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토끼와 박쥐가 나타났다

동물들도 같이 사는 보리소골

등록 2007.08.24 09:03수정 2007.08.24 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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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안개 자욱한 보리소골 풍경

안개 자욱한 보리소골 풍경 ⓒ 최성수

새벽이면 자욱하게 안개가 피어올랐다. 안개는 건너편 산 중턱에도, 집 뒤 첩첩 산자락에도, 골짜기 입구로 늘어선 산봉우리들에도 내려앉아 있다. 여름 내내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씨가 이어지더니, 어쩌다 아침이 맑은 날에는 어김없이 안개가 산을 휘감는 아름다운 풍경을 펼쳐 보인다.


a 올 여름은 비가 잦고 안개도 자주 끼었다. 어디 먼 다른 세상에 와 있는 것 같았다.

올 여름은 비가 잦고 안개도 자주 끼었다. 어디 먼 다른 세상에 와 있는 것 같았다. ⓒ 최성수

"오늘 점심은 순대국이나 먹으러 갈까?"

내 말에 늦둥이 진형이 녀석이 반색이다. 방학 내내 골짜기에 틀어박혀 책 읽고, 모래 장난하고, 가끔은 밭에 나와 내 일손을 도와주던 녀석이니 외식하자는 말이 너무 반가웠나보다.

이웃 골짜기에 사는 부모님을 모시고 강림 순대국집에서 오랜만에 포식을 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여전히 날씨는 꾸물꾸물했고, 금방이라도 비가 퍼부을 것 같았다. 보리소골 초입으로 들어오는 길도 온통 물기에 젖어 있다.

아직 비포장이라서 천천히 차를 몰 수밖에 없는 길이다. 더구나 연일 계속되는 비에 길이 파여 다른 때보다도 더 조심스럽다. 길가로는 억새들이 사람 키보다도 크게 자라, 제 몸을 가누지 못하고 길을 향해 축축 늘어졌다. 차는 그런 억새를 몸으로 툭툭 치며 천천히 지나간다.

참나리꽃이 억새 틈에서 비쭉 자라 꽃을 피우더니, 길가로 휘어진 곳도 있다. 차가 지나갈 때마다 참나리꽃은 차에 부딪쳐 몸을 부르르 떠는 것 같다.


"쟤는 어쩌다 저기 피어 몸살이래요?"

아내가 차창에 부딪치는 나리꽃을 보며 안쓰럽다는 듯 한마디 한다. 차가 막 억새 수풀을 휘돌아 지날 때였다. 갑자기 아내가 소리를 지른다.


"저기, 저것 토끼잖아."
"어, 정말 토끼네."

a 이 토끼가 작년의 스마일 토끼일까?

이 토끼가 작년의 스마일 토끼일까? ⓒ 최성수

진형이 녀석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맞장구다. 얼른 차를 멈추고 보니 억새풀이 늘어진 길 가운데 토끼 한 마리가 동그마니 앉아 있다. 비포장 길이라 차 소리가 제법 요란했을텐데도 녀석은 오불관언, 길 가운데서 비킬 생각을 하지 않는다. 마치 그 길이 자신의 영역이라는 표정이다.

나는 얼른 카메라를 꺼내 최대한 줌을 당겨 사진을 찍는다. 차 창문을 내리고 고개를 길게 빼고 카메라를 내밀어도 녀석은 마치 포즈를 취해 주는 것처럼 움직이지 않는다. 몇 장 찍고 난 뒤, 차 문을 살살 열고 나가 조금 더 다가가자, 그제야 녀석은 뒤돌아서더니 깡충깡충 뛰어 숲 속으로 사라진다.

"아빠, 저 토끼가 작년 그 스마일 토끼 아닐까요?"

산토끼가 사라진 숲속을 바라보며 진형이가 아쉬운 표정으로 말을 한다.

작년 여름의 일이었다. 어둑어둑할 무렵 보리소골 골짜기로 들어서는데, 길 가운데 토끼 한 마리가 앉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자동차 불빛이 제법 눈부실 텐데도 길을 가로막고 있는 것처럼 눈을 말똥말똥 뜬 채였다.

"카메라 좀 꺼내 줘요, 얼른."
늘 운전석 옆 서랍에 넣어두는 카메라가 생각나 아내에게 재촉을 했다. 그런데 내 말에 옆자리에 타고 있던 아내는 뭔 소리냐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카메라는 큰 애 배낭여행 가는 데 줬잖아요."

아, 그렇지. 그제야 나는 내게 카메라가 없다는 것을 생각해냈다. 그럼 어떡한다, 내가 난감한 표정으로 토끼를 바라보고 있는데, 뒷자리에 타고 있는 늦둥이 진형이가 종알거렸다.

"아빠, 새로 산 핸드폰에 카메라 있잖아요."

오랫동안 쓰던 휴대폰이 잘 작동되지 않아 며칠 전에 새로 샀는데, 거기 카메라가 있다는 생각을 미처 못 했는데, 새 휴대폰에 관심이 많은 진형이가 그 생각을 해낸 것이다. 나는 얼른 휴대폰을 꺼내 촬영 모드를 선택하고 토끼를 향해 셔터를 눌렀다. 그때까지도 토끼는 길 가운데에서 자동차 불빛을 온 몸으로 받아내며, 귀까지 쫑긋 세운 채 앉아 있었다. 마치 사진을 찍어달라고 재촉하듯 포즈를 취하고 있는 것 같았다.

"스마일"
내가 셔터를 누르자 플래시가 터지면서 '찰칵' 소리가 갑자기 울렸다. 그러고는 조금 시간차를 두고 사진이 찍혔다. 잘 앉아 있던 토끼는 '스마일' 소리에 깜짝 놀라 폴짝폴짝 뛰어 풀숲으로 사라졌다.

휴대폰 화면에는 귀를 세우고 의젓하게 앉아 있는 토끼의 형상이 잘 잡혀 있었다.
"우와, 산토끼 찍었다."
나는 환호성을 지르며 얼른 휴대폰을 닫았다.
"어디 나도 보여줘요."
뒷자리의 진형이가 고개를 앞으로 내밀고 보여 달라고 재촉을 했다. 나는 다시 카메라를 열고 토끼 사진을 찾았다. 그러나 어디에도 토끼 사진이 들어 있지 않았다.

"아, 저장을 안 했구나."
처음 써 본 휴대폰 카메라라 그냥 디지털 카메라처럼 찍으면 다 되는 줄 안 것이 문제였다. 저장을 해야 찍은 사진이 보관되는데, 그냥 닫아버렸으니 사진이 남아 있을 리가 없었다.

그날 이후로 우리는 토끼가 있던 길을 지날 때마다 '오늘은 스마일 토끼가 안 나왔을까?', '우리 모델 토끼는 어디로 갔을까?' 하는 말을 하곤 했다.

그렇게 일 년이 지나고, 다시 토끼를 만나 이번에는 사진까지 찍은 것이다. 물론 오늘 찍은 토끼가 작년의 그 스마일 토끼인지 알 길이 없다. 털색이 같긴 했지만 말이다.

하여튼 일 년만에 산토끼 사진을 찍은 우리는 신이 나서 집으로 돌아왔다. 골짜기 속에 우두커니 자리 잡고 있는 우리 집이 그날따라 더 아늑해 보인 것은, 아마도 길에서 만난 토끼에 대한 기억이 새록새록 피어났기 때문일 것이다.

a 밤중에 방으로 들어왔던 박쥐

밤중에 방으로 들어왔던 박쥐 ⓒ 최성수


a 아침이 될 때까지 창 틈에 갇혀 있던 박쥐는 툭 치자 숲 속으로 푸드득 날아갔다.

아침이 될 때까지 창 틈에 갇혀 있던 박쥐는 툭 치자 숲 속으로 푸드득 날아갔다. ⓒ 최성수

보리소골에는 온갖 짐승들이 많이 산다. 아침이면 술 덜 깬 어느 누가 구토하는 것 같은 소리가 날 때도 있다. 마당가에 나가 보면 앞산이나 뒷산에서 나는 고라니 울음소리다. 몇 해 전에는 마당가에 와서 우리를 쳐다보던 너구리도 있었다.

방학 중 하루는 밤중에 방 안에서 날갯짓 하는 소리가 나 불을 켜고 보니 박쥐였다. 어떻게 들어왔는지 박쥐 한 마리가 퍼덕거리며 내는 소리였던 것이다. 창문을 열고 내보냈다고 생각했는데, 아침에 창 틈 사이의 공간에서 죽은 듯 엎드려 있었다. 바깥쪽 창문을 열고 툭 건드리자 박쥐는 날개를 펴고 숲 속으로 날아갔다.

사람이 드문 골짜기라고 해서 외롭지만은 않다는 것을, 풀이 있고 숲이 있는 곳에는 인간만이 사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지닌 숱한 존재들이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산토끼나 너구리, 박쥐같은 동물들이 우리 식구들에게 알려주는 것 같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여름, 등나무 그늘에 앉아 책을 읽다가 그런 생각을 하면 문득 마음이 더없이 푸근해지곤 한다.

이제 개학을 하면 진형이 녀석은 보리소골을 떠올리며 산토끼와 박쥐 이야기를 조잘댈 것이다. 녀석에게도 야생의 그 동물들을 만나는 것은 신비롭고 새로운 경험이었을 테니까 말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을 비롯한 저의 다른 글들은 제가 운영하는 카페 http://cafe.naver.com/borisogol.cafe 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을 비롯한 저의 다른 글들은 제가 운영하는 카페 http://cafe.naver.com/borisogol.cafe 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보리소골 #산토끼 #고라니 #박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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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장다리꽃같은 우리 아이들>, <작은 바람 하나로 시작된 우리 랑은>, <천년 전 같은 하루>, <꽃,꽃잎>, <물골, 그 집>, <람풍>등의 시집과 <비에 젖은 종이 비행기>, <꽃비> , <무지개 너머 1,230마일> 등의 소설, 여행기 <구름의 성, 운남>, <일생에 한 번은 몽골을 만나라> 등의 책을 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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