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를 깎는 여인'헤라르트 테르 보르흐, 1660년경, Kunsthistorisches Museum, Wien, Gemaldegalerie, Vienna
비엔나 미술사박물관
이제, 3곳 전시회의 마지막 작품 소개 글이네요. 이번 글에서는, 이제까지 소개해 드린 <비엔나 미술사박물관전> 그림 중에서 가장 독특한 그림을 하나 소개하겠습니다. 초상화도 아니고, 풍경화도 아니며, 신화나 성서 속 이야기는 더더욱 아닙니다. 그렇다고 어떤 사건을 암시하는 역사화도 아닙니다.
지금 시대야 어떤 소재든 그림의 소재가 될 수 있는 자유로운 화풍의 시대이지만, 위 그림은 아무래도 거장의 반열에는 들어갈 수 없는 그림입니다.
한 여인이 어두운 방에서 사과를 깎고 있고, 그 모습을 딸이라고 짐작되는 아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고 있습니다. 둘은 외출복 차림인 것 같은데 뭔가 체념한 듯 그저 사과를 깎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이는 그런 어머니가 이상한 것인지도 모르지요. 그림은 정말 아름답고 섬세하지만 너무 ‘’평범합니다‘.
그렇습니다. 너무나 평범한 일상을 그린 그림이 맞습니다. 그림의 소재가 되기에는 물감이 ‘아까울’ 수 있는 그림입니다. 그런데 이런 그림을 그리는 풍토가 한 시대를 주름잡습니다. 바로 17세기 네덜란드의 ‘장르화’가 그것입니다.
“좀더 무난하게는 ‘풍속화’라고 부를 수도 있지만, 풍속화는 시대와 지역의 구분이 없는 총칭인 반면, 장르화는 일상생활을 묘사한 17세기 네덜란드 회화와 거기서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유럽 회화만을 꼭 집어 지칭한다.”(<일상 예찬> 중에서)그러니까 장르화는 17세기가 끝나갈 무렵이면 사라져 갈 한 때의 유행인 셈입니다. 물론 이웃 나라로 파급되어 19세기까지 이어지지만, 17세기 네덜란드 회화의 정교한 모습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건 네덜란드만이 가지는 사회적 독특성 때문입니다.
19세기 프랑스에서 인상주의가 처음 생겨났을 때 처음에는 엄청난 비난을 받았고, 시련기를 거치고 나서야 세상의 인정을 받게 되고 미국 등지로 전해질 수 있었던 것과는 달리, 장르화는 그런 모진 기간을 거칠 것도 없이 자연스레 생겨났다가 사라집니다.
이탈리아 거장들의 그림이 남성적이라고 한다면, 장르화는 여성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면모가 다분합니다. 우선 여성들이 주된 등장인물로 나오고, 그들의 일상 특히 가정 내에서의 노동을 그린 그림들이 많고, 특별하지 않은 아이들의 모습들이 화폭에 대거 등장한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전에 소개해 드린 렘브란트의 그림 ‘책을 읽고 있는 화가의 아들, 티투스 반 레인’의 경우도 넓게는 장르화의 영역에 집어넣을 수 있고, 렘브란트도 그 시대 사람입니다. 그러나 렘브란트는 초상화와 역사화에 매진했기 때문에 장르화 영역에서는 제외해도 무방합니다.
장르화는 여성들이 부각되는, 여성들의 가사가 그림의 소재가 되는, 당시로서는 아주 특별한 경우입니다. 이탈리아에서 유학한 화가들이 이런 그림을 그릴 수는 없습니다. 도저히 그림의 소재가 될 수 없는 것들이었거든요.
다시 네덜란드 사회를 살펴보겠습니다. 17세기 네덜란드는 스페인으로부터 종교적으로 독립하면서, 왕과 왕가의 종교에서 자유로워졌습니다. 그래서 종교의 자유가 생겼지만 그래도 주된 세력은 칼뱅주의였고, 칼뱅주의는 모든 그림을 우상으로 여겨서 교회에서 추방했습니다. 당연히 그림은 종교의 세상을 그리지 못했습니다. 그것이 첫 번째 이유입니다.
당시 네덜란드 사회는 상업이 발달해서 중산계층이 발달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물질적 풍요와 자유를 누리고, 무역을 통해 넓은 세상을 볼 수 있게 되었고, 새로운 일들이 곁가지로 생겨났습니다. 당시 네덜란드에서 과학이 진보했다는 것은 이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두 번째 이유가 됩니다.
그건 사람들에게 보이는 세상이 달라졌다는 내용도 됩니다. 일상이 더욱 중요해졌다는 말도 됩니다. 사람들은 교회를 꾸미는 대신 가정을 꾸밉니다. 중산층이나 평민들도 그림을 구매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건 부가 축적되었다는 말도 되지만, 그림이 점점 더 일상화되었다는 말도 동시에 성립합니다. 수요자는 화가들에게 원하는 내용의 그림을 요구했고, 화가들은 그에 따라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림의 대가, 즉 그림값은 떨어지고 화가의 위상도 궁정화가와는 거리가 한참 멀어졌습니다. 그건 그림이 세속화되었다는 면모도 있습니다.
그래도 어디까지나 화가는 예술가입니다. 예술가는 자유로운 사람들입니다. 즉 그리고 싶은 것을 그리는 사람들입니다. 그들 눈에 실내가 주목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대단한 일이 아닌 것들이 그림의 소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오히려 그 속에서 더 아름다운 것들이 있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모네가 ‘빛’을 발견했듯이 17세기 네덜란드 화가들은 ‘일상’을 발견했습니다.
“네덜란드 화가들은 어떤 것에도 동요되지 않는 사물의 고른 흐름과 고갈되지 않는 일상적인 사소한 행위들을 소재로 삼아 기쁜 마음으로 좋은 그림을 그렸다.”(<일상 예찬> 중에서)그런데 이 장르화의 그림들을 보면, 서로 다른 화가들이 그렸는데도 그 그림들이 정말 비슷합니다. 어두운 실내에 한정하고, 여성을 그리며, 실내 장식을 중요하게 그립니다. 그리고 일상적 풍경의 행동을 암시합니다. 오래 전부터 벼르던 책 <일상 예찬>을 보고서야 알게 된 사실입니다.
먼저 여성들의 위상이 높아집니다. 여기서 조금은 역설적인 면모가 있는 내용을 소개하겠습니다. 즉 남녀 역할 분담이라는 측면입니다. 이 시대 네덜란드 사회에서는 남녀의 역할이 거의 절대적으로 굳어집니다. 남자는 나가서 돈을 벌어오고, 여자는 가사 일을 책임지는 것 말입니다. 그건 남녀 차별의 문제가 아닙니다.
가사 일에 있어서는 그러니까 가정 내에서는 여성이 주도권을 쥐게 되었다는 내용이 중요합니다. 여성이 나가서 일하는 것이 없는 것은 아니나, 일상이 중요해진 사회에서 여성이 차지하는 몫이 더욱 커진 것입니다.
그런데 남자가 일을 하는 현장은 화가들에게 ‘일상’ 즉 그림의 소재가 되지 못했습니다.
그 단적인 예를 들겠습니다. 당시 네덜란드는 스페인에서 독립했지만, 더 정확히 하면 ‘독립 투쟁 중’이라는 말이 맞습니다. 장르화가 유행한 17세기의 80여 년 기간 중에 네덜란드는 40여 년의 기간을 전쟁으로 보냅니다. 네덜란드 지배 세력은 이렇게 바깥일에 몰두하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흔했던 전쟁 상황에도 불구하고 전쟁을 소재로 한 그림은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일상 예찬>에 소개된 그림 100여 점의 그림 중 남자가 노동을 하고 있는 그림은 두 점 정도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것도 가족이 옆에 있는 그림입니다. 또 군인을 소재로 한 그림도 졸고 있는 모습이거나, 카드놀이를 하는 모습입니다. 다시 말해서 남자들의 노동 현장은 화가들이 그리는 ‘일상’이 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가정에서, 실내에서 그 일상을 발견했습니다.
그러나 긍정적인 것만은 아닙니다. 소위 ‘풍속화’라고 말해도 될, 남녀간의 사랑 그것도 자랑스레 말할 아름다운 사랑이 아니라, ‘돈’이 거래되는 남녀 간의 만남, 은근히 치근덕거리는 모습, 술자리도 정말 많이 그린 것입니다. 칼뱅주의는 도덕을 엄격히 중요시했는데, 물론 다른 교파도 그렇지만, 그것에 상관없다는 듯이 비도덕적인 모습을 그린 그림이 장르화에 많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노골적인 장면을 그린 것은 없습니다. 다만 그런 것을 암시하고 기대하는 장면이 태연하게 그려진 것뿐입니다. (사랑의) 편지를 쓰거나 읽거나 하는, 밀고 당기는, 제안하거나 망설이는 그런 은근한 장면들입니다. 그런데 제 느낌입니다만 그 속에서도 여성은 여전히 주된 위치에 서 있습니다.
그러니까 장르화 화가들은 도덕을 설교하거나 암시하는 그림을 그리는 데서 자유로웠던 것입니다. 도덕, 비도덕을 떠나서 있는 그대로의 일상을 그린 것입니다. 관객의 해석에서 자유로웠습니다. 그 그림에 알레고리가 있다고 제3자가 해석하든 안하든 그것에서 자유롭습니다. 실제로 성을 상징하는 사물(개, 굴, 앵무새) 등이 그림 속에 즐비합니다만, 화가가 그걸 의도해서 그렸는지는 불분명합니다.
그러나 더 주된 것은 이것이 아닙니다. 주된 것은 여성이 가정 안에서 하는 일들입니다. 아이에게 글을 가르치거나, 아이들 돌보거나, 음식을 준비하거나, 책을 읽거나, 연주를 하는 장면도 주되게 차지합니다. 어쩌면 사랑의 주도권도 여성에게 있는지도 모릅니다. 또한 중요한 것은 그런 그림을 그릴 때 화가가 너무도 정성껏 그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주 사소한 일상, 한 아이가 지친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는 장면 같은 것도 그림의 소재가 됩니다. 사물들도 제 위치를 갖습니다. 너무도 세밀하게 아름답게 사물들이 그려집니다.
이제 우리의 화가, ‘사과를 깎는 여인’을 그린 헤라르트 테르 보르흐에게로 돌아갑니다.
<일상 예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