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송정에서 내려다 본 해란강곧게 뻗은 해란강이 드넓은 초록 벌판을 적시며 흐르고 있다.
서부원
어쩌다가 소나무 한 그루가 정자마냥 덩그러니 이곳에 남게 되었을까. 어떤 것이든 유적이나 유물 그 자체로 가치 있는 경우는 드뭅니다. 그것이 자리한 곳과 주변 경관과의 관계가 훨씬 더 중요합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보자면 일송정은 그 대표격이라 할 만합니다.
광대무변. 이곳에서 내려다본 전망은 거침없이 후련합니다. 여기에 서면 그 누구라도 드넓은 벌판을 품어 안으며 '말 달리는 선구자'의 호연지기를 길렀을 법합니다. 물론, 친일 작가로 잘 알려진 윤해영이 1933년 '용정의 노래(선구자의 원제)'를 발표할 당시 이곳은 일제의 괴뢰 만주국의 관할이었습니다.
많은 친일시를 남긴 작가의 행적은 그만두고라도, 이때가 일제 헌병들의 혹독한 탄압으로 이 지역 항일독립운동의 기운이 꺾인 시련의 시기였으니, 그가 어떤 장면을 보고, 또 어떤 의도로 이 시를 썼는지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마치 항일독립운동가의 투철한 민족의식을 표현한 노래로 알려지고, 또 널리 애창되는 우리의 현실을 보노라면, 시로 된 노랫말조차 어떻게 왜곡된 채 해석되고 주입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듯해 씁쓸하기만 합니다.
벤치가 놓인 정자에서는 우리나라에서 온 개신교 선교 단체의 행사가 한창입니다. 기타 반주에 실린 찬송가가 메아리처럼 퍼져 나가고 있었습니다. 찬송이 끝나니, 이곳이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을 구원하셨음을 증거 하는 역사의 현장이라는 인솔자의 강론이 이어졌습니다.
그곳에 있었던 시간 내내 정자 바깥에 데면데면하게 서서 야외 예배를 지켜봐야 했습니다. 이곳이 길러낸 독립운동가 모두가 개신교 신자였다며, 그들의 독실한 신앙심을 본받아 이곳을 선교 1번지로 삼겠다고 합니다.
예배를 지켜보면서 종교와 민족이 어디에서 어떻게 만날 수 있는지 자꾸만 혼란스러워졌습니다. '서시'를 되새기고, 문익환 목사와 강원룡 목사의 치열한 삶을 떠올리면서, 지금 일송정에서 예배 중인 '그들'과 과거의 '그들'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도무지 겹쳐지지 않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