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팔꽃 전설 - 3

등록 2007.09.18 09:30수정 2007.09.18 0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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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종을 들였다는 것이 사실이냐?”
성주에게 불려온 군장은 호색하기로 소문난 성주의 장남이 떠올랐다. 아무래도 집안에 그놈의 끄나풀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사실입니다. 하지만 죽은 제 부친을 뜻에 따랐다고 할 수 있으니 그리 괘념치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군장이 적당히 꾸며 변명하자 성주가 가볍게 웃었다.
“그 계집의 지아비가 네 부친을 구한 공이 있고 그에 따라 네가 거두려는 것은 무척 가상한 일이다. 그러나 계집의 딸이 천하의 절색이라는 것은 오해를 부를 소지가 충분하다. 나는 네가 여색을 탐하여 종을 들였다고 손가락질 당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성주는 아들에게 크게 실망하고 있었다. 험한 세상을 살아남기에 아들은 애초부터 실격이었다. 성주는 성격이 급한데다 아직 경험이 모자라지만 용맹하고 강직한 군장에게 크게 기대했다. 성의 장래를 이끌어 나갈 군장이 여색을 탐하거나 한눈을 파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았다.


“네가 겨우 여색이나 탐할 소인배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습니다. 소인이 비록 우둔하나 여색을 탐하여 과분한 기대를 저버릴 소인배는 아닙니다.”
“그래야지,”

성주가 흡족하게 웃었다.
“늙은 계집은 그냥 네 집에 두어 건사하고 딸년은 나팔수에게 보내도록 해라.”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깜짝 놀라는 군장을 바라보는 성주의 눈초리가 날카로워졌다.
“왜 놀라느냐? 내 말에 불만이라도 있는 것이냐?”
“그,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다른 것과 착각하였나 봅니다.”
군장이 황급하게 변명했지만 이미 속내가 드러난 다음이었다.

 

가만히 바라보던 성주가 조용히 말했다.   
“나팔수에게 계집을 주는 것을 반드시 포상이라고 생각하지 마라. 그놈은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한 놈이다. 이미 혼례를 치를 나이가 되었으니 계집을 주어 자식을 낳게 하여 새로운 나팔수를 길러내기 위한 것으로 생각하면 그만일 터이다.”
“알겠습니다. 다른 말씀은 없으십니까?”
“군졸들이 고생 많았으니 배불리 먹고 마시도록 할 것이며 죽은 자들의 가솔들에게 내릴 양곡이 몰래 덜어지는 일이 없도록 신경 쓰도록 해라.”
성주의 명을 받고 나오는 군장의 입술에 피가 배어나왔다.    

“이걸 어쩌느냐? 성주님이 너를 나팔수의 계집으로 만들려고 한단다,”
어미가 안절부절 못했다. 진달래를 군장에게 바쳐 호강을 해보려던 계획이 물거품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애초에 성주의 아들에게 갔어야 했다고 후회했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 애간장을 태우세요?”

당사자인 진달래는 의외로 태연했다.
“이것아! 갖은 고생 다하여 곱게 기른 외동딸이 나팔이나 부는 놈의 계집이 된다는데 어찌 애가 타지 않겠느냐?”
“나팔수의 아내가 뭐가 어때서 그러세요? 그렇게 좋은 혼처도 없어요.”

진달래의 말에 어미가 숭어뜀으로 펄펄 뛰었다.
"네가 지금 실성을 한 게로구나! 군장의 아들만 낳아주면 평생을 호의호식할 텐데 그것보다 나팔수의 계집이 더 좋다니, 그게 어디 말이나 되는 소리냐!”
“군장님의 첩실이 되는 것은 어차피 틀어졌지만 처음부터 마음에 없었어요.”

진달래는 어미가 자신을 팔아 호강하려는 것이 아주 내키지 않았다. 그러나 늙은 어미를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미 아내가 있는 데다 짐승 같은 눈초리로 자신을 바라보는 군장이 싫었지만 어미의 손에 끌려 이 댁에 들어온 이상에는 어쩔 수 없다고 포기했다. 그러다 공을 세운 나팔수에게 포상으로 보내지려 한다는 전갈을 듣고 뛸 듯이 기뻤다. 부유하지 않아도 스스로의 삶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에 감격스럽기조차 했다.

 

“군장님의 첩실이 되는 것이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니랍니다. 싸움에 나갔다가 죽게 되면 마님이 우리를 그냥 둘 것 같아요? 그 즉시 모든 것을 빼앗기고 거리에 내쳐져 오갈 곳 없는 신세가 되기 십상이에요. 여염의 아내들도 지아비가 싸움에 나가면 애면글면하여 잠도 제대로 이루지 못하지 않습니까?”
그에 비해 나팔수는 전쟁에 나갈 일이 없으니 죽을 일도 없고 애타게 기다릴 일도 없었다.

 

성주가 잘 보살펴 먹고 입을 걱정이 없는데다, 남편 수발 외에는 낮에는 들에 나가고 밤 새워 길쌈할 필요도, 일할 필요도 없었다. 게다가 다른 계집에게 한눈을 팔거나 주색잡기에 빠져 집안을 들어먹을 걱정도 없었으니 그렇게 좋은 혼처가 없다는 진달래의 생각은 그리 틀리지 않았다.

 

무엇보다 끌리는 것은 나팔수의 성실함이었다. 때를 알리는 나팔을 지금까지 한 번도 거르지 않은 것과 이번에 적을 발견하여 공을 세운 것을 보면 지극히 성실하고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분명했다. 그런 사람의 아내가 되는 것이 왜 나쁘냐는 진달래의 주장에 어미는 가슴을 쾅쾅 치며 외쳤다.


“오냐 그래, 너는 성실한 나팔수 놈의 계집이 되어 잘 먹고 잘 살 수 있으니 무척이나 행복하겠구나! 하지만 나는 어쩌란 말이냐? 지아비 죽고 아들도 없이 늙어버린 나는 누가 데려가서 호강을 시켜줄꼬? 내가 군장 댁으로 들어올 수 있던 것은 오직 너의 자색 덕분이었는데, 네가 나팔수에게 가고 나면 나는 바로 내쳐질 것이 분명하다. 집도 절도 없이 떠돌다가 어느 날 아침 저자거리에서 숨 놓은 시신으로 발견되면 누가 있어 염을 하여 묻어줄 것이냐? 성 밖에 내버려진 나의 시신은 들개와 날짐승에게 뜯어 먹힐 것이니 그래가지고는 저승 문턱도 밟기 어려울 것이다, 서럽다 내 신세야, 애고 애고 어이할꼬,”


진달래는 어미를 끌어안고 울음을 터뜨렸다. 세파를 헤칠 힘이 없는 모녀에게 허락된 것은 서럽게 우는 것 밖에 없었다.

 

"내가 갈 것이다,”
군장이 나서자 부장은 물러났다. 나팔수에게 계집을 데려다주는 따위에 군장이 나서는 것이 이상했지만 굳이 물어볼 필요는 없었다. 나팔수가 한동안 먹고 땔 것과 성주가 특별히 내리는 이부자리 등의 혼수에다 푸짐한 육고기를 더하니 스물에 달하는 군졸이 필요했다.

 

군장은 자꾸만 진달래를 흘긋거렸다. 어미가 눈물을 찍으며 따라오는데 비해 진달래는 그리 슬프지 않아보였다. 오히려 기쁜 기색마저 비치는 진달래의 모습에 군장의 분노가 끓어올랐다. 때려 죽여도 시원치 않을 나팔수 놈에게 계집마저 빼앗긴다고 생각하니 미칠 것만 같았다. 그놈이 있는 곳으로 다가갈 때마다 분노가 갑절로 부풀었다. 

 

꼭대기에 서있던 그의 얼굴이 설핏 찡그러졌다. 아래서 올라오는 무리들이 가져오는 것 가운데 처음 보는 것이 많은데다 계집까지 있는 것을 보니 성주의 뜻을 잘 알 것 같았다. 그러나 이미 그는 아내를 두지 않겠다고 맹세한 몸이었다. 당연히 계집을 받아들이지 말아야만 했지만 성주의 뜻을 거역하는 것 같아 꺼려졌다.

 

번민하던 그에게 죽은 어미의 비참한 삶이 떠올랐다. 무슨 일이 있는지 잔뜩 굳은 표정으로 다가오는 군장에게 나는 계집이 필요없으니 데리고 돌아가라고 말하면 그만 일 것이었다. 그렇게 생각한 그의 눈이 갑자기 찢어질 것처럼 부릅뜨였다. 이쪽을 바라보던 계집과 설핏 눈이 마주친 그는 숨넘어가는 사람처럼 입을 딱 벌리고 어쩔 줄 몰랐다. 군장이 바로 앞에 올 때까지도 멍하게 진달래를 바라볼 따름이었다.


“이놈! 넋이 빠지기라도 하였느냐?”
군장의 호통을 듣고서야 겨우 정신을 수습했다. 그때는 이미 군졸들이 가져온 것을 안으로 옮길 무렵이었다.
“성주님께서 이 계집을 네게 주셨으니 함께 해로해야 할 것이다!”
“아, 알겠습니다.”
“만일 혼인을 하였다 하여 의무에 소홀함이 있다면 크게 징벌당할 것이니 그리 알렷다!”
얼음을 씹어뱉듯 냉혹하게 말한 군장이 군졸들을 호령하여 다시 내려갔다. 남은 것은 진달래와 어미뿐이었다.
 
“서방님께 인사 올리겠습니다. 쇤네는 여기서 살라는 성주님의 명을 받고  온 진달래라 합니다,”
진달래가 큰절을 올리자 그가 당황하여 맞절을 했다. 그것을 본 어미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잠시 후 진달래와 어미가 짐을 풀어 정리하고 부엌에 들어가 살림을 매만지기 시작했다. 그는 이것이 꿈이 아닌가 싶었다.


이번의 나팔은 기쁨이 충만했다. 소리를 들을 줄 아는 자들은 나팔수가 아내를 맞아 정신이 나간 것 같다고 말하면서 오늘밤 계집이 남아나지 않겠다고 농탕을 쳤다. 저녁거리를 장만하는 여염댁들도 얼굴을 붉히며 소곤거렸다.

 

“여하튼 자네와 내 딸이 가시버시가 되었으니 잘 살기를 바라겠네.”

어미가 그리 마뜩치 않은 얼굴로 두 사람에게 말했다. 흐벅진 초례(醮禮)는 아니었으나 육고기와 닭을 삶아 올리고 갖은 채소를 정갈하게 갖추게 된 것은 어미가 부지런을 떤 덕택이었다. 두 사람은 어미가 시키는 대로 절을 하고 부부의 예를 이루어나갔다. 초례를 마쳤을 때는 제법 밤이 이슥할 무렵이었다.

 

두 사람을 신방으로 들인 어미가 초례상에 두었던 육고기를 안주로 마련하여 술상을 보았다.
“나는 밖에서 신방을 지킬 것이니 안심하고 합방하도록 해라. 앞으로 자네는 진달래의 서방으로서 부디 잘 해주기를 바라겠네,”
진달래가 울음을 터뜨리며 어미의 품에 안겼다. 앞으로 다시는 만날 수 없다는 서러움에 모녀는 한동안 말을 잊지 못했다. 진달래를 토닥이며 달랜 어미가 부드럽게 타일렀다.

 
“기왕 이렇게 되었으니 반드시 아들을 낳아야 할 것이다. 아들을 얻지 못한 부부는 갈라지기 십상인데다 특히 너희들의 경우가 여염 같지 않으니 꼭 아들을 낳아 대를 잇도록 하려무나. 합환주를 나눠 마신 다음 바로 합방하지 말고 남정의 양기(陽氣)가 가장 왕성해질 신새벽에 몸을 합치도록 해라. 마음이 급하여 서두르거나 아프다고 하여 몸을 빼어서는 안 될 것이며 방사를 마친 다음에는 목이 마르거나 요기(尿器)가 있더라도 함부로 몸을 일으켜서도 안 될 것이다. 네 서방이 토한 정이 완전히 스며들도록 기다린 다음에 움직이도록 할 것이며 첫 방사를 거친 이후에는 남정의 정이 충분히 고이기를 기다려 이틀이나 사흘에 한 번씩 몸을 합치면 좋을 것이다.”


나가려던 어미가 진달래를 부르더니 뭔가를 쥐어주었다. 그것은 군장이 증표로 던져주었던 은으로 장식한 비수였다.
“줄 것이라고는 이것 밖에 없구나, 비록 성주님이 잘 보살핀다고 하지만 한치 앞을 알 수 없는 것이 세상이다. 모쪼록 잘 간직하여 긴요한 곳에 쓰도록 하여라.”
다시 울음을 터뜨리는 진달래가 어미에게 떠밀려 신방으로 들어갔다. 어미는 밖에 쭈그리고 앉아 눈물을 찍어내었다.

 

“술 더 가져와!"
군장의 호통이 터졌다. 이미 여러 동이를 들이켜 적지 않게 취했는데도 계속 술을 찾았다. 말리던 부인도 포기하여 안채로 돌아갔다.
- 죽일 놈 같으니!
군장이 술상을 내리쳤다. 아랫것들이 겁먹은 기색으로 들어와 박살난 술상을 치우고 새롭게 상을 보았다. 사금파리에 베인 주먹에서 흐르는 피를 바라보는 군장의 얼굴에 잔혹한 웃음이 흘렀다.

 

그가 스르르 눈을 떴다. 이상하게도 나른하게 힘이 모아지지 않았다. 누군가가 옆에 누워 있는 것을 보고 기겁하여 일어나다가 어제 초례를 치렀다는 것을 깨달았다. 옷을 벗지 않은 것으로 보니 신방을 치른 것 같지 않았다. 합환주를 마신 것까지는 기억했는데 그 이후가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초점이 모아지지 않는 눈에 창문이 비쳤다. 어이없게도 태양이 떠오른 한참 다음이었다. 그제야 아침 나팔을 불지 않았다는 것에 생각이 닿았다. 꿈에서조차 늦잠을 생각하지 못했던 그가 격심한 혼란에 빠졌다.
“썩 나오지 못하겠느냐!”

먼 천둥 같은 고함이 터졌다. 겨우 일어서는 순간 마치 허리 아래가 없는 것처럼 허전했다. 진달래도 비틀거리며 일어서서 겨우 밖으로 나갔다. 나가자마자 군졸들이 달려들어 거칠게 꿇렸다. 기가 막힌다는 표정의 성주 옆에 군장이 개구리를 삼키려는 구렁이 같은 눈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2007.09.18 09:30 ⓒ 2007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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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권 출판을 목표로 하는 재야사학자 겸 작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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