도 되겠는가? 만약에 놀이를 하려고 한다면, 어찌 다른 놀이가 없어서 꼭 화희(火戲)를 하려고 하겠는가?"라고 먼저 말하고 불꽃놀이를 그대로 진행시켰습니다. 며칠 후 또 다시 신하들이 들고 일어나 제발 불꽃놀이는 그만하자고 청을 올리니 이번에는 궁색하게도 귀신을 쫓는 의미로 해야 한다고 강력 주장했고 그대로 진행되었습니다. 당시 성종이 남긴 궁색한 변명을 들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화산대를 설치한 것은 비록 유희에 가깝다. 그러나 역시 군대와 나라의 중대한 일이며, 나례를 구경하고 역귀를 쫓는 것이 비록 유희의 일이라고 하나 모두 재앙을 없애고 사귀(邪鬼)를 물리치기 위한 것들인데, 비록 성변(星變)이나 천둥 번개가 있었다고 한들 어찌 그로 말미암은 것이겠는가?" - <성종실록 248권, 성종 21년 12월 신미>이렇듯 성종의 불꽃놀이 사랑은 계속되었고 이후 새해 3월까지 궁궐의 하늘은 불꽃놀이로 채워졌습니다. 불꽃놀이 기구를 어떻게 설치했을까?@IMG2@이렇듯 화려한 불꽃놀이를 유심히 살펴본 사람이 있으니, 그 사람은 다름 아닌 이규경(李圭景)이었습니다. 그는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를 남긴 이덕무의 손자로 그 할아버지처럼 박학다식함에 있어서는 조선 최고를 자부하였습니다. 이규경이 쓴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 불꽃놀이에 관한 이야기도 자세하게 기록하였는데, 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설치하는 법은 다음과 같다. 두꺼운 종이로 포통(砲筒)을 단단히 싸고 포통 속에 유황(硫黃)·염초(焰硝)·반묘(班猫)·유탄(柳炭) 등의 재료를 쟁여 단단히 봉한 다음 그 끝에 불을 붙이면 잠깐 사이에 연기가 나면서 불이 번져 포통과 종이가 모두 폭파되고 그 굉음이 천지를 진동시킨다. 그리고 이보다 먼저 땅 속에 화시(火矢)를 묻어 놓는데, 그 불빛이 먼 산까지 비추어서 천만 개의 화시처럼 보인다. 즉 화시에 불을 붙이면 화시가 수없이 뽑혀 공중을 향해 날면서 폭파되는 대로 굉음이 나는데, 그 모양이 허공에 가득 찬 유성(流星)과도 같다. 또 긴 장대 수십 개를 원중(苑中)에 세우고 장대 머리에는 조그만 포대(包袋)를 설치한다. 그리고 어전(御前)에 채롱(綵籠)을 달고 채롱 밑 부분에 긴 밧줄을 달아 여러 장대와 연결하여 가로 세로 연관시킨 다음, 밧줄 머리마다 화시(火矢)를 설치하고 군기시정(軍器寺正)이 부싯깃에 불을 붙여 채롱 속에 넣으면 잠깐 사이에 불이 일어나 밧줄에 붙고 밧줄에서 곧 간대로 번지면서 간대 머리에 설치된 포대가 폭파되고, 불길은 마치 구르는 수레바퀴처럼 회전하면서 다시 밧줄을 타고 다른 간대로 번져간다." - <오주연문장전산고 경사편 5, 논사류 2>이렇듯 땅에 묻어 놓고 연속적으로 폭발하는 것과 긴 장대에 매달아 놓은 것이 연속적으로 폭발하는 방식 두 가지의 불꽃놀이가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특히 화선을 하나로 해서 연결되어 지뢰처럼 터지는 불꽃놀이의 경우는 매화법(埋火法)이라는 방어무기로도 변형되어 사용되기도 하였습니다. 이 밖에도 성산화(星散火)라는 불꽃놀이의 경우는 요즘 볼 수 있는 하늘에 수를 놓는 불꽃놀이와 비슷한 형태이며, 화포에 장착해서 쏘아 전시에도 신호용으로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불꽃놀이를 바라보며 역사에 '만약에'라는 말이 있다면 정말 하고 싶은 말이 하나 있습니다. 만약에 조선이 건국초기의 강력한 군사력과 화약무기 기술을 그대로 발전시켰더라면 조선이라는 500년생 거목은 결코 스러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늘 밤하늘의 별보다 환한 불꽃놀이를 바라보며 진한 역사의 추억을 되새겨 봅니다.
덧붙이는 글 | 최형국 기자는 중앙대 대학원 사학과 박사(전쟁사/무예사 전공)를 수료하고 현재 무예24기보존회 시범단 단장을 맡고 있습니다. 무예 홈페이지 http://muye24ki.com 를 운영합니다.
2007.08.20 20:05 | ⓒ 2007 OhmyNew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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