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한 휴가>를 보고 한 친구를 떠올렸다

"사람을 더 죽였어야 혀"라고 말한 한 정보과 형사

등록 2007.08.21 10:46수정 2007.08.21 1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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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화려한 휴가> 포스터
<화려한 휴가> 포스터㈜기획시대
지난 18일(토요일)은 우리 가족에게 오래 기억되는 날이 될 것 같다. 가족이 함께 서산의 영화관을 찾아 요즘 한창 화제가 되고 있는 국산 영화 <화려한 휴가>를 보았기 때문이다.

현재 대학 2년인 딸아이가 고등학생이던 지난 2004년 5월 5일 천안에서 외국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그리스도의 수난)>를 본 후로 오랜만에 가족이 함께 영화관을 찾은 것이었다. 우리 부부와 딸아이와 고2인 아들녀석, 그리고 중2인 조카녀석이 함께 했다. 어머니는 "나 같은 늙은이가 영화를 봐서 뭘 하느냐"며 사양을 하셨고, 올해 초4인 조카딸은 '관람불가' 대상이라 제외되어 아쉽긴 하지만….

우리 부부는 처음부터 그 영화에 관심이 많았다. 우리 부부는 적어도 '화려한 휴가'라는 '가치전도'를 함유하고 있는 그 말이 언제 어디서부터 비롯되었고, 무엇을 가리키는 말인지를 일찍부터 헤아리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비록 저 1980년을 피로 물들인 신 군부세력, 전두환의 사병(私兵)이나 다름없었던 공수부대를 앞세운 '반란군'의 만행을 직접 몸으로 겪지는 않았지만, 오랜 세월 '간접 경험'의 범주 안에서 한숨쉬며 살아온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영화를 내 아이들이 먼저 보고 싶어했다. 적극적으로 '가족 관람'을 제안했다. 나는 그런 아이들이 고마웠다. 진작부터 내 아이들에게 그 영화를 보여줘야 한다고 마음먹고 있던 참이었다. 그리하여 아들녀석과 조카녀석의 여름방학이 끝나기 이틀 전인 18일 오후 가족이 함께 서산의 영화관을 찾은 것이었다.

물론 가족 관람이니 오붓함이야 기본이지만, 거기에 즐거움은 함께 할 수 없었다. 나는 아이들에게 팝콘이나 음료수 따위를 일체 사주지 않았다. 그저 물병만 서너 개 가지고 들어갔을 뿐이다. 그리고 긴장된 마음으로 영화 상영을 기다렸다. 내 평생에 그렇게 무거운 긴장감을 안고 영화 상영을 기다린 적은 처음일 것 같다.


영화를 보면서 처음에는 많이 웃었다. 그러나 그 '웃음'들은 엄청난 비극을 예고하는 것이었고, 관객 모두를 두려운 예감 속으로 몰아넣는 것이 아닐 수 없었다. 저 평범한 시민들의 소박한 웃음들이 광포한 권력의 힘에 얼마나 철저히 유린되고 파괴될 수 있는가를 절절히 예감하며 지레 몸을 떨어야 했다.

비탄과 한숨 속에서 여러 번 눈물을 닦아야 했다. 아내는 입 밖으로 탄식과 신음소리를 내곤 했다. 이윽고 영화가 끝났을 때 주위를 둘러보니 눈물 흘린 사람들이 많은 것 같았다. 어느 정도 나이든 사람들은 하나같이 슬픈 기색이었다. 젊은이들 중에는 오락 영화라도 본 듯이 시시덕거리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대개는 숙연하고도 무거운 표정이었다. 거기에서 나는 어떤 '공통분모'를 느끼는 기분이기도 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내 승합차 안에서 우리 가족은 영화 <화려한 휴가>와 관련하여 '국가정의/사회정의'에 대한 얘기를 나누었다. 20세기의 후반, 소위 민주국가라는 나라의 도시에서 벌건 대낮에 벌어진 그 엄청난 비극을 나는 지금도 이해할 길이 없다. 최정예부대라는 공수부대가 적군도 아닌 시민들을 상대로 대규모 작전을 벌이고 수많은 시민을 무차별 살상한 그 만행을 어떻게 잊을 수 있으며, 용서가 과연 가능한 것인가?

더욱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당시 지휘관들 중에서 최초 무차별 폭력 진압을 지시한 자와 발포를 명령한 자를 아직도 가려내지 못한 채, 반성과 참회를 표명한 자가 아직 아무도 없다는 사실, 그리고 시민을 학살한 만행의 공으로 서로 훈장들을 나누어 가진 군대 내 사조직의 '똥별'들이 지금도 태연한 표정으로 '내로라' 하며 살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오늘 '광주민주화운동'으로 정의되는 저 1980년 5월 광주의 비극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인 사건이다. 민주주의를 추구하고 국가정의와 사회정의를 갈망하는 모든 시민들이 다시 한번 그때의 광주를 돌아보며, 공분(公憤)의 탑을 쌓고, 이 정도까지 민주주의를 발전시킨 우리 국민의 원동력과 광주 시민의 희생에 숙연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 <화려한 휴가>는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여러 가지 아쉬움이 없지 않지만, 기념비적인 작품이 될 것임이 분명하다. '영화작가'의 존재가치를 분명하게 제시한 작품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2>

나는 위에서 '간접경험'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그 간접경험은 오늘도 '현재진행형'임을 실토한다. 나는 영화 <화려한 휴가>를 보고 나왔을 때 불현듯 한 친구를 떠올렸다. 그 친구도 이 영화를 한번 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과연 그 친구가 이 영화를 보려 할까? 만약 그가 이 영화를 본다면 그는 어떤 마음일까? 공연히 궁금해지는 마음이었다. 하지만 그 친구가 이 영화를 보는 것도, 영화를 본 다음 어떤 '변화의 마음'을 갖는 것도 사실은 기대할 수 없는 일일지도 모른다.

나는 그 친구가 경찰관 재직 시절에 그 친구와 세 번 정도 충돌을 했다. 처음 충돌한 때는 1987년 11월이다. 마흔의 나이로 그해 결혼한 내가 첫아이를 낳았을 때다. 또 태안 성당에서 '가톨릭농민회 태안분회'를 조직하고 분회장 노릇을 시작하던 때였다. 가톨릭농민회 태안분회 창립 기념으로 나는 당시 박연호 주임 신부님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어 가톨릭농민회 본부로부터 '광주' 관련 비디오 테이프를 입수하여 그것을 성당의 강당에서 '공개'하는 일을 실행했다.

사전에 그 정보를 입수한 경찰서 정보과 형사들의 전화가 귀찮을 정도였다. 급기야 두 형사가 우리 집을 방문하기까지 했다. 그들은 우리 집에 오면서 귤 한 상자와 분유 두 통을 사 가지고 왔는데, 그걸 거절 못하고 받은 생각을 하면 지금도 부끄러워지는 마음이다.

갑론을박 옥신각신 끝에 그 비디오 테이프 상영을 일반에게는 널리 알리지 않고 일부 신자들에게만 보여주는 것으로 타협을 보았는데, 그 과정에서 두 형사 중 선임자인 '그 친구'의 입에서 기가 막힌 말이 나왔다. 광주사태(그때는 일반적으로 '광주사태'라는 말을 사용했다) 관련 부분에서 그가 이런 말을 했다.

"광주사태 때 사람이 덜 죽어서 문제가 된 겨. 사람을 더 죽였어야 혀. 내가 진압부대 사령관이었다면 더 죽였을 겨."

영화 <화려한 휴가>에서 공수부대원들이 폭행을 당한 광주시민들을 끌고 가고 있다
영화 <화려한 휴가>에서 공수부대원들이 폭행을 당한 광주시민들을 끌고 가고 있다㈜기획시대
그 말을 내 아내도 듣고 어머니도 들었다. 나는 너무도 기가 막혀서 할 말을 찾지 못하다가 "나보고 당신 고발을 하라는 거여, 뭐여?"했더니, "고발할 테면 하라!"고 했다. 피차 격앙되고 험악해진 분위기였는데 동석을 한 오모 형사가 중재를 해서 수습이 되었고, 잠시 후 그들은 '별일 없이' 우리 집을 떠났다.

그 날 밤 나는 나 자신의 무력감이 한없이 괴롭고 참담하여 잠을 못 이루며 눈물을 삼켜야 했다.

다음날 오모 형사의 전화를 받았을 때 나는 그에게 '그 친구'의 망발을 상기시키며 "당신도 그렇게 생각하느냐?"고 묻고, "내가 그 친구를 고발해도 괜찮겠느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그는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고발을 하지 말아달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내가 그 친구를 고발하면 당신도 곤란해질 테니, 당신을 생각해서 고발은 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 후로 나는 그 친구를 보기만 하면 우리 집 거실에서 들었던 그 날의 그 망발이 절로 떠오르곤 했다. 그 날의 그 난폭한 말은 내 뇌리에 깊고도 선명하게 각인이 되고 말았는데, 정말 평생 잊을 수 없는 더럽고도 슬픈 기억이지 싶다.

그 친구와의 두 번째 충돌은 1989년 1월에 있었다. 서울대생 고(故) 박종철씨 추모미사가 해미 성당에서 있은 날이었다. 나는 검은 양복에 검은 넥타이를 매고 그 미사에 참례했다.

그런데 내가 해미 성당에 도착하니 먼저 와 있던 그 친구가 검은 넥타이를 맨 나를 보더니 인사 한마디 나눌 것도 없이 대뜸 "누구 죽었어?"라고 비아냥거리는 소리로 묻는 것이었다. 나는 순간 벌컥 화를 내었다. "아니, 정보과 형사가 그것도 모르고, 지금 그걸 나한테 묻는 거여?" 그러자 그는 실실 웃으며 자리를 피했다.

1991년에 발생한 세 번째 '재미있는' 충돌도 있지만, 글이 길어지고 있으므로 그 세 번째 충돌은 소개를 생략하기로 한다.

<3>

지난 2005년 10월 나는 평양을 다녀왔다. 천주교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는 대북 지원단체 '평화3000'의 일원으로 평양에 가서 '아리랑축전'도 보고 묘향산도 보고 왔다. 그리고 '평양방문기'를 원고지 200매 정도로 자세히 써서 <오마이뉴스>에도 여러 번 나누어 올리고, 고장의 문학지인 <태안문학>에 전재를 하기도 했다.

그것을 그 친구는 대단히 못마땅해 했다. 여기저기 다니면서 나에 대한 반감을 표시하곤 했는데, 그 친구가 한 말들 중에 하나는 "평양에 가는 것들은 모두 빨갱이 사상을 가진 놈들이여!"라는 것이었다. 결국 나는 그 친구에게는 '빨갱이'인 셈이었다.

혹여 그 친구가 이 글을 보면 어떻게 반응할까 걱정이 없지 않지만, 내가 나쁜 짓을 하고 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 친구의 '신념'들을 소개한 것으로 생각한다. 광주 관련 이야기든, 5공 정권의 고문으로 죽은 박종철 민주열사 관련 얘기든, '빨갱이 타령'이든 그런 것들은 모두 그 친구가 자신의 '신념'으로 한 말들일 터였다.

자신의 신념을 그가 그렇게 표현했고, 그 신념들을 내가 글로 옮겼으니, 조금도 부끄럽거나 화나는 일은 아닐 터이다. 그런데 세상 일이란 참으로 묘해서, 자신이 분명 확실하게 표현한 신념이나 가치관을 내가 글로 옮겼을 경우 그것을 보고 화를 내거나 격분하는 사람들을 여럿 보았다. 내가 전혀 어떤 주석을 달지도 않고, 이름도 밝히지 않고, 들은 얘기 그대로 소개를 했는데도 말이다. 자신의 견해나 신념을 소개해주었는데도 화를 내다니, 나로서는 정말이지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다. 그래서 실은 이번에도 걱정이 많다.

하지만 더 큰 걱정은 그 친구의 '변함 없는 마음'이다. 그 친구도 오늘 가능하면 가족과 함께 영화 <화려한 휴가>를 보았으면 싶은데, 그리고 영화를 보면서 마음의 변화를 얻었으면 싶은데, 그게 과연 가능한 일일지를 생각하면 지레 이상한 절망감이 커지는 것 같고, 더욱 슬퍼질 것만 같다.

그 친구가 1987년 11월 어느 날 우리 집에서 내뱉은 자신의 말을 오늘 기억할지는 모르지만, 기억할 수 있다면 자신의 그 말도 한번 떠올려 보면서, 영화 <화려한 휴가>를 꼭 한번 보았으면 싶다. 보지도 않고 이런저런 말을 하고 다니기에 앞서, 일단 보고 나서 무슨 말이든 했으면 싶다. 영화 <화려한 휴가>를 보고 나서, 불현듯 그 친구를 떠올린 내가 그 친구에 대해 갖는 이상하고도 절절한 소망이다.
#화려한 휴가 #5·18 #정보과 #형사 #박종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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