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수한 사람은 하늘의 운명을 타고날까

[녹색의 장원 36] 장수한 종손과 단명한 종손

등록 2007.09.18 08:46수정 2007.10.01 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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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한 신문기사에서는 경제적으로 풍요롭고 의료해택 등 생활조건이 좋은 나라 사람들은 평균수명이 길고 빈곤하고 생활조건이 열악한 나라 사람들은 평균수명이 짧다는 연구결과를 소개하였다. 이는 의학의 발달에 따라 사람의 질병을 치료할 수 있는 여건이 좋아지고 있지만 의료해택 등 현재의 생활여건에 따라 평균수명도 각 나라 지역별로 차이가 난다는 이야기로 해석할 수 있을 것 같다.

이같은 연구결과를 보면서 우리나라 조선시대 사람들의 평균수명은 어느 정도였고 오랫동안 장수했던 사람은 어떤 사람이었나를 생각해보게 된다.


조선시대사람들의 평균수명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조선시대 우리나라 사람들의 평균 수명은 약 44세 가량을 전후하였을 것으로 보고 있다. 지금의 나이에 비하면 너무 짧은 것이지만 이를 통해 당시의 생활수준이나 의료해택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짐작해볼 수 있다.

영조의 영정 영조는 조선왕조에서  가장 장수한 왕으로 83세까지 사는 동안 재위기간만 53년이었다.
영조의 영정영조는 조선왕조에서 가장 장수한 왕으로 83세까지 사는 동안 재위기간만 53년이었다.자료사진

그러면 당시 이처럼 평균수명이 낮다고 해서 모두 장수를 하지 못했던 것일까? 결론은 아니다. 어떻게 보면 명이 긴 사람은 어느 시대에 살아도 오래 살다 간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는 세계사를 통해서나 왕조사를 통해서도 마찬가지고, 문중사의 해남윤씨가 인물들을 놓고 볼 때도 마찬가지다.

조선왕조에서 왕들은 평균수명이 약 48세 가량이었다고 한다. 어느 나라나 왕들은 대체적으로 그 권력에 비례해서 정쟁이나 독살의 위험 등 온갖 스트레스로 인해 그리 길게 살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래도 일반인들에 비해 평균수명이 긴 것은 성인이 되어 왕이 되고 최고의 의료혜택을 받기 때문인 것으로 보고 있다.

조선왕조에서 장수한 왕을 보면 태조가 74세, 정종이 63세, 숙종이 60세까지 살았으며 영조는 83세로 가장 장수한 왕으로 꼽힌다. 영조는 그의 재위기간만 해도 53년으로 이 때문에 손자인 정조는 성년을 넘긴 24세에 영조의 뒤를 잇는다. 당쟁의 회오리 속에서 탕평책을 쓰며 정치에 골머리깨나 앓았을 텐데도 오랫동안 살았음을 알 수 있다.


이에 비해 단종은 17세로 가장 일찍 사망했고 예종은 20세에, 헌종은 23세에 일찍 세상을 뜨기도 하였다.

종가에서 장수한 사람들


해남윤씨가 또한 이처럼 장수한 사람과 단명한 사람이 엇갈린다. 해남윤씨가의 종손 중에서 우리가 익히 잘 아는 고산 윤선도는 85세까지 살았다. 그리고 윤고산의 4대손인 낙서 윤덕희는 81세까지 살았다.

또한 종가의 며느리인 종부를 놓고 볼 때도 공재 윤두서의 어머니였던 청송심씨부인은 83세까지 살았다. 그리고 고산의 12대손 종부이자 현 종손의 조부인 윤정현의 처 광주이씨 부인은 90세까지 살았던 인물이다. 아마 가장 오래 살지 않았나 생각된다.

녹우당 사랑채 해남윤씨가 종택인 녹우당 사랑채
녹우당 사랑채해남윤씨가 종택인 녹우당 사랑채 정윤섭


이중 고산의 생을 놓고 보면 인간의 수명이 이미 누군가에 의해 예정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윤고산은 17C 사림정치기에 사화와 당쟁의 연속 속에서 중앙정계로 진출했다가 유배당하고 은둔하는 등 파란 많은 생을 보낸 인물로 당시의 정치적 상황을 놓고 보면 벌써 몇 번은 죽었을 수도 있었던 인물이다.

윤선도는 선조 20년(1587년)에 태어나 85세(1671, 현종12)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선조 ․ 광해군 ․ 인조 ․ 효종 ․ 현종 5대에 걸쳐 임금을 섬기고 살았는데 이는 조선왕조의 인물에 있어서도 그리 흔치 않는 일이다.

고산은 오랫동안 장수를 한 때문에 정치적으로는 많은 고난의 세월을 보내야 했다. 30세(광해군 8)에 이이첨을 탄핵하는 ‘병진소’를 올려 유배길에 오른 이래 그의 말년인 74세에도 예송논쟁의 와중에 함경도 삼수까지 먼 곳으로 유배를 떠나야했다. 

고산 영정 파란의 정치역정 속에서도 85세까지 장수하였다. 이 영정은 고산의 이미지와 달라 논란이 있다.
고산 영정파란의 정치역정 속에서도 85세까지 장수하였다. 이 영정은 고산의 이미지와 달라 논란이 있다.

고산은 서인의 영수인 송시열과의 예송논쟁에서도 알 수 있듯이 목숨을 건 한판 승부를 벌여야 했는데, 당시 남인은 서인과의 예송논쟁에서 한번씩 승리를 거두기는 했지만 유배길에 언제 사약이 배달될지 모르는 상황을 생각하면 목숨은 한낮 추풍 같은 것이었다.

고산과 치열한 예송논쟁을 벌이며 정적의 관계를 유지했던 서인의 영수 송시열도 83세까지 살았는데 우암은 사약을 먹고 죽었기 때문에 아마 자연사 했을 경우 고산보다 더 오랫동안 살았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적당한 스트레스가 오히려 인간의 생존의식과 활동에 도움이 된다는 연구가 있지만 고산의 삶을 보면 그의 천성적인 성격이나 체질 때문인지 아니면 천명이라는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어떤 영역에 의해서인지 알 수 없다.

고산에 대해 "용모가 단정하고 안색이 엄숙하며 굳세어 대하는 사람이 바로 볼 수가 없고 쏘아보는 눈빛이 섬연하다" 고 표현하고 있어 그의 성격은 직설적이고 불의를 참지 못하는 원칙주의자였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원칙을 중요시하는 성리학자들의 특징일 수도 있지만 고산 - 우암의 정치적 역정을 보면 정치가 인간의 수명에 미치는 영향이 어떤 것인지 연구 해볼 가치가 있을 것 같다. 

고산은 장수를 하여 다섯 아들 중 50세에 차남 의미가 죽고 82세에는 4남인 순미가 세상을 뜨는 등 생전에 자식의 죽음을 보아야 하는 슬픔을 겪기도 한다. 고산은 81세에 광양의 유배길에서 돌아와 보길도에서 생을 마칠 때까지 병으로 눕지 않고 자연사한 것으로 보여 당시로서는 천수를 누리고 살다갔다고 할 수 있다.

가장 장수한 광주이씨 부인

광주이씨부인 해남윤씨가 종부중에서 가장 장수했던 종부로 90세까지 살았다.
광주이씨부인해남윤씨가 종부중에서 가장 장수했던 종부로 90세까지 살았다.정윤섭

고산의 4대손이자 윤두서의 아들인 낙서 윤덕희는 81세까지 살았다. 이 과정에서 낙서도 병자년(1756년)에는 셋째아들 탁이 요절하고 장손자인 지정마저 26살의 나이로 후대를 잇지 못하고 까닭 없이 죽게 된다.

그리고 이듬해 정축년(1757년)에는 장남인 종이 세상을 떠나는 등 아들과 손자까지 잃게 되는 슬픔을 겪게 된다. 또한 둘째 아들 용은 33살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뜨는 등 집안에는 72세의 고령인 윤덕희만 남게 될 정도였다.

이로 인해 낙서는 아버지인 공재대의 재산을 형제들이 나누는 분재기(1760, 건륭2년)를 직접 작성하는 등 쇠약해져 가는 집안일을 끝까지 챙겨야 하는 수고로움을 겪으나, 집안에 대대로 내려오는 문헌들과 공재의 그림과 같은 가보들을 첩으로 묶는 등 지금까지 해남윤씨가의 고문헌들이 전해져 오게 하는데 큰 역할을 하기도 한다.

이와 함께 종부 중에서는 윤두서의 어머니였던 청송심씨부인이 83세까지 장수하였는데 공재공행장에는 어머니 청송심씨에 대한 이야기가 자주 나온다.

청송심씨와 함께 해남윤씨 종가에서 가장 장수를 한 인물은 고산의 12대손 종부 광주이씨 부인(이상래, 1882~1971) 이라고 할 수 있다. 광주이씨 부인은 90세를 장수한 덕에 조선왕조가 막을 내리고 일제하와 해방 그리고 새로운 현대국가로의 숨 가쁜 변화가 일어났던 시대를 모두 겪고 살다간다.

공재의 자화상 공재는 천재적인 화가였지만 46세로 단명하였다.
공재의 자화상공재는 천재적인 화가였지만 46세로 단명하였다.정윤섭

광주이씨 부인은 남편 윤정현이 69세라는 짧지 않은 나이에 작고하고 나서도 20여년을 더 살다가 간다. 이처럼 모진풍파를 다 겪고 살아서인지 말년에는 죽기 6년 전에 어서 세상을 하직하고 싶다는 유서를 남기기도 한다.

“어서어서 저 세상에 가서 우리 부모님 슬하에 있기를 원하나 이렇게 목숨이 질긴지…, 어서 싫증나는 이 세상을 하직하여 모든 일을 잊고… .”

목숨이 너무 긴 것도 아마 결코 행복한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이에 반해 해남윤씨가는 종통이 끊길 만큼 아주 단명한 종손이 나타나기도 하는데 이중 대표적으로는 공재 윤두서를 들 수 있다. 공재 윤두서는 46세에 생을 마감한다. 당시 조선시대의 평균 수명을 생각하면 그리 짧은 것도 아니지만 그의 학문과 예술적 재능을 생각하면 너무 일찍 생을 마감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해남윤씨가는 일찍부터 종가에 손이 없으면 양자를 입양시켜 종통을 이어가고 있었는데 19C 무렵이 되면 종손들이 모두 단명을 하여 대를 잇기 어려울 정도까지 된다. 윤두서의 손자인 지정은 26살의 나이로 후대를 잊지 못하고 죽고, 지정의 아들 종경은 독자로 아들 광호만 남긴 채 41세로 죽는다. 그러나 광호 역시 18세(1822)의 젊은 나이에 뒤를 이을 아들이 없이 죽게 되는 등 종가의 쇠락도 종손들의 단명으로 흥망성쇠를 좌우하게 되는 것이다.

사람이 살 수 있는 평균 삶(수명)은 대체로 이를 지배하고 있는 환경이지만 이 못지않게 한 사람의 수명(운명)은 어떤 천륜과 같은 이치가 작용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된다.

덧붙이는 글 | 해남윤씨가의 5백년 역사여행 이야기입니다.


덧붙이는 글 해남윤씨가의 5백년 역사여행 이야기입니다.
#녹우당 #장수 #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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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를 중심으로 지역의 다양한 소재들을 통해 인문학적 글쓰기를 하고 있다. 특히 해양문화에 관심을 가지고 <16세기 해남윤씨가의 서남해안 간척과 도서개발>을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은 바 있으며 연구활동과 글을 쓰고 있다. 저서로 <녹우당> 열화당. 2015년 등이 있다.


이 기사는 연재 대한민국 성인병 '이제 그만' 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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