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내리는 날 '불장난'을…

대 표면에 불로 그림을 그리는 낙죽(烙竹)체험의 묘미

등록 2007.09.02 12:05수정 2007.09.03 0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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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죽(烙竹). ⓒ 이돈삼


남도땅 담양은 대(竹)를 주제로 한 여행지로 단연 으뜸입니다. 대나무의 그윽한 향을 만끽할 수 있는 죽녹원과 대나무골테마공원 등 대밭이 여러 군데 있습니다. 대나무박물관도 있습니다. 대숯찜질을 할 수 있는 찜질방도 있습니다.

체험꺼리도 풍부합니다. 연과 부채, 단소 등 죽세공예품을 만들어 볼 수 있습니다. 대숯을 이용한 천연염색과 죽초액을 이용한 비누 만들기도 가능합니다. 대통밥과 죽순, 대통술 등 먹을거리도 푸짐합니다.


장대비를 뚫고서 담양에 갔습니다. 사실 담양은 수시로 찾는 곳입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습니다. 큰 아이 슬비와 그 친구들의 요청에 따라 드라이브를 시켜주는 ‘운전기사’로 갔습니다. 장대비가 쏟아지는 날씨 탓에 선뜻 내키지는 않았지만 여름방학을 끝내고 개학해서 만난 친구들과 오랜만에 시간을 가져보겠다는데 나서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담양으로 가는 길은 분홍빛의 백일홍과 함께였습니다. 길 양쪽으로 절정을 맞은 백일홍이 피고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노랑색을 띤 황화코스모스도 만개하고 있었습니다. 빗물을 머금은 대나무도 어느 때보다 싱그러워 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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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세쿼이아 가로수 길 '전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가로수 길'로 정평이 나 있는 메타세쿼이아 가로수 길. 장대비가 쏟아지는 날이지만 그 아름다움에는 변함이 없다. ⓒ 이돈삼


아이들은 자동차의 뒷좌석에 앉아서 쉴 새 없이 떠들었습니다. 여름방학 때 수영장과 해수욕장에 갔었던 이야기며, 방학숙제 이야기, 친구들 이야기 등으로 화제를 옮겨갔습니다. 혜주가 수영장에서 물미끄럼틀을 타다가 "물을 먹었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슬비가 "그런데 가서 물을 먹는 것도 재미"라고 했습니다. '슬비가 놀 줄을 아는 아이구나'하는 생각을 새삼 했습니다.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아이들의 수다는 끝이 없었습니다. 귀가 놀랄 정도로 웃기도 하고 펄쩍펄쩍 뛰고 간질이고 법석이었습니다. 마치 수다의 진수를 보는 듯했습니다. 드라이브 시켜달라고 했으면서 정작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풍경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창 밖으로 피어 있는 꽃에 대해서 말을 꺼냈더니 생뚱맞다는 표정들이었습니다. 불길한 생각이 든 것은 그 순간이었습니다. 정말이지 처음부터 끝까지 '기사' 역할만 하겠다는 생각이 스쳤습니다. 운전자에 대한 배려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아이들을 대나무박물관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이왕 드라이브 나온 것, 아이들한테도 체험꺼리 하나 주는 것도 의미 있겠다 싶었기 때문입니다. 처음엔 내키지 않는 표정이었지만 아이들은 금세 저한테 동조를 해주었습니다.

광주에 사는 어린이라면 대나무박물관은 몇 번씩 가봤을 것이기에 바로 죽제품 체험교실로 향했습니다. 혜주나 미정이는 죽제품 체험교실이 처음이라고 했습니다. 체험교실에서는 팔랑개비며 부채, 물총, 연, 활, 단소, 냄비받침대, 열쇠고리, 죽비 등 대를 이용해서 할 수 있는 체험은 다 해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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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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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돈삼


아이들은 낙죽을 택했습니다. 낙죽(烙竹)은 불에 달군 쇠(인두)로 대의 표면을 지져 여러 가지 무늬나 글씨를 새기는 것을 말합니다. 대를 이용한 체험 가운데 난이도가 높은 편에 속한 것입니다.

체험은 이형진(52) 선생님이 지도했습니다. 36년째 낙죽을 해오고 있는 그는 옛 전통의 낙죽방법을 그대로 전수받아 계승하고 있는 명인입니다. 담양군의 엄격한 심사를 거쳐 뽑힌 체험교사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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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돈삼


아이들은 대나무 붓통에다 낙죽을 하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나 재료가 다 떨어졌다는 이야기를 듣고 대나무 컵을 골랐습니다. 초보자들의 체험은 연필을 이용해 대에다 밑그림을 그리는 것으로 시작됐습니다.

아이들은 동물그림이나 만화캐릭터를 그렸습니다. 풍경그림은 어렵다고 마다했습니다. 도화지가 아닌 둥그런 대에 그리는 그림이 생각보다 힘든 모양이었습니다. 지우개를 이용해 지우고 다시 그리고를 수없이 되풀이했습니다. 그림을 다 그린 다음엔 좋아하는 글귀도 새겼습니다. 이름을 새기는 것도 잊지 않았습니다.

밑그림을 완성한 아이들은 인두를 잡았습니다. 이형진 선생님이 먼저 인두질  시범을 보이면서 요령을 설명해 주었습니다. 인두를 세우면 선이 가늘게 그려지고, 눕히면 선이 굵어진다는 것도 가르쳐 주었습니다. 인두를 한 곳에 오래 대고 있으면 대가 까맣게 타버린다는 것도 일러줍니다. 뜨거운 불을 이용하는 만큼 각별히 주의해야 한다고 덧붙였습니다.

아이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인두를 붙잡고 조심조심 끝자락을 움직여 봅니다. 긴장을 한 탓인지 인두가 지나간 자리에 손떨림 흔적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그것도 잠시, 요령을 터득했는지 아이들의 손놀림이 부드러워졌습니다.

밑그림을 복잡하게 그린 슬비는 생각보다 힘들다면서 몇 번을 쉬었습니다. 시간이 조금 지나면서 팔이 아프네, 다리가 아프네 하면서 한눈을 팔았습니다. 친구들의 인두질을 감상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쉬었다 하라고 하면 다시 인두를 움직였습니다. 차분하지 못한 성격이 그대로 묻어났습니다.

굵직한 그림 몇 개로 밑그림을 마친 미정이의 인두질은 거침이 없는 듯 보였습니다. 혜주도 말 한 마디 내뱉지 않고 차분히 인두질에 몰두했습니다. 두 아이의 평소 성격을 알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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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돈삼


인두를 이용해 그림을 하나하나 완성해가는 아이들의 표정에서 스스로 신기해 하고 흐뭇해 하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떨리면서 움직이는 손끝에선 장인의 긴장감까지 묻어났습니다. 적어도 대의 표면에 인두를 대고 움직이는 그 순간만큼은 무아지경이었습니다.

슬비와 혜주, 미정이 모두 자신의 작품에 만족해 하는 표정이었습니다. 미정이는 여름방학 만들기 숙제로 제격이라며 진즉 찾지 않은 것을 후회하기도 했습니다. 혜주는 체험의 재미를 알 것 같다고 했습니다. 장대비를 뚫고 드라이브 하면서 체험도 하고, 아이들도 만족해하니 저 또한 보람이 느껴졌습니다.

토요일 오후 한나절, 그리 길지 않는 시간이었지만 대를 이용해 죽제품을 직접 만들어 본 아이들한테서 금세 우리 전통문화에 대한 애정이 묻어나는 것만 같았습니다. 조상들의 지혜와 슬기도 온 몸으로 느끼면서 초등학생으로서의 마지막 2학기 개학일의 추억 한 페이지도 만들지 않았을까 짐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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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돈삼


#담양 #대나무박물관 #죽세공예 #낙죽 #슬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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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찰이 일상이고, 일상이 해찰인 삶을 살고 있습니다. 전남도청에서 홍보 업무를 맡고 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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