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내시를 없애고 조선 왕을 약화시키라"

등록 2007.09.12 08:51수정 2007.09.12 0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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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일전쟁(1894년) 승리로 조선에서 청나라를 몰아낸 일본이 조선지배를 위해 이후 지속적으로 추진한 것 중 하나는 바로 왕권약화였다. 왕권약화라는 목표를 위해 일본이 선택한 방법 중 하나는 내시제도 해체였다.

1894년부터 1908년까지 일본이 조선의 내시제도를 해체하기 위해 어떠한 방법을 구사했는지를 이해하기 위해, 내시제도에 관한 연구를 축적해온 대구대학교 사범대학 역사교육전공 장희흥 교수의 논문 ‘갑오개혁 이후 내시부의 관제 변화와 환관제의 폐지’를 살펴보기로 한다. 이 논문은 한국동학회가 2006년에 발행한 <동학연구> 제21집에 수록되어 있다.

‘조선 왕권을 약화시키려면 내시제도를 해체해야 한다’고 일본이 생각한 것은, 조선 왕의 권력이 내시를 통해 구현되고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주한일본공사관기록> 권 7에 의하면, 당시 일본측이 파악한 조선 궁궐 내부의 상황은 다음과 같다.

“조선 왕실의 관습에서는 국왕과 왕비의 옆에서 항상 시중들거나 봉사하는 사람은 종실·외척·내관 혹은 친밀한 근신(近臣)이며, 국무대신 등에 대해 국왕이 인견을 허락하는 일은 매우 드물다.”

이에 따르면, 평소에는 아무리 고위 관료일지라도 왕을 알현하기가 힘들며 왕에게 접근할 수 있는 종실·외척·내관이나 최측근 관료들뿐이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일본인들은 ‘매우 제한된 일부의 사람들을 제외하면 조선 왕에게 접근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다’는 점을 파악했다.

조선 왕과 접촉할 수 있는 사람은 종실·외척·내관·근신뿐이라는 사실을 뒤집어놓고 보면, 조선 왕과 친밀한 유대를 맺을 수 있는 사람은 이들 뿐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그리고 이는 조선 왕의 권력이 이런 사람들을 통해 구현된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와 같은 인식에 따라 일본은 1894년 이후로 조선 내시를 왕으로부터 떼어내기 위한 지속적인 작업에 착수했다. 종실이나 외척은 어차피 혈연이나 혼인으로 맺어진 관계이므로 이들을 왕으로부터 떼어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고, 또 근신이란 것은 그 범위 자체가 불명확하므로 제도적으로 이들을 떼어낸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일본의 노력은 법률개편을 통해 내시제도 자체를 없애는 데에 집중되었다. 위 논문에 소개된, 청일전쟁 이후의 내시제도 해체과정은 대략적으로 다음과 같다.

제1차 김홍집내각 - 내시부에서 내시사로 개칭(1894년 7월)


청일전쟁 시기에 소위 갑오경장에 착수한 일본은 조선의 궁중과 부중(정부)을 분리시키는 일에 착수했다. 중국이나 일본과 달리 조선에서는 본래 궁중과 부중이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았다. 중국에서는 궁중이 부중보다 우위에 있었고 일본에서는 부중이 궁중보다 우위에 있었지만, 조선에서는 그 같은 구별이 없었기에 궁중과 부중의 권한관계나 재정 등이 상호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았다.

그런데 제1차 김홍집내각 하에서 일본은 궁중과 부중을 분리하고 일본식의 궁내부를 둠으로써 부중에 대한 조선 왕의 영향력을 제거하려 하였다. 궁중보다는 부중에게 우위권을 주는 일본식 제도를 도입함으로써 조선 궁중과 조선 왕의 권력을 약화시키려 한 것이다.

이때에 종래의 내시부는 내시사로 바뀌면서 궁내부에 편입되었다. 하지만, 명칭만 바뀌었을 뿐 내시제도의 성격이나 내시의 인원 등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제2차 김홍집내각 - 내시사 폐지(1894년 12월)

이 시기에 일본측은 왕명을 출납하던 승선원을 폐지하는 등 왕권약화작업에 더욱 더 박차를 가했다. 그리고 이때 일본은 종래의 내시사를 폐지하고 내시들을 시종원 산하의 봉시(奉侍)로 배치하였다.

내시부를 내시사로 바꾼 데에 이어 불과 5개월 만에 내시사마저 없애고 이들을 시종원에 배치한 것이다. 또 종래의 내시들이 봉시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궁궐에서 활동하게 된 것이다.

러일전쟁 이후 - 내시 감축 요구(1905년)

청일전쟁 이후 한동안은 일본이 조선을 장악할 것처럼 보였지만, 삼국간섭·아관파천 등을 거치면서 조선에서는 러시아-일본의 세력균형체제가 형성되었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조선 고종은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를 칭하는 등 왕권강화작업에 착수하였다.

그러나 1899년에 러시아가 물러감에 따라 조선은 일본의 단독 수중에 떨어지게 되었고, 1905년 러일전쟁 이후에는 조선이 일본의 확실한 독무대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에 따라 일본은 조선의 왕권을 약화시키기 위한 차원에서 조선 내시의 감축을 요구했다. 황현의 <매천야록>은 1905년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일본인들이 내시감축을 요구하므로 모든 환관들은 한 곳에 모여 통곡을 하였다. 이에 김종한은 이근택을 꾸짖어 말하기를 ‘당신들은 내시들이 나라를 그르쳤다고 하지만, 결국 매국을 한 사람들은 당신들이 아닙니까? 우리는 일본 사람과 반면(半面)도 없는 사이이지만, 이렇게 어두운 밤에 살려달라고 애걸하고 있는데, 도리어 내시들에게 핑계를 대고 있습니까?’라고 하였다.”

일본인들의 감축요구에 맞서 내시들이 한 곳에 모여 시위를 벌였다는 이야기는, 최근 SBS 드라마 <왕과 나>에서 예종의 내시부 개혁작업에 대항해 조치겸(전광렬 분) 이하 내시들이 양물 단지를 들고 시위를 벌인 장면을 연상케 한다.

궁금령 제정- 내시의 궁궐 출입 제한(1906년 7월)

내시직 감축에 이어, 일본이 조선 왕과 내시의 관계를 끊기 위해 시행한 일 중 하나가 1906년 7월의 궁금령(宮禁令)이었다. 궁금령이란 ‘궁중에 필요 없는 관리가 많고 군주의 측근들이 국정을 좌우하는 폐단이 있다’는 명분하에 일본측이 자국 경찰관들에게 궁궐 경비를 맡기고 문표를 소지한 자 외에는 출입을 엄금한 것을 가리킨다.

이로 인해 내시들의 궁궐 출입이 어렵게 되었고 또 이 시기에 많은 내시들이 궁궐을 나갔다고 위 논문은 말하고 있다. 주로 내시들의 보좌를 받던 조선 임금으로서는 더욱 더 고립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궁금령’으로 인해 서로 접촉하기 힘들게 되었으므로 왕과 내시들은 서로를 더욱 더 ‘궁금’해 하지 않았을까?

궁내부 개편 - 내시직 폐지(1907년 11월)

순종 즉위 후인 1907년 11월 27일에 반포된 포달 제161호 ‘궁내부 관제개정 건’에서는 아예 내시직 자체가 보이지 않는다. 내시직이 폐지된 것이다. 이 시기인 1908년 전후에 일본이 대대적인 궁궐 인원감축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종래의 내시들이 대부분 출궁을 당했다는 것이 학계의 연구성과다.

장희흥은, 1926년 2월 1일부터 3월 31일까지 순종 임금의 일상생활을 기록한 <내전일기>에 협시(挾侍)들이 나오는 것을 보아 내시들 중 일부가 일제강점 이후에도 여전히 궁궐에 남아 순종을 보필했음을 알 수 있지만 내시제도 자체는 1908년을 전후하여 소멸되었다고 강조했다. 일부 내시들이 내시 신분이 아닌 일반 신분을 갖고 순종을 보좌했던 것으로 보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일본은 조선 왕의 권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내시부를 내시사로 개칭하고 ▲내시사를 없애고 내시들을 시종원 산하의 봉시로 개칭하고 ▲러일전쟁 후에 내시들의 인원을 감축하고 ▲궁금령을 통해 내시들의 궁궐 출입을 제한하고 ▲순종 즉위 후에 궁내부를 개편하면서 내시직 자체를 폐지하는 등 일련의 작업을 전개했다.

이와 같이 조선에서는 왕권의 운명과 내시제도의 운명이 함께 연동되는 모습을 보였다. 이처럼 내시란 본래 왕의 수족이 되어 왕을 보좌하는 역할을 해왔다. 왕이 살면 내시도 살고 왕이 죽으면 내시도 죽는 그런 관계가 왕과 내시 사이에 존재했다.

그런데 과거 역사 속에서 일부 내시들이 왕을 시해하는 데에 가담한 사실이 지나치게 확대 해석되어, 오늘날 한국에서는 내시를 ‘어두침침한 곳에서 왕의 시해를 모의하는 자’ 쯤으로 인식하는 일부의 경향이 있다. 한국의 TV 드라마에서 내시의 부정적 측면이 지나치게 부각되는 것도 과거의 몇몇 사례에 대한 확대 해석의 결과일 것이다.

위의 <매천야록>에 실린 것처럼 구한말 내시 김종한은 “당신들은 내시들이 나라를 그르쳤다고 하지만, 결국 매국을 한 사람들은 당신들이 아닙니까?”라면서 “도리어 내시들에게 핑계를 대고 있습니까?”라고 외쳤다. 내시들의 억울한 심정을 대변하는 말일 것이다.

내시가 왕권약화에 기여하는 존재라면 구한말에 일본이 지속적으로 조선 내시의 약화를 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내시는 왕의 수족이라는 판단 하에서 그렇게 한 것이다.

궁궐 밖에 별다른 사회적 기반도 없이 연인을 바라보듯이 평생 왕만 바라보고 산 내시들에게 지나친 혐의를 씌운다면, 자기 집단과 계층의 이익만을 위해 왕을 독살한 정치세력이 관심 밖으로 밀려날 위험을 배제할 수 없을 것이다. 매스컴에서 흥미 위주로 내시의 역할을 지나치게 강조하면, 권력교체의 역사 속에 담긴 사회적 계층대립의 진면목을 놓치는 우를 범할 수 있을 것이다.
#왕과 나 #내시 #장희흥 #동학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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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시사와역사 출판사(sisahistory.com)대표,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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