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만은 제 말 듣고 그대로 눌러 계세요"

내 인생의 스승, 어느 학부모

등록 2007.09.19 10:03수정 2007.09.19 1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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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반가운 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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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편함 내 글방 우편함은 언제나 우편물을 기다리고 있다. ⓒ 박도

▲ 우편함 내 글방 우편함은 언제나 우편물을 기다리고 있다. ⓒ 박도

산골마을에는 찾아오는 이가 드물다. 그래 가장 반가운 손님은 우체부다. 그러다 보니 하루에 한 차례씩 들리는 우체부 오토바이소리는 언제 들어도 반갑다.

 

오토바이 소리가 집 앞에서 멈추다가 이어지는 날이면 우체부가 우편함에다가 편지를 넣고 간 날이요, 그 소리가 먼 곳에서부터 이어지다 그대로 잦아지면 편지가 없는 날이다.
 
나는 우체부 오토바이 소리가 집 앞에서 멎으면 하던 일을 제치고 우편함으로 간다. 그러면 우편함에 두어 통의 우편물이 담겨 있게 마련이다.

 

그 우편물을 꺼내 살펴봐도 반가운 편지가 있는 날은 드물다. 요즘은 겉봉 주소부터 손수 볼펜이나 만년필로 쓴 우편물보다 거의 인쇄된 우편물이 대부분이다.

 

우편물은 카드 회사나 전화국, 한전, 위성 TV 등에서 보낸 통지서나 고지서, 이런저런 단체에서 보낸 초대장, 회보, 월간지 등으로 그 가운데 광고 우편물은 아예 뜯지도 않고 버리기도 한다. 그러다가 정말 가뭄에 콩 나듯이 친필로 써 보낸 편지를 받고는 감격하는데, 주로 나이 드신 은사나 옛 친구들이 보낸 편지다.

 

그분들이 한지에다 붓으로, 또는 편지지에다 볼펜이나 만년필로 써 보낸 편지를 읽을 때는 수십 년을 익힌 술을 마신 듯, 그윽한 기분에 젖게 마련이다. 그래서 행여나 그런 요행을 바라며 우체부 오토바이 소리를 뒤쫓아 우편함으로 가지만 번번이 속게 마련이다.

 

철 지난 모기장
 
오늘은 오토바이 소리가 집 앞에서 멎더니 발자국소리와 함께 “계세요?”하는 우체부 목소리가 들렸다. 이런 날은 등기우편물이나 택배가 있는 날이다. “예, 나갑니다”라고 대답을 하고는 후딱 마당으로 나갔다. 낯익은 우체부는 활짝 웃으면서 “오늘은 택배가 왔습니다”라고 하기에 우편배달 확인란에다 서명을 해주고는 우편물을 받았다.

 

우편물을 뜯자 서울에 사는 한 학부모가 보낸 모기장과 벌레 물린데 바르는 약이었다. 그들 내외분은 지난 주말 안흥 산골 내 집으로 찾아오셨다. 그때 내 얼굴이 모기와 벌레에게 몇 군데 물린 걸 보고 간 다음에 모기장을 사서 보낸 것이다.

 

올 여름은 날씨가 뒤죽박죽이요, 여름 내내 비가 내렸다. “처서가 지나면 모기도 입이 삐뚤어진다”는데, 올 여름은 모기들도 바닷가 장사꾼들처럼 한철 재미를 보지 못해 독이 몹시 올랐는지 이즈음도 바깥이나 텃밭으로 나가면 가미가제 특공대처럼 벌떼로 덤볐다.

 

나는 서울에서도 산동네에 살았기에 모기나 벌레들에게 보시를 많이 했다. 가족 중, 유독 내 피가 달고 맛있는지 가장 많이 물렸다. 그런데도 야단법석을 떨지 않고 적당히 보시하면서 그동안 살아왔다.

 

따님이 학교를 졸업한 지 20년이 넘도록 옛 담임선생을 챙겨준 내외분이 그지없이 고맙다. 그분 내외는 따님이 학교를 졸업한 후, 우리 내외와는 정작 딸보다 더 가깝게 지냈다. 내가 서울 구기동 살 때는 등산 때마다 들르고는 아예 우리 동네로 이사 와서 이웃사촌으로 몇 년을 사시다가 다시 연희동으로 갔다. 그러다 보니 자연 서로 집안 쌀뒤주 속까지 알게 되었는데, 내 인생길에 스승 역할을 여러 번 하셨다.

 

어디를 가나 미운 사람이 있기 마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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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 산골을 찾은 김석관, 현부자 씨 내외 ⓒ 박도

강원 산골을 찾은 김석관, 현부자 씨 내외 ⓒ 박도

1990년대 초 그 무렵 나는 직장에서 상사와 알력으로 몹시 불편하던 차 마침 한 입시학원에서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다. 한창 고심 중 마침 그분 내외가 오셨기에 상의했더니 깜짝 놀라며 만류했다.

 

“선생님, 어디를 가나 사람이 많으면 미운 사람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걸 피하거나 극복하는 게 삶의 지혜입니다. 학원에 가면 돈은 더 벌 수 있을 테지요. 하지만 학원에 가면 제자가 없을 겁니다.

 

저희 내외가 선생님이 좋은 집에 사셨더라면 그동안 찾아뵙지도 않았을 겁니다. 이번만은 제 말 듣고 그대로 눌러 계세요.”

 

그냥 인사로 만류하는 게 아니라 매우 적극적이며, 일부러 내 집으로 찾아와서 극구 만류하는지라 내 들뜬 마음을 주저 앉혔다. 그 뒤로부터 오늘까지 나는 늘 그분의 사려 깊은 충고에 감사하고 있다.

 

사람은 어떤 고비에서나 갈림길에서 그때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운명이 달라진다. 현자(賢者)를 만나 바른 길을 찾을 수도, 그와는 달리 우자(愚者)나 악인(惡人)을 만나 맨홀이나 낭떠러지에 떨어지기도 한다. 그 현자는 부처나 공자, 예수와 같은 성인일 수도 있지만 예사사람일 수도 있다.

 

우리가 평생 걷는 길에는 도처에 갈림길이 있고, 뚜껑 없는 맨홀도, 덫도 있다. 자기 혼자서는 매번 갈림 길에서 바른 길을 찾아가고, 맨홀에 빠지지 않으며 덫에 걸리지 않고 평생을 살기란 좀처럼 어렵다. 그런데도 현대인들은 현자에게 길을 묻지 않고 스스로 자만하다가 인생길을 그르치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다.

 

사람에게는 바른 길로 안내해 주는 스승, 곧 현자가 곁에 있어야 한다. 현자는 꼭 많이 배우고 지위가 높은 사람만이 아니다. 예사사람 가운데도 현자는 얼마든지 있다. 나는 연희동 내외분을 만날 때마다 내 인생에 훌륭한 스승을 만난 듯하여 무척 행복하다.

2007.09.19 10:03 ⓒ 2007 OhmyNews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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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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