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의 삼겹살'에게 첫사랑이 왔을 때

비만, 자신감 빼앗는 정신적 질병이다

등록 2007.08.29 17:51수정 2007.08.31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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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뚱뚱'한 나를 보는 아주머니의 표정은 이렇지 않았을까?

'뚱뚱'한 나를 보는 아주머니의 표정은 이렇지 않았을까? ⓒ (주)청어람

"아니, 지금 '괴물' 봐요?!"


1994년 여름, 어머니는 길 한복판에서 이렇게 소리쳤다. 내 나이 12살이던 그때, 지나가던 아주머니가 '기이하다'는 듯 나를 뚫어져라 쳐다봤기 때문이다. 남에게 싫은 소리 못하는 어머니가 그랬던 걸 보면, 아주머니의 표정이 영화 <괴물>에서 괴물의 등장을 볼 때처럼 경악을 금치 못했나 보다.

어머니의 속상한 마음은 당연하고 나를 '괴물 보듯' 한 아주머니의 표정까지 이해한다. 당시만 해도, 키 146㎝에 몸무게가 74㎏이나 나가는 '초특급 비만아'를 구경하기란 힘들었으니 말이다. 더불어 기상청 관측 기록상 가장 무더웠다는 그 여름, 산 만한 덩치에 비오듯 땀을 흘리며 가쁜 숨을 몰아쉬는 나 때문에 아주머니의 체감온도가 올라갔을 수도 있겠다.

'뚱뚱하다'는 놀림, 내성적으로 변한 나

그 정도로 나는 뚱뚱했다. 아니, '심하게' 뚱뚱했다. 10살 무렵부터 통통해지더니 어느덧 학교 '씨름부' 입단 제의를 끈질기게 받을 정도로 뚱뚱해진 것이다(억지로 간 씨름부에서 운동장을 뛰라는 소리에 도망쳤다).

그래도 "물만 먹어도 살이 찐다"는 사람들처럼 억울하진 않았다. 많이 먹은 만큼 응당 많이 쪘기 때문이다. 먹을 것을 입에 달고 살고 콜라를 물처럼 마셨으니 "먹었다"보단 "넣었다"는 표현이 정확하겠다.

그런데 그렇게 살이 찌고 보니 뚱뚱한 아이들은 대부분 두 부류로 나뉘는 듯 했다. 뚱뚱하다는 이유로 아이들의 놀림을 받는 아이와 뚱뚱할 뿐만 아니라 힘도 세 놀림을 면하는 아이. 이 중 온순한 아이들에겐 어김없이 '돼지'와 관련된 별명이 따라다녔다. 물론 거친 아이들도 등 뒤에서야 '돼지XX'라고 불렸을 테니 귀는 꽤 간지러웠으리라.

나는 이중 '집돼지'과에 속하면서도 이따금 '멧돼지'과로 변하는 독특한 유형이었던지라, 그나마 '적당한(?)' 놀림을 받으며 괴상한 별명이 붙었다. 수많은 별명 중 지금도 또렷이 떠오르는 것은 '공포의 삼겹살'.


a 그나마 키가 크면서 상대적으로 비만도가 줄어들었던 초등학교 6학년 때.

그나마 키가 크면서 상대적으로 비만도가 줄어들었던 초등학교 6학년 때. ⓒ 이덕원

내가 여느 사람들과는 다르다는 걸 깨달은 것도 친구들의 그런 장난 덕택이었다. 초등학교 6학년이 된 13살 때, 중력은 너무도 '공평'해 무거운 만큼 느렸고 허우적거리는 내 모습을 즐기는 상대방 공격수에게 유린을 당하기 일쑤였다.

또 수업시간에 소재만 생기면 '뚱뚱'과 엮은 친구들의 장난이 끊이지 않았다. 그럴 때면, '공포의 삼겹살'로 변신해 응징하기도 했지만, 미봉책에 불과했다.


첫사랑과 함께 온 '첫 다이어트'

그럼에도 난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고, 중학생이 되고도 조금씩 들쭉날쭉할 뿐 모양새엔 변화가 없었다. 친구들의 장난이 여전한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다만, 중학교 입학 후 달라진 점이 있다면 '특별대우'를 받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1학년 어느 날, 양호선생님이 찾아와 몇몇 아이들의 이름을 불렀고, 일어나는 아이들은 하나같이 뚱뚱했다. 이내 내가 호명됐고 뒤따른 말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중등도 비만."

아이들 사이에서 '비만클럽'이라고 부른 이 특별대우는 일 년에 한 번 비만인 아이들만 누릴 수 있는 방과 후 건강검진이었다. 다음해에도 난 연이어 '중등도 비만'이라는 타이틀을 거머쥐었고, 내성이 생겨 그러려니 비만클럽을 찾아 이전에도 만났던 친구들과 "왔어? 올 줄 알았어"라고 반기며 진한 '동족애'를 느꼈다.

그렇게 특별대우에도 익숙해진 같은 해 가을, 내 '비만 인생'에 역사적인 사건이 터졌다. 열다섯 사춘기 소년에게 '첫사랑'이 찾아온 것. 처음 보는 순간 사방이 뿌예지더니 이후 지나칠 때면 가슴이 방망이질을 쳤다. 매일같이 마주쳤지만 내겐 말은커녕 쪽지 한 장 건넬 '용기'가 없었다.

활달했던 아이는 살이 찌면서 언젠가부터 '내성적'인 소년이 돼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내 체격은 키 169㎝에 몸무게 85㎏. 거침없이 늘어난 살과는 반대로 '자신감'은 줄어있었던 것이다. 드라마 <파리의 연인>의 김정은의 대사 "이 꼴을 하고서 어떻게 그래요"가 꼭 내 마음이었다.

짝사랑에 사춘기 소년의 가슴앓이는 계속됐고, 결국 굳은 마음을 먹었다. 그녀 앞에 당당히 설 수 있게 변하자고. 온갖 '돼지'류의 별명에도 꼼짝을 않았던 내가 난생처음 다이어트를 시작한 것이다.

그해의 겨울방학, 다이어트엔 달리 축지법(縮地法)이 없었고 하루 밥 한 끼 그것도 달랑 한 공기만 먹기 시작했다. 그래도 허기진 배는 오이나 물 따위로 채웠고 가벼운 운동도 곁들였다. 사춘기 짝사랑의 간절함에 난 독했고 그 결과 한 달 만에 '10여㎏ 감량'에 성공했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건 고백뿐! '사랑은 타이밍'이라고 했던가? 기껏 살을 뺐거늘, 그녀는 갑자기 학원에 나오지 않았고 그렇게 말 한마디 못한 채 떠나보냈다(?).

살 빼니 사람들도 나도 '달라지더라'

a 다이어트 성공 후인 고등학교 1학년 겨울.

다이어트 성공 후인 고등학교 1학년 겨울. ⓒ 이덕원

그래도 이루지 못한 첫사랑은 내게 값진 '선물'을 안겨다줬다. 3학년, '비만클럽'에서 내가 '과체중'으로 특별대우 대상에서 제외된 것이다. 교실에서는 친구들의 축하 인사가 이어졌고, 복도에서 마주치는 옛 동족들은 놀라움과 함께 부러움을 금치 못했다.

한 칸 한 칸 허리띠 안쪽으로 구멍을 뚫어가는 재미에 이후에도 다이어트는 끝나지 않았다. 고등학교 입학시험을 준비하면서 식사량을 조절하는 것만으로 다시 일 년여 동안 몸무게를 5㎏ 정도를 줄였고, 반대로 키는 꾸준히 컸다.

'키 184㎝ 몸무게 72㎏'. 고교 입학 후 내 첫 신체검사 기록이다. 나는 변했다. 아니, 나보다 나를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가 먼저 변했다. 더는 뚱뚱하지 않으니 돼지와 관련된 별명도 붙지 않았다. 오히려 나는 '늘씬한 몸매'에 부러움의 대상이 됐다. 처음엔 익숙하지 않았다. 사람들의 태도도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도.

그런 나보다 낯설어하는 이들이 있었으니, 바로 초등학교 동창들이었다. 거리에서 마주친 친구들에게 다가가 인사를 걸어도 '누군가?' 하고 고개를 갸우뚱거리거나 놀라서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12살 적에 나를 보고 놀란 아주머니의 표정이 '웩'이었다면 그 때 친구들의 표정은 '와'였던 것이다.

나도 변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퇴화됐던 '자기애'가 솟아났다. 그렇게 '정상인'으로서의 시간이 지날수록 활달하고 적극적인 사람으로 돌아갔다. 다이어트로 잃었던 자신감을 되찾은 셈이다.

그러고 보면, 비만은 '정신적 질병'이기도 하다. 대개 사람들의 놀림과 거울에 비친 볼품없는 모습에 자기애는커녕 자괴하기 십상이라서 작게는 자신감의 상실, 크게는 우울증을 부르기 때문이다(개중에는 이를 아랑곳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재발할 뻔한 비만, '다시 시작'한 다이어트

a 최근 모습에 가장 가까운 사진.

최근 모습에 가장 가까운 사진. ⓒ 이덕원

방심은 금물. 대학 입학 후에도 어느 정도 유지됐던 내 늘씬한 몸매는 지난해부터 형태를 잃고 말았다. 결국, 올초 같은 키에 94㎏까지 체중이 불어 비만의 문턱까지 다다랐다.

더욱이 스물다섯 청년이 '배'에만 집중적으로 살이 쪄 이른바 'D라인'을 이루는 게 문제였다. 하릴없이 '비만의 재발'을 막고자 잊고 지낸 다이어트를 다시 시작했고 현재 88㎏이라는 고지에 이르렀다.

자신감이 넘치는 사람은 언제나 매력적이다. 'S라인', 'M라인'을 만들지 않더라도 자신감이라는 정신적 건강은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다시 다이어트를 결심하는 이유다.

덧붙이는 글 | <'비만=질병'이라고?> 응모글

덧붙이는 글 <'비만=질병'이라고?> 응모글
#다이어트 #비만 #질병 #살 #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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