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고르기마음에 드는 책이 있으면 한 권도 좋고, 두 권도 좋고, 세 권도 좋습니다. 주머니 닿는 대로 넉넉하게 고르면 됩니다.
최종규
〈2〉 말을 넘어서주머니가 텅 비니, 책을 구경하는 마음이 가볍지 않습니다. 다문 천 원이라도 있으면서 ‘천 원짜리 책이라도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조차 아니니까요. 마음이 벌써 여려졌나요. 책방 아저씨한테 외상도 되는지 물으려다가 그만둡니다. 문득, 은행계좌로 넣으면 될까 싶은 생각.
책 볼 생각보다, 책값 걱정을 하느라 책시렁과 눈길을 제대로 못 맞추고 있다가 《백기완-거듭 깨어나서》(아침,1984)라는 책을 끄집어내 봅니다. 헌책방에서 드문드문 보는 책이며, 저는 예전에, 얼추 열 해쯤 앞서인가 읽었던 책입니다.
하지만 이 책에 담은 이야기가 무엇인지 잘 안 떠오릅니다. 읽은 지 열 해도 넘었으니 다시 읽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그래, 예전에 읽었던 책은 여기저기 잔뜩 밑줄을 그어 놓았으니, 아무것도 그어지지 않은 말끔한 책으로 다시 읽으면서 내 마음에 와닿는 곳을 찾아보아도 좋겠지.
책 안쪽에는 ‘정동익’이라는 분이 ‘박찬종’이라는 사람한테 드린다는 손글씨가 있습니다. ‘정동익’이라는 이름이 낯익구나 싶어 판권을 보니, ‘아침 출판사’ 펴낸이. ‘박찬종’은 정치하는 사람.
.. 설사 그들 두 젊은이가 이래도 한 세상 저래도 한 세상 하며 자살을 했다고 하드라도 그것으로서 일본제국주의에 대항하며 피흘리는 조국의 역사가 허무에 빠지는 것은 아니었으며, 다만 심약한 그들 한 쌍이 제국주의 침략정책에 오염된 것이었으니, 그 당시 한반도 국경지대에서 들고 일어난 독립군의 이야기는 못하게 하면서 이들 병든 사랑이야기만은 얼마든지 떠돌아다니도록 문화정책을 써 온 것은 그네들의 제국주의 지배의 위기를 드러낸 것에 지나지 않았다 .. 〈146쪽〉책은 아주 깨끗합니다. 제 생각입니다만, 박찬종 님은 <거듭 깨어나서>라는 책을 받기만 했을 뿐, 읽지는 않았구나 싶어요. 책 선물 받은 모든 사람이 자기가 받은 책을 고맙게 여기며 차곡차곡 읽지는 않으니까, 뭐. 덕분에 저로서는 스물세 해나 지난 묵은 책을 아주 깨끗한 채로 만날 수 있습니다.
박찬종 님이 지난날 이 책을 읽었다면 백기완 할아버지한테 여러모로 슬기나 깜냥을 얻었을 테지만, 박찬종 님은 그렇게까지 하지 않았습니다. 그분한테는 안타까운 노릇입니다. 그렇지만, 스물세 해가 지난 이 자리에서, 누군가가 고맙게 받아안을 수 있도록 책 간수를 깨끗하게 해 주었으니, 우리 세상에 좋은 일을 하나 베풀어 준 셈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