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사 내 몸이 찢겨나가도 정면으로 승부하리라

추리무협소설 <천지> 271회

등록 2007.09.12 08:15수정 2007.09.12 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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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라랑.

화산의 자하진인은 그저 ‘늙은 원숭이’가 아니었다. 화산의 실리를 위해서라면 어떠한 비난과 욕설도 감수하는, 또한 파렴치한 짓을 서슴지 않는 비열한 인간으로 치부하기에는 그의 신위는 너무나 뛰어났다.


신검합일(身劍合一).

완벽하게 검과 몸이 합일되는 극한의 경지에 오른 것은 아니었으나 이미 검으로 일가(一家)를 이루기에 족한 신검합일의 초입단계에 들어선 인물이었다. 더구나 화산의 삼대보검 중 하나인 자하검(紫霞劍)은 묘한 기류를 뿜으며 몸과 하나가 되고 있었다.

‘정말 대단하다.’

좌등마저도 속으로 감탄하고 있었다. 이미 몸과 검이 일체가 되어 움직이는 검은 살아있었다. 검이 허공을 가를 때마다 선명한 매화송이가 구름처럼 피어났다. 매화송이는 봄바람에 살랑이듯 피어나다가 갑자기 폭풍우가 몰아치듯 설중행의 전신을 휩쓸어갔다.

더구나 그의 몸에서 은은히 뿜어지는 노을빛(紫霞) 기류는 이미 화산의 신공 중 첫 번째로 꼽을 수 있다는 자하신공이 구성 이상의 경지에 올랐다는 증거. 저런 인물이 자신을 숨기고 화산을 위해 비열한 짓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저지를 인물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지금까지 다른 사람들에게 비친 그의 모습과는 달리 검을 잡은 그의 자세는 너무나 신중하고 완벽해 정말 검을 알고 쥔 인물임을 부인할 수 없었다.

“타핫.”


그의 검세가 갑자기 변했다. 그의 몸 전체에 노을빛이 더욱 짙어지고 검이 어느새 그 안에 묻히고 갑자기 검이 뻗는다 싶은 착각이 드는 순간 그 속에서는 세 줄기 선을 그으며 매화송이가 연달아 쏘아 나왔다.

처음에는 밤톨만한 크기의 꽃송이로 시작되어 쏘아나가면서 점점 커지더니 손바닥만큼 커지며 설중행의 전신을 덮었다. 그것은 주위에서 보기에도 매우 위험하고 치명적인 위력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

이미 붉은 기류로 뒤덮여 있는 설중행의 신형이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붉은 기류가 꼬리를 이으며 허공을 갈랐는데 아직까지 자하진인의 공세를 피하거나 잠시 늦추게 만들 뿐 본격적으로 공격하지는 않고 있어 그의 의도를 짐작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이미 자하진인의 공세가 더욱 위험하게 변함에 따라 그의 움직임이 점차 둔화되고 있었다. 더구나 이번 공격은 끝장을 보려는 듯 설중행의 신형이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지만 여전히 세 줄기를 유지하며 연달아 쏘아가는 매화송이는 더욱 가속화되어 단 한 순간의 방심에도 피를 뿌릴 것 같은 상황.

스스으----

설중행 역시 이제는 더 이상 수세만을 취할 수 없을 터였다. 아니나 다를까? 설중행의 전신이 더욱 붉게 변했다. 그것은 더욱 짙어져 핏빛을 선명하게 띠어가고 있었는데, 파고들던 매화송이가 그 핏빛기류에 스치는 순간 산산이 부서져 흩어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르릉----카악----

갑자기 괴성이 울렸다. 마치 맹수가 울부짖는 듯한 괴성이었는데 주위 사람들의 고막이 터져나갈 정도였다. 동시에 허공에 솟구친 설중행의 붉은 기류가 다섯 갈래로 갈라졌다. 그것은 순식간에 선명하게 다섯 마리의 시뻘건 용의 형상을 이루었는데, 사방에서 일제히 자하진인을 노리며 내리 꽂혔다.

“으음.....!”

자하진인의 입에서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저것이다. 구룡의 무학. 구룡의 무공 중에서도 가장 패도적이라는 혈룡의 혈룡장이 바로 저것이다. 지금까지 가지고 있었던 구룡의 신화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꿈에서조차 그를 두려움에 떨게 했던,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은 듯한 구룡의 무학에 대한 두려움.

‘설사 내 몸이 갈기갈기 찢겨나간다 해도 정면으로 승부해 보리라.’

이미 능효봉이 펼쳤던 천룡의 무학을 보고, 그리고 또 하나의 구룡의 후예가 나타났음을 알았을 때 어차피 그러리라 작정했는지도 모른다. 아니 더 이상 구룡과 구룡의 무학에 대해 두려움에 쫒기고 싶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자신의 목숨에 대한 미련을 접을 때 사람은 이렇게 또 다른 용기가 솟아나고, 또한 모든 것을 체념할 때 홀연 마음이 안정되기도 하는 것이다.

“오라....!”

자하진인의 음성은 차분한 가운데 위엄이 곁들어 있었다. 그의 신형은 자신에게 내리꽂히는 다섯 마리의 혈룡의 형상에 정면으로 부딪쳐갔다. 노을빛을 닮은 그의 자하검은 두 개에서 네 개로 또 여덟 개로 늘어나면서 허공에 빽빽한 매화송이를 그려냈다.

그리고 위험스럽게 느껴지는 기류가 마치 저녁 해가 지평선으로 사라지기 전 그 위로 아스라이 퍼지는 노을과도 같이 수평으로 그어지는 선을 따라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파파파팟-----!

허공에 폭죽이 터지듯 작은 폭발음과 함께 불꽃이 터지고 있었다. 자하진인의 검이 두려워서였을까? 다섯 마리의 혈룡이 포효하며 사납게 요동쳤다.
  
콰아----

허나 그것도 잠시였다. 승부를 보리라 온 힘을 쏟아 부은 이 접전에서 그는 잠시 미소를 지었다가 곧 바로 신음을 흘려야 했다. 무의식 속에 잠재되었던 두려움이 극대화되고 있었다. 다섯 마리의 혈룡들은 커다란 입을 벌리며 자신의 검막을 뚫고 파고들었고, 날카로운 발톱은 자신의 전신을 할퀴고 있었다. 

선을 이루며 피워냈던 매화송이는 산산이 흩어져 버리고, 노을을 닮은 검기는 더 이상 뻗어나가지 못하고 사라졌으며, 어떠한 것도 파고들 수 없다고 생각했던 빽빽한 검막은 갈기갈기 찢어져 버렸다.

“허--억----!”

그리고 이어지는 맹렬한 고통. 허나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자신의 전신에 인간으로서는 참을 수 없는 둔탁한 충격을 느끼는 순간 그의 입에서는 피분수가 뿜어졌고, 그의 몸은 가랑잎처럼 사오 장 허공을 날며 땅에 처박혔다.

“사부님....!”
“장문인...!”

화산사검과 황용이 다급하게 내동댕이쳐진 자하진인에게 다가들며 불렀지만 이미 자하진인의 의식은 온전하게 남아있지 않았다.

예리한 흉기가 무수히 지나간 듯한 자국과 함께 갈기갈기 찢어진 의복 사이로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더구나 가슴과 복부에 박혀 있는 품자(品字) 형태의 붉은 색 장인(掌印). 그 모습은 너무나 섬뜩했다. 장력이되 주위는 마치 예리한 칼로 난도질 친 것과 같고, 그 중심에는 언제나 보는 이로 하여금 주눅이 들게 만드는 핏빛 장인을 남기는 혈룡장.

화산의 인물들 뿐 아니라 좌중 인물들의 얼굴도 어느새 핼쑥하게 변해있었다. 너무나 무서운 무공이었다. 다섯 개의 붉은 기류가 혈룡의 형상이었는지는 단정할 수 없었어도 그 결과는 너무나 참담했다. 신검합일의 경지에 오른 자하진인이 단 일수에 당한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
 
핏빛 기류에 휩싸여있던 설중행의 모습이 서서히 나타났다. 옷깃과 허리 아래로 베인 옷자락이 보였지만 피가 나오는 것 같지는 않았다. 얼굴에는 냉정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핏기를 잃은 모습이었다. 혈룡장은 공력을 심하게 소비하는 단점이 있는 무공이었다.
#천지 #추리무협 #무협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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