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이 그리워 쓴 시라도 김일성이 좋아했다면 유죄?"

[법정중계] 한홍구 교수가 법정에서 국가보안법을 씹다

등록 2007.08.24 20:06수정 2007.08.24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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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홍구 성공회대 교양학부 교수
한홍구 성공회대 교양학부 교수권우성
윤지영 변호사 "한시 '소무목양'이 이적표현물인가요? 북한 공산주의를 고무·찬양한 것으로 국가보안법을 위반한 것이라고 보시나요?"

한홍구 교수 "한시 '소무목양'은 한나라 사신이 흉노족에 갔다가 붙들린 뒤에 고향이 그리워서 쓴 시예요. 중국 민족주의자들 사이에서는 굉장히 인기가 있는 시죠. 애초 공산주의와는 무관한 시입니다. 다만, 김일성이 좋아했던 시죠. 그렇다고해서 '흉노족'이 이 시를 이적표현물로 볼까?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법정에 선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는 낮고 점잖은 목소리로 국가보안법을 날카롭게 씹었다. 세상에, 별 걸 다 트집잡네! 하는 투였다. 한 교수의 말끝에서는 '검찰이 오랑캐로 알려진 흉노족보다 못한 것은 아니야?' 하는 비판이 풀풀 새어나왔다. 한 교수의 날선 비판에 검사석에 앉은 검사의 표정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딱딱한 누룽지처럼 됐다.

한홍구 교수, 법정에서 국가보안법 비판

23일 오후 3시 10분 서울고등법원 303호. 한홍구 교수가 국보법 재판의 법정 증인석에 앉았다. 그럼 한홍구 교수가 '간첩'이 됐나고? 그건 아니다. 회합통신 및 이적표현물 소지 등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수감돼 재판을 받고 있는 강순정(76)씨측의 증언을 하기 위해서다. 도대체 뭘 얼마나 잘못했길래 공안검찰은 팔순을 바라보는 강 노인에게 이적표현물을 소지했다며 푸른 수의를 입혔을까.

한홍구 교수는 이날 작심하고 검찰의 국보법 적용에 조목조목 반론했다. 강 노인의 비디오·서류 등을 이적표현물로 지목한 검찰을 향해 '속사포'로 따졌다. 공안검찰이 얼토당토 않은 국보법 위반 혐의를 씌운 것에 대한 분노도 섞여 있었다.

강씨는 지난 1996년 간첩혐의로 구속·기소돼 4년 6개월을 선고받고 복역한 바 있다. 10년 뒤인 지난 1월에도 검찰은 강씨에게 간첩·찬양고무(이적표현물)·회합통신·편의제공 등 국보범 위반 혐의로 기소했으나, 1심 재판부(제23형사부)는 간첩 혐의와 이적표현물 일부 혐의에 대해 무죄판결을 내렸다. 현재 강씨는 회합통신·이적표현물 등에 대해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고 항소심을 진행 중이다.


<오마이뉴스>는 윤 변호사와 한 교수 간의 대담형식으로 진행된 약 1시간 분량의 증인심문을 그대로 지상중계한다. 정제된 기사로 정돈할 수도 있었지만, 생생한 법정의 현장감이 떨어질 것 같아 피한다. 독자 여러분도 제3자가 되어 판단해보시라. 팔순 가까운 강 노인에게 검찰이 씌운 혐의가 타당한 것인지.

다음은 윤 변호사와 한 교수의 일문일답이다.


- 다른 국보법 위반 사건과 비교해 볼 때 이번 사건의 특징은?
"지난 1996년 강순정 선생이 국보법 위반으로 구속·기소돼 실형을 선고받은 것과 똑같은 일이 반복되고 있다. 이미 파악된 사실들을 검찰이 각각 별건으로 분류해 또다시 문제를 제기했다."

- (강씨가 쓴) '김정일 60회 탄신 경하 충성 편지'가 이적표현물로 국보법 위반이라는 데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이적표현물'의 입법취지는 무엇이라고 보나?
"남북간 교류가 활발하게 이뤄지기 전에는 국보법 적용 대상이 다양했다. 간첩, 이적표현물, 고무·찬양 등은 남한 사람의 일반 정서에 어긋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적표현물이란 남한 대중을 대상으로 한 선전물을 단속하려는 것이 입법취지다. 북으로 전달한 것은 기밀, 회합통신, 간첩 등으로 걸어야 국보법 입법취지에 맞는 것이다."

- (강씨가 인용한) 한시 '소무목양'이 이적표현물인가? 북한 공산주의를 고무·찬양한 것으로 국가보안법을 위반한 것인가?
"'소무목양'은 한나라 사신이 흉노족에 갔다 붙들린 뒤 고향이 그리워 쓴 시다. 중국 민족주의자들 사이에 인기 있는 시다. 애초 공산주의와는 무관한 시다. 다만, 김일성이 빨치산 활동 당시 좋아했던 시였기 때문에 강 선생이 인용한 것이다. 강 선생 본인도 고향이 그리워서 쓴 것이다. 흉노족도 이적표현물로 보지는 않았을 것이다."

시민사회단체들이 지난 1월 서울 중앙지방검찰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강순정씨의 석방과 국가보안법 철폐를 촉구했다.
시민사회단체들이 지난 1월 서울 중앙지방검찰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강순정씨의 석방과 국가보안법 철폐를 촉구했다.이철우

"언론에 보도된 영상을 소지한 것도 국보법 위반이라고?"

- (강씨가 소지한) '아리랑' 공연 비디오테이프는 국내 언론에도 일부 소개된 바 있다. 이 또한 이적표현물로 볼 수 있나?
"KBS에 동영상 기사만 64건이 검색된다. MBC <통일전망대>, <시사매거진 2580> 같은 시사프로 뿐 아니라 오락프로인 <느낌표>에서도 장시간 방영된 바 있다. 게다가 남한 국민 1000명 이상이 정부 승인을 받고 직접 북한을 방문해 공연을 관람했다. 아마 그 관람객들이 수많은 비디오를 기념품으로 사 와서 주변에 돌렸을 것이다."

- '아리랑' 공연에 대한 국내 반응은 어떻다고 보는가?
"성공회대에서 <북한사회의 이해> 강의시간에 학생들에게 보여준 바 있다. 두 가지 반응이 있더라. 일단, '멋있고 굉장하다'는 반응이 있다. 반면, '저런데서 어떻게 사나, 남한에 사는게 천만다행이다'는 반응이 더 많았다. 아리랑 공연이 특별한 관심의 대상이 될 수는 있어도 동경의 대상은 아니라고 판단한다. 동경의 대상이라면 정부가 1000여명을 북한에 보냈겠나?"

- 노동당 창건 55돌 기념 영상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 영상은 지난 2000년 10월분이다. 6·15 남북공동선언 넉 달 뒤 북한에서 초청, 남쪽에서 공식 방문단을 보내 당 창건 행사에 참관한 것이다. 당시 40~50명 정도가 북한을 방문했다. 당시 SBS에서 위성중계를 했고, <세계일보>·<서울신문> 등에서도 보도가 된 내용이다. 그곳에 다녀온 사람들이 비디오테이프를 구입했을 것이다."

- 영상에 주체사상을 고무·찬양하는 등 자극적인 표현이 들어가 있던가?
"자극적인 표현이 들어갈 수 있다고 본다. 가령 행사진행자가 무대 참석자들을 소개할 때 말이다. 그러나 그 정도 표현이라면 무난하다고 본다. 북한이 연 행사이기 때문에, 북한 입장에서는 '우리는 힘이 있다' 과시하고자 했을 것이다. 70~80년대에는 남한에 위협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최근 큰 수해가 일어났고, 탈북자들이 줄을 잇고 있는 상황에서는 위협적이지 않다고 본다."

북송 장기수의 갓난아기 사진도 '이적표현물'?

- 강씨가 받아 본 <뉴코리아타임즈>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내 기억으로는 재외동포사회 신문 중 하나로 캐나다에서 발행하는 것이다. 애초 1970년대 군사독재시대 민주화를 지지하는 성향이었다가 1980년대 들어 북한소식지에 가깝게 됐다. 현재 신문은 북한 소식과 진보성향의 기사가 동시에 엮여 있다. 캐나다 교포 사회가 받아보고 도서관에도 비치된 신문이다. 일반인들은 북한소식을 접하기 위해 받아본다. 게다가 강 선생이 작성한 게 아니라 친지가 보내준 것이다."

- (강씨가 소지한) 잡지 <등대> 307·308호도 이적표현물인가?
"<등대>는 북한의 대표적인 선전물·화보집이다. 내용은 주로 사진으로 소프트한 내용 중심이다. 307·308호는 북송 비전향장기수들의 소식을 담은 것이다. 307호에는 이재룡씨가 결혼을 하고 아들을 낳은 내용이, 308호에는 최장기수인 김선명씨의 소식이 담겨 있다. 강 선생과 이씨·김씨와의 친분 관계를 모르지만 남한 내에서 장기수가 범민련은 어느 정도 안면이 있던 사이였다. '친구들을 보시오'하고 누군가 보내준 것으로 가벌성이 없다고 생각한다."

- 강씨가 김대중 전 대통령의 평양방문 비디오를 소지한 것과 관련해 '연방제'가 북한의 일방적 주장이라고 보는가, 남북간 합의된 내용이라고 보는가?
"'합의'라고 볼 수는 없다. 그간 통일방안에 대해 남측은 낮은 단계의 연합체를, 북측은 고려연방제를 주장해왔다. 그러다 6·15 남북공동선언에서 양측의 주장을 서로 인정한 것이다. 통일방안에 대한 건설적인 공통점을 찾아보자는 의미다. 적대시하지 않는다는 의사표현이고, 정치적·군사적 공격 등 비방을 피하자는 것이다. '연방제'를 인정한 것은 남북공동선언에서 가장 의미가 있다고 본다."

- '봉화리 혁명박물관 개관식'과 관련해 강씨는 김일성의 아버지 김영직씨가 임종을 앞두고 쓴 '지원(志願)'이란 말을 썼다. 정치적인 의미가 있는 말인가?
"김영직씨는 신학도로서 식민지 시대 민족주의자였다. 조선국민회 간부였던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사회주의자는 아니었다. 진보적 민족주의자였다. 그가 1926년 세상을 뜨며 '뜻을 높여 독립을 쟁취하자'는 뜻으로 쓴 말이다. 일본제국주의 하에서나 이적표현물로 분류될 수 있는 말이다. 김일성 아버지가 그 말을 했다는 이유로 이적표현물로 보는 것은 납득할 수 없다."

- 북한 <조선중앙통신> 기사를 강병연씨에게 보낸 것이 이적표현물 반포인가?
"<조선중앙통신>은 북한의 관영통신사로 한국의 YTN과 비슷한 위상이나 보다 공적인 통신사라 볼 수 있다. 검찰의 공소사실을 보면 강병연이 북한공작원이다. 그런데 그에게 참고하라고 <조선중앙통신사> 기사를 보냈다. 이것은 강병연씨가 공작원이 아니라는 증거 또는 공작원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증거가 아닐까. 둘은 통일운동의 동지다.

이외에도 강 선생은 박헌영의 판결문을 강씨에게 보냈다. 이 판결문은 북한 문건이다. 남쪽 잡지에 실린 것을 강씨에게 보낸 것이다. 강씨가 반국가단체의 구성원이나 북한의 지령을 받는 공작원이라면 왜 판결문을 보내주겠나."

- 강씨의 글 '김일성 서거 10주년 추모의 정'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는가?
"남한 일반 정서와는 어긋난 글이긴 하다. 그러나 우리 헌법에는 표현의 자유가 보장돼 있다. 게다가 '추모'라는 것은 정부를 전복할 목적이 아니라 개인적인 감정의 표현일 뿐이다. 살아있는 김정일을 찬양하는 것도 아니고 '명백하고 현존한 위험'이 내포된 표현도 아니다. 이 정도는 넘어가야 하지 않나?"

2004년 용천 참사에 대해 위로한 글도 마찬가지다. 전태일 어머니 이소선 여사의 동정이나 박종철 아버지 박정기 선생의 연설을 쓴 게 이적표현물인가? 남한 정부가 친일파·미군의 지배 하에 있다는 얘기도 이미 백범 김구 선생이 다 했던 말이다."

- 강씨의 글 제목인 "있는 미군 몰아내고 오는 미군 막아내자"는 말은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거부한 말인가?
"나 또한 미군철수를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대한민국 정체성을 거부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국정원 과거사위원회에서 일을 하겠나? 남북한의 국방예산을 보면 지난 10년간 150억 달러 대 4억 달러다. 남한의 국방예산이 급격하게 상승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군이 계속 주둔하는 게 정상적인 일인지 문제제기를 할 수 있다고 본다."

"북 영화 <피바다>가 이적표현물? 철저한 반일영화!"

강순정씨
강순정씨장익성
- 북한 영화 <피바다>는 어떤 작품인가?
"이적표현물로 가장 많은 오해를 받는 작품이다. 제목이 살벌하기 때문이다. '공산주의를 찬양하는 내용 아니냐'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생각이다. <피바다>는 반일영화다. 무지몽매한 시골의 한 어머니가 독립혁명군의 지도자, 반일선봉대가 된 사연을 다룬 영화다.

20년 한국사를 전공한 사람으로서 이를 이적표현물로 보는 것을 납득할 수 없다. 김일성이 만들었다는 설도 있지만 애초 <피바다>는 독립군으로부터 내려온 스토리로 영화·가극으로 만들어 진 것이다. <피바다>는 독립운동의 소중한 유산이다. 이를 이적표현물로 보는 것은 독립군 전체를 적으로 돌리는 것이다."

- 통일선봉대 전사들에게 보내는 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강 선생은 통일선봉대 대장이었다. 대장이 대원들에게 일종의 격려문을 보낸 것이 이적표현물이 된다면 통일선봉대를 이적단체로 걸어야 하는 것 아닌가. 통일선봉대가 과격시위를 벌이더라도 집시법으로는 걸었어도 통일선봉대 자체를 이적단체나 불법단체로 몰지는 않았다."

- 강씨가 소지한 글 '현세의 한울림'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나?
"1997년 월북한 오익제의 수기다. 이 수기가 적어도 이적표현물이라고 할 때는 체제전복을 꾀하는 글이어야 한다. 그러나 이 수기의 결론은 1997년 대선을 잘 하자는 것이다. 김영삼 정권 때 '조문파동'이 북한 측으로부터 미움을 산 결정적인 일이다. 남북정상회담을 열자고 약속까지 한 상황에서 김일성이 사망했을 때는 당연히 조문단을 보냈어야 옳다.

미국에 있을 때 한 북한 인사의 강의를 들었다. 당시 내가 조문파동을 두고 "남한의 태도에 대해 어떻게 보느냐" 묻자 그 인사가 유머 넘치는 분위기를 깨고 "우리는 상가집 앞에서 '때춤' 춘 놈 하고는 상종하지 않는다"고 말할 정도였다.

오익제 수기의 의도는 남조선을 혁명하자는 게 아니라 통일방안을 추진할 수 있는 지도자를 잘 골라야 한다는 것이다. 입장을 바꿔놓고 보자. 이게 이적표현물이라면, 남한의 언론 보도를 받고 있는 북한 사람 또한 처벌받아야 하는가? 이는 재판장도, 검사도 원하지 않는 일이라 본다. 이정도 표현물은 관용적으로 봐야하지 않나."

- 이번 사건을 정리해 달라.
"남북한은 서로를 고무·찬양해야 한다. 우리는 북한은 민족의 자존심을 지켰지만 남한은 잃은 게 많다는 의미에서 북한을 격려해야 한다. 북한도 남한을 두고 '미국에 알랑 방구를 끼며 잘 사네'라고 비난할 게 아니라 단군 이래 최고의 경제발전을 이룬 데 대한 고생을 높이 평가해야 한다."

간첩 혐의로 두번 투옥된 강순정은 누구

23일 한홍구 교수가 지원을 받은 강순정씨는 지난해 11월 국보법 위반 혐의로 경찰에 의해 체포·구속됐다. 사건을 송치 받은 서울중앙지방검찰청는 지난 1월 "북 공작원과 128회에 달하는 회합통신을 하고, 국가기밀 16건을 포함해 133종 329점의 문건을 북에 전달했다"며 강씨를 간첩 혐의로 기소했다.

서울지방법원 1심 재판부(제23형사부, 재판장 민병훈)는 강씨의 혐의 중 간첩·이적표현물 일부에 대해 무죄판결을 내렸으나 회합통신 및 일부 이적표현물 등에 대해서는 징역 1년 6개월의 유죄를 선고했다. 현재 항소심이 진행 중이다. 강씨의 사건은 오는 9월 17일이 만기일이다.

강씨는 지난 1996년에도 '대남공작지도원'으로 지목된 강병연(캐나다 범민련 중앙위원)씨와 교류한 사실때문에 국보법 위반으로 구속기소돼 실형을 선고받은 바 있다. 이후 강씨는 1998년 8·15특사로 풀려난 뒤 지난 2003년 사면복권 됐지만 보안관찰 대상자로 살아왔다. 그는 현재 '련방제통일추진회의' 공동대표와 '평화와 통일을 여는 사람들' 고문을 맡고 있다.
#강순정 #한홍구 #국가보안법 #김일성 #김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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