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도' 수준 폭행·협박 있어야 강간죄?

한국성폭력상담소·한국젠더법학회, '성폭력 판례비평'

등록 2007.09.09 09:45수정 2007.09.09 1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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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은 하루 안 하면 티가 팍 난다고 하던가요. 제게는 여성주의도 그런 것 같습니다. 내가 여성이니까, 혹은 예전에 여성주의에 대해 공부를 해봤으니까 이제는 다 안다고 생각하면 큰일입니다. 내가 당연하다고 체념했던 일들을 누군가 새롭게 지적하고, 내가 모르는 다른 여성의 문제를 꺼내놓기도 합니다. 어느새 게을러져서 뻔뻔해지지 않도록, 하루에 한 페이지씩이라도 여성주의 일기를 써야겠다 다짐합니다.

한국성폭력상담소와 법조인들이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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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주의 관점의 성폭력 판례비평 ⓒ 김홍주선


오늘(8일)은 한국성폭력상담소와 한국젠더법학회가 공동 개최한 <여성주의 관점의 성폭력 판례비평> 세미나에 다녀왔습니다. 대학로에 있는 방송통신대학교에서 아침 10시부터 오후 1시까지 진행되었습니다. 김엘림 교수와 한국성폭력상담소 이미경 소장, 이경환 군법무관, 박미숙 판사, 서울고등법원의 신숙희 판사, 양소영 변호사, 이유정 변호사, 이호중 교수, 춘천지방검찰청의 황은영 검사가 참석해 발제와 지정토론을 맡았습니다.

젠더법학회의 세미나는 이번이 4회째로, 성폭력상담소와 공동 개최한 것은 올해가 처음이라고 합니다. 그 동안 한국성폭력상담소는 매달 판례 평석집을 발간해 법조인들에게 발송하는 운동을 해왔습니다. 판례 평석집은 여성운동의 상징색인 보라색 봉투에 들어있습니다. 한국성폭력상담소는 이 판례 평석집을 통해 '법조인들을 불편하게 해드리려고' 열심히 문제지적을 해왔다고 하는군요.

상담소에서 조사한 통계에 따르면 피해자가 경찰청에 고소한 것은 13%, 검사에 의한 강간 기소율은 15%라고 합니다. 아주 낮은 수치입니다. 이들마저도 상담소에서 '차라리 (고소)하지 않을 걸 그랬다'는 괴로움을 토로한다고 합니다. 피해생존자들이 고소 과정에서 2차 피해를 겪는 일이 비일비재하기 때문입니다.

세미나에서는 형법 297조에서 강간죄를 구성하는 구성요건에 대한 입법론적 검토, 이에 대한 판결이라는 해석론적 검토, 그 외 아동성폭력이나 장애인성폭력, 아내 강간 등에 대해서 다루어졌습니다.

왜 강간죄에는 '최협의'의 폭행, 협박을 요구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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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력 판례비평 토론 ⓒ 김홍주선

형법에 규정된 강간죄에는 '최협의'의 폭행, 협박이 그 구성요건으로 되어 있습니다. 구성요건은 범죄를 구성하는 객관적이고, 주관적인 요소들을 가리킵니다. 형법의 폭행, 협박은 총 4단계로 나누어지는데 가장 강한 강도, 즉 '저항을 불가능하게 할 정도의 폭행, 협박'을 최협의의 폭행, 협박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적용되는 죄는 형법에서 강간죄와 강도죄가 있습니다.

강도죄는 재산을 보호법익으로 하는 범죄이고, 강간죄는 성적 자기결정권을 보호법익으로 하는 범죄이죠. 사람에게 직접 가해지는 강간죄의 그 죄가 강도죄에 비해 작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강도죄와 같은 정도의 폭행, 협박을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 재판 과정에서 피해자에게 '평소 순결한 여성이 낯선 괴한에게 음습한 골목에서 급습을 당해 저항했지만, 이를 억누를 정도의 물리력으로 강간을 당했다'는 사실을 증명할 것을 요구하게 됩니다.


여기에서 조금이라도 어긋날 경우, '피해자가 유발한 것이 아니냐'는 의심을 합니다. 이로 인해 많은 피해자들이 상담 과정에서 고소를 포기합니다. 고소를 하더라도 기소가 되지 않기도 하며, 기소가 되어도 1심의 실형률이 41.2%에 불과한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당연히 이 과정에는, 법조인들의 가부장적 성관념도 개입하고 있지요.

미국 형법의 경우에는 저항요건을 명시적으로 폐지하는 조항을 두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도 오늘 세미나에 참여한 많은 법조인들이 '최협의'를 '협의'로 완화시키자는 데에 동의하였습니다. 그렇게 되면 '피해자의 자유의사를 제압하기에 충분한' 폭행, 협박이 강간죄의 구성요건이 됩니다. 더 많은 피해자가 자신의 권리를 찾을 수 있겠지요.

다만 현재 강간죄의 법정형이 3년 이상의 유기징역으로 되어있기에 작량감경을 하여도 최소 1년 6개월 이상의 징역을 선고받는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피고인의 인권도 생각해야 하기에 지나치다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이를 위해 최협의를 협의로 완화시킴과 동시에, 양형(형기)에 대한 조절도 함께 이루어지면 좀더 현실적인 처벌이 가능하다는 게 오늘 토론의 중론이었습니다.

친고죄 조항, 재판·수사 절차에서도 피해자는 두 번 운다

또 다른 중요한 의제는 친고죄였습니다. 본인이 고소해야 처벌이 가능한 범죄를 '친고죄'라고 합니다. 강간죄도 이에 속하는데, 피해자의 명예를 보호하기 위해서라고 하지만, 사실 피해자를 억압하는 수단이 되어버렸습니다. 강간하기 위해 야간에 침입한 뒤 상해를 입혔는데, 합의했다는 이유로 처벌이 불가능해져 버립니다. 만약 강도였다면, 피해자와 합의했다는 이유로 풀려날 수 있을까요? 친고죄는 법원에서 오히려 피해자와 가해자간의 합의를 종용하는 무서운 조항이 되어버렸습니다. UN도 한국에 아내강간에서 친고죄 조항을 폐지할 것을 권고한 바 있습니다.

토론의 주요 의제는 아니었지만, 토론에 참여한 황은영 검사와 방청석에서 의견을 낸 사법연수원 교수는 재판 절차, 수사 절차에서 피해자의 인권 침해가 심각함도 지적하고 있습니다. 비공개 재판이나 피해자의 신뢰할만한 자의 동석 등 앞으로 개발해야 할 요소들이 많습니다. 최근에 밀양 성폭력 사건에서 경찰관이 피해자 조사 중 "밀양, 물을 흐렸어"라고 피해자를 모욕하였던 일이 있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다행히도 고등법원에서 직무상 불법행위 책임을 인정하는 판결이 나온 상태입니다.(서울고등법원 2007.8.16 선고 2006나108918 판결)

"현재 고통받고 있는 피해자를 외면해야 한다는 건 옳지 않다"는 이경환 군법무관의 말처
럼, 성폭력 범죄에 있어서 가장 먼저 이해해야 할 것은 피해자의 입장일 것입니다. 그러나
판례와 수사과정 개선만으로는 해결될 수 없는 법체계적 모순은, 빠른 시일 내에 입법을 통해 해결해야 할 것입니다.
#친고죄 #강간죄 #성폭력상담소 #젠더법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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