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아이엠샘>의 주인공 이산(양동근)과 은별(박민영)
KBS 제공
강하고 독하고 자극적인 드라마들을 보다 보면 이따금씩 순한 드라마들이 보고 싶어진다. 마치 카페인 없는 커피나 니코틴 없는 담배처럼, 밍밍하고 심심하지만 이따금씩 위안이 되고 활력소가 되는 그런 드라마. <아이 엠 샘>(이진매 극본, 김정규 연출, KBS)이 바로 그런 경우이다.
이 드라마는 <거침없이 하이킥>의 강유미 캐릭터에서 출발했다고 봐도 틀림이 없다. 공부도 못 하고 성격도 까칠한 데다 뭔가 미스테리를 지닌 도발적이고 맹랑한 여학생 강유미는 그 성격 그대로 정체 모를 조폭 보스의 외동딸 유은별(박민영 분)이 되어 학원가로 진출했다. 도무지 학교와는 친할 것 같지 않은 그녀가 너무나 인간적인 학교 선생 장이산(양동근 분)과 불법입주과외를 빌미로 동거에 들어가면서 가족시트콤은 코믹학원물로 확산, 변형되었다.
그리하여 시트콤처럼 가볍고, 청소년드라마처럼 해맑고, 명랑만화처럼 시시껄렁한, 소박한 로맨틱코미디가 만들어졌다. 무겁지도 리얼하지도 않은 사건들에, 진하지도 절절하지도 않은 로맨스, 그렇다고 <화산고>나 <다세포소녀>처럼 요란하게 튀거나 화끈한 것도 아니다.
이렇게 밋밋하고 싱거움에도 불구하고 이 드라마, 묘하게 사람을 끄는 구석이 있다. 그건 아마도 현실감이 결여된 시공간과 뭔가 나사가 빠진 듯한 엉성한 인물들의 적실한 조합에서 비롯된 듯하다. 여기에는 학생 같지 않은 학생들과 선생 같지 않은 선생들과 조폭 같지 않은 조폭들이 등장한다. 어리숙한 선생들과 애늙은이 같은 아이들과 어설픈 조폭들이 공존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드라마의 공간은 결코 현실 속에는 존재하지 않는 곳이다. 명문고라는 이름과는 정반대로 이곳에는 우등생도 모범생도 없이 불량학생들만 우글거린다. 복장에서 두발, 학습태도에서 관심사까지 이들은 도무지 고3이라고는 볼 수 없는 아이들이다.
여기에는 경쟁에 목매는 참담한 교육현실과 극성맞은 부모들이 사라졌다. 대신 그 자리에 놓인 것은 자신이 스스로 돈을 벌어야 하거나 각자 자기 세계에 빠져있는 아이들이다. 이들에겐 대학이 목표가 아니라, 단지 졸업이 목표이거나 아니면 다른 세계로의 이탈이 목표이다.
이에 걸맞게 선생들 역시 선생 같지 않은 선생들이다. 선생들은 학생들에게 공부하라고 닦달하지 않고, 틈만 나면 훈화와 훈계의 말씀을 늘어놓지도 않으며, 권위를 내세우지도 않고, 쓸데없이 학생들을 괴롭히지도 않는다.
이산과 은별, 무신(최승현 분)과 사강(박채경 분) 들을 괴롭히는 건 학교 밖 어른들과 조폭들이다. 부재하거나 무책임한 부모들과 그들과 연루된 조폭들, 심지어 무식하고 폭력적인 형사까지, 그 어른들의 세계는 이산과 아이들을 위기에 몰아넣고 곤경에 처하게 하지만, 또한 그들을 같은 편으로 만들어주는 매파 역할을 하기도 한다. 물론 조폭들조차 잔인하고 비정한 대신 어리버리한 허점투성이의 인간들이다.
그리하여 이 드라마에서 악의적이거나 독한 인물들은 찾아볼 수 없다. 그 흔한 속물적 인물이나 냉혹한 조직논리나 출세지향적 욕망 따위도 없다. 단지 현실의 각박함에서 한껏 자유로운 인물들 사이에 흐르는 사랑과 우정, 질투와 연민 등 뒤엉킨 감정의 연쇄가 있을 따름이다. 사각, 오각, 육각으로 확대되는 물고 물리는 복잡한 애정의 사슬은 이들이 서로서로 관계 맺는 방식의 하나일 뿐이다. 이들은 서로 눈여겨보고, 신경 쓰고, 관심 갖고, 개입하고, 도와준다. 대립하고 갈등할 때조차 결코 적대적이거나 그리 심각해지지 않는다.
그 세계의 중심에 이산이 있다. 양동근이 만들어가는 이산이야말로 이 드라마의 독특한 비현실감을 생산한다. 느릿느릿 엉성한 듯 꽉 짜이지 않은 말투와 풀어헤친 듯 방만하고 나태한 동작은 마치 중력의 법칙을 벗어난 사람마냥 보인다. 이는 그에게 어떤 틀이나 구속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와 여유를 부여한다.
이산은 소심하고 나약하며 천진하고 순박하지만, 그를 평범한 소심남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것은 이렇게 규격화되지 않고 빠져나가는 어떤 잉여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가 아이들에게 보여주는 무한한 애정은 스승의 제자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자신도 모르게 주변으로 뻗어나가는 동질적 타인에 대한 동지애 같은 것이다.
물론 이산이 아이들에 대해 애정과 헌신으로 매진하기까지 그에게는 온갖 곤경과 엉뚱한 상황, 해프닝들이 발생한다. 집나온 자신을 우연히 하룻밤 돌보아준 것에 감명받은 은별은 이산을 자신의 과외선생으로 점찍고 이산의 학교로 전학까지 간다. 그렇게 이산은 무지막지한 조폭 보스의 볼모가 되어 울며 겨자 먹기로 그 딸과 동거에 들어간다. 집안 곳곳에 CCTV가 설치되어 있고, 시커먼 어깨들이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막무가내인 은별은 자신을 종 부리듯 한다.
이렇게 선생과 학생의 권력관계는 정반대로 뒤집힌 상태에서 시작된다. 무엇보다 이산을 곤혹스럽게 하는 것은 이런 상황이 이제 막 서로의 감정을 알게 된 신소이(손태영 분) 선생과의 로맨스를 방해한다는 거다. 은별과 이산의 비밀스러운 동거는 학교에 소문을 만들고, 은별과 연루된 사고가 터질 때마다 달려가는 이산을 보며 소이의 오해와 억측은 날로 무성해진다. 은별이 이 오해와 소문의 상황을 은근히 즐기는 반면 이산에게는 모든 것이 끔찍한 악몽이다.
그러나 오해와 소문은 항상 말이 씨가 되어 예정된 결과를 낳는 법이다. 밀폐되고 독립된 한 공간 안의 동거 남녀 사이에 로맨스가 싹트는 것은 당연지사. 서로 부딪치고 으르렁 거리면서, 같이 사는 사람들 끼리의 밑정과 의리가 쌓여간다. 안으론 육체적 긴장과 갈등이 팽배해 있고, 밖으론 의혹과 감시의 눈길이 번득이고 있다. 그리하여 이들 사이엔 비밀을 공유한 자들이 지니는 은밀한 소통과 결속이 생겨난다. 그리고 그 소통과 결속은 주변 인물들에게로 점점 확대되어 간다.
흥미로운 건 이산이 곤경에 처하면 처할수록, 그가 아이들 일에 휘말려들면 들수록 점점 그 힘에 끌려가는 쪽은 이산이 아니라 아이들이라는 사실이다. 뿔뿔이 흩어져 제멋대로인 아이들이 하나둘씩 이산의 힘에 점점 동화되어 가는 것이다. 은별과 이산이 조폭들에게 납치되어 아무런 저항도 할 수 없는 이산 대신 무신이 그들을 구해낼 때조차, 그 자리에 버티고 있는 그 존재만으로 이산은 든든한 버팀목이 된다. 그가 교장에 맞서 끝까지 무신을 포기하려 하지 않을 때, 그가 설득하는 쪽은 교장이 아니라 바로 무신이다.
그리하여 선생과 학생의 뒤집힌 권력관계가 다시 제자리를 잡는 것은 이처럼 이산에 동화된 아이들이 조금씩 제자리를 찾아가는 것을 통해서이다. 이는 은별이 이산을 사랑하게 되면서 점점 그에게 익숙해지고 길들여지는 것과 동시적으로 진행된다. 이 모든 것을 이산은 어떠한 설교나 훈육과정 없이, 단지 이해하거나 동조하거나 옆에서 지켜봐주거나 함께 있는 것만으로 이루어낸다. 이것은 정확히 그가 도덕적이고 바른 인물이기 때문이 아니라, 정반대로 그가 일체의 권위를 부정하는 규범화되지 않는 자유와 이질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서 다양하고 복잡하게 얽힌 로맨스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이산이 소이와 은별 중 누구와 맺어질 것인가 하는 문제 역시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게 된다. 이리저리 얽힌 관계에서 때론 사랑보다 우정이 더 크게 느껴지기도 하고, 이산과 아이들의 유대가 무엇보다 중요해지기도 한다. 학생과 선생과 조폭이 어우러져서 빚어내는 야릇한 연대와 우의야말로 이 명랑코믹드라마의 진짜 재미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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