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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운 사람들 몇몇에게 우리 집에서 '어머니 잔치'하니까 오라고 연락을 했다. 잔치는 이틀 동안 하니 이틀 다 참석해도 되고 가능한 날을 골라서 와도 된다고 했더니 모든 사람들이 그랬다. "어머니 팔순이냐? 아니라고? 그럼 구순잔치냐?"고.
단 한 사람도 아무 날도 아니라는 내 말을 곧이듣지를 않았다. 거듭 아무 날도 아니라고 해도 통하지 않았다. 나중에는 "네가 나 부담스러워 할까 봐 그러는구나"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초청장을 만들기로 했다.
내 속마음을 한 장짜리 초청장에 담아 보기로 했다. 초청장을 만들면서 처음 먹었던 내 뜻이 제법 가지런히 정돈되었다. 그리하여 붙게 된, 세상에 전무후무하다는 평가를 받게 된 잔치 이름이 바로 '어머님의 건강과 존엄을 생각하는 기도잔치'다.
어머니를 모시면서 제일 중요하게 내 가슴 속에 자리잡아 간 것이 바로 이 '존엄'이다. 건강보다도 존엄을 더 귀하게 생각하게 되었는데 사실 건강이야 나이 잡수시면 약해지게 마련이다. 그러나 어른들의 존엄성은 훼손되어서는 안 된다고 본 것이다.
면사무소에를 가도 그렇고 병원에를 가도 그렇다. 우리 집으로 찾아오는 간병인도 그렇고 하물며 우체부 아저씨도 그랬다. 여든여섯인 우리 어머니에게 쉽게 반말을 하는 것이었다.
"할머니. 어디가 아픈데?""이거 아니야. 할머니. 주머니 다시 찾아봐요. 다른 도장 없어?"
나이 잡수시고 몸 어딘가가 불편한 노인들에 대한 건강한 사람들의 태도는 단순한 무시를 넘어서 무례에 가까운 경우가 많은 것을 볼 수 있다.
어머니를 곁에 두고서 함부로 어머니에 대해 얘기를 한다. 정작 옆에 있는 어머니에게는 한 마디도 물어보지 않는 경우도 있다. 한번은 장애진단 받는 과정에서 내가 "우리 어머니에게 물어 보세요!"라고 소리를 쳤던 적이 있다. 어머니 나이를 왜 본인 곁에 두고 나에게 묻느냐고 젊은 의사를 야단쳤다.
어느 대학병원 간호사는 "친근하게 하느라고 그런다"며 자기들의 반말을 변명했다. "아. 그래? 그랬더니 할아버지가 친근해서 좋다고 그러더냐?"라고 내가 바로 받아쳤더니 얼굴이 새빨개졌다.
이런 일은 집안에서도 비일비재했다. 아버지 제삿날에도 정작 부인되는 어머니는 완전히 뒷전이다. 명절이라고 다르지 않다. 여든여섯의 몸 불편한 어머니는 더 이상 '사람'이 아니었다. 옷에 오줌 누셨다고 사람들 있는 데서도 팬티를 마구 벗겼다. 늙고 병든 어머니는 더 이상 '여성'도 아니었다.
어머니 생신 날도 마찬가지다. 그 많은 음식, 그 많은 자손들의 왁자지껄한 안부 나눔은 모두 어머니를 비켜갔다. 어머니 생신을 핑계 삼은 젊고 건강한 사람들 잔치였다. 오고 가면서 어머니 방에 먼저 들르지도 않고 묻는 말이 조리에 맞지 않으면 대답도 안 했다. 모두 이전의 내 모습이기도 하다.
어버이날도 카네이션 한 송이가 어머니 가슴에 대롱거리다 만다. 나는 오로지 어머니만을 위한 날. 어머니가 온전한 주인공이 되는 날. 그런 날을 생일이나 팔순, 구순 잔치가 아니라 생짜로 날을 잡아서 어머니의 날로 만들고 싶었다. 모든 사람들이 어머니를 중심으로 생각하고 행동하고 말하는 날. 이 세상이 우리 어머니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그런 날을 만들어 드리고 싶었다.
다 큰 자식도 애 취급하면 끝까지 애처럼 굴 듯이 우리 어머니를 우리 집 최고의 어른으로 깎듯이 공경하고 귀하게 모시면 최고 어른으로서의 체통과 권위를 당신 스스로 놓치지 않을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그래서 그런지 모르지만 우리 집에 온 지 꼭 4개월만에 똥 오줌을 완전히 가렸다. 우리 집 세탁기에 곰팡이가 피는 이유다).
부고장이 가면 모든 일을 제쳐놓고 장례식장으로 모여드는 사람들. 장례식장은 일종의 장사꾼들의 사교장이 되어버렸다고 생각한다. 살아 계실 때 따뜻하게 손이라도 한번 잡아 드려야지 장례식장에 모여서 화투장이나 돌리는 그런 모습을 마지막 장면으로 어머니에게 드리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스무 사람 남짓 청했는데 40명이나 왔다. 찹쌀을 쪄서 마당 호박돌에다 놓고 떡메로 쳤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인절미가 만들어졌다. 농사지은 콩을 방앗간에서 빻아 콩고물 만들어 둔 게 있어서 그걸로 떡을 묻혔다.
어머니 선물들이 들어왔다. 이번 기도잔치의 취지를 정확히 이해한 사람들다운 선물이었다. 몸이 불편한 어머니에게 꼭 필요한 것들이 중심을 이루었다. 젊은 아들내미와 자기 자신의 낯을 내기 위한 것은 별로 없었다. 원목으로 만든 고운 머리빗, 유기농 오렌지주스, 고급 녹차, 나훈아의 음반, 홍시, 오미자주스, 어머니 속옷, 고운 면수건 등이었다.
어떤 사람은 그랬다. 초청장을 받고 꼭 참석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마음을 바꿨다는 것이다. 몇 달째 찾아보지도 못한 자기 어머니가 갑자기 떠올랐다는 것이다. 어머니를 찾아뵙기로 마음을 바꾸었다며 못 가니 이해하라고 연락이 온 것이다.
한 참석자는 이틀 동안의 행사가 끝나고 바로 집에 돌아가 식구들을 다 데리고 어머니가 계시는 고향으로 향하고 있다면서 전화를 걸어왔다.바로 이것이 이번 잔치의 가장 큰 보람일 수 있다. 우리 마음 속에 어머니를 모시는 것이다. 내 어머니를 간절히 떠올리는 데서 나아가 한없이 베풀고 용서하는 어머니 마음을 갖는 것. 세상의 어머니로 살아가리라 다짐하는 것. 어머니를 모시고 그럼으로써 스스로 어머니가 되는 것.
잔치가 이틀이 된 것도 본래 내 생각이 아니었다. 예배를 봐 주시기로 한 김민해 목사님이 하루 전날(토요일) 오신다고 해서다. 하루 전날 와서 어머니를 돌보다가 다음날 예배를 보는 게 좋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돈 많고 권세 높은 부잣집에서도 하지 못하는 이틀 잔치를 우리는 거뜬히 해낸 것이다.
참석자들이 알아서 음식도 만들고 알아서 진행도 했다. 소리꾼은 노래를 하고 연주가는 연주를 했다. 명상 춤도 추었다. 어머니를 떠올리는 노래 '찔레꽃'도 즉석에서 불렀다. 어떤 이는 내가 쓴 시 '똥꽃'을 현대민요로 작곡을 하여 발표하였다. '어머님 은혜'를 부르면서 다들 숙연해졌다.
여섯 남매 중 한 분의 형님만이 오셨다. 정작 어머니는 이틀 동안 거의 누워 계셨다.'너긋들 젊은 사람들끼리 놀아라. 늙은이가 끼어가지고 흥이나 깨질라' 싶기도 하고 '내가 너희들 하자는 대로 할 성 싶으냐? 이미 내 몸과 내 마음은 나도 어쩌지 못한다. 정신들 차려라 이놈들아. 오란다고 오고 붙잡는다고 안 가는 줄 아느냐? 어림도 없다. 이놈들아' 싶기도 했다.
돌아가면서 기도하는 순서가 있었는데 내 순서에 이렇게 기도했다.
"못 알아듣고 엉뚱한 소리 하신다고 제가 어머니를 무시하는 일이 없도록 하시고 막내가 어머니 모신다는 이유로 이를 내세우거나, 형제들 사이에 의가 상하는 요인이 되는 일이 없도록 하소서."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월간 마음수련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2007.08.30 21:23 | ⓒ 2007 OhmyNew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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