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인종차별 투사가 미국서 간디를 역설한 까닭

[해외리포트] 인구 5만의 작은 미국 대학 도시 찾은 데스몬드 투투

등록 2007.09.23 17:23수정 2007.09.24 1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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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마하트마 간디 글로벌 비폭력상'을 받은 뒤 수상연설을 하는 투투 주교.

'마하트마 간디 글로벌 비폭력상'을 받은 뒤 수상연설을 하는 투투 주교. ⓒ 한나영


"지금과 같은 완고하고 냉소적인 세상에서 우리가 가장 존경하고 경외하는 인물은 마초나 공격적인 인물, 또는 성공한 사람이 결코 아닙니다. 그런 인물을 기대했을지 모르겠지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존경하는 인물은 바로 마더 테레사나 달라이 라마, 마하트마 간디, 넬슨 만델라와 같은 분들입니다."

자신의 안일과 영화를 추구하는 대신 낮고 소외된 자들을 평생 섬겨온 인물을 가장 존경할 만한 인물로 꼽은 데스몬드 투투(Desmond M. Tutu) 주교. 그는 폭력과 증오가 난무하고 있는 이 시대에 평화와 사랑을 전파하는 평화의 메신저로, 사랑의 실천가로 칭송을 받는 인물이다. 

1984년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아파르트헤이트(인종분리정책)에 반대하는 투쟁을 벌여온 공로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투투 주교는 지난 21일 '국제 평화의 날'을 기념하여 미국 버지니아주에 있는 해리슨버그를 방문했다. 이곳 제임스메디슨 대학교(JMU) '마하트마 간디 센터'에서 수여하는 '마하트마 간디 글로벌 비폭력상'을 받기 위해서였다.

인구 5만명이 채 안 되는 작은 대학 도시 해리슨버그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인물의 방문을 맞아 술렁거렸고 대학 홈페이지와 지역 일간지는 며칠 전부터 그의 소식을 연일 보도하기도 했다.

a  투투 주교를 보기 위해 일찍부터 와서 자리를 메운 청중.

투투 주교를 보기 위해 일찍부터 와서 자리를 메운 청중. ⓒ 한나영


행사장인 컨보케이션 센터 앞에는 행사 시작 두 시간 전부터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장사진을 이뤘다. 길게 줄을 선 사람 중에는 특히 자녀를 대동한 부모들이 눈에 많이 띄었는데 인근 브리지워러에서 온 조디 모라(Jodie Morra)는 11살인 어린 초등학생 딸을 데리고 온 이유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세계 평화를 위해 애쓰고 있는 투투 주교를 직접 만나볼 수 있는 좋은 기회니까요. 제 딸도 이다음에 이 분과 같이 세계 평화를 위해 일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두 개의 초대형 스크린을 통해 영화 <간디>가 식전 행사로 상영되었고 로넨 젠 주미 인도 대사와 린우드 로즈 총장 등 많은 내외 귀빈들이 이번 행사에 참석했다. 이날 식장에서는 간디가 즐겨 불렀다는 인도 전통 노래도 연주됐고 투투 주교에게는 세계 평화에 이바지한 공로로 명예 박사학위가 수여되었다.


a  투투 주교는 JMU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다.

투투 주교는 JMU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다. ⓒ 한나영


a  간디가 즐겨 불렀던 인도 전통 음악을 연주한 인도 사람들.

간디가 즐겨 불렀던 인도 전통 음악을 연주한 인도 사람들. ⓒ 한나영


투투 주교는 '마하트마 간디 글로벌 비폭력상'을 받은 후 '선한 것이 강한 것'이라는 제목의 연설을 통해 철옹성 같았던 남아공의 아파르트헤이트가 붕괴한 것도 바로 선한 것이 승리한 결과라고 말했다.

"아파르트헤이트에 대항하여 싸울 때 우리는 이 정책을 지지했던 사람들과 모든 불의, 악이 너무나 견고하여 우리가 한계에 도달했다고 느꼈던 적이 여러 번 있었습니다.


그때 우리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세상이니까 하나님이 알아서 해 주실 거야.' 하지만 하나님 귀에 대고 이렇게 속삭이고 싶었던 적도 많았습니다. '하나님, 당신이 책임져야 할 세상인데 왜 가만 계시는 겁니까?'라고.

결국 우리는 이렇게 결론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사는 곳은 도덕적인 세상이야. 비록 우리가 악이나 불의, 억압이 종식되게 할 수 없을지는 몰라도 궁극적으로는 정의와 선이 우세하게 될 거야.'

우리의 이런 믿음이 옳았다는 건 아파르트헤이트가 무너지고 자유와 민주주의가 제자리로 돌아오게 된 현실이 명백하게 입증해 주고 있습니다."

투투 주교는 악이 실재하고 불의와 억압, 고통이 우리 삶에서 두드러진 특징이라는 점을 과거 역사를 통해 설명하기도 했다.

"나치 독일의 홀로코스트나 스탈린의 소련 굴라그(정치범 강제 노동 수용소), 그리고 스페인과 포르투갈, 민주주의의 요람이라는 그리스에서도 독재가 자행되었던 것이 최근의 현실이었습니다. 또한 대학살이 자행되었던 (수단) 다르푸르 사태나 소말리아, 르완다 등의 아프리카와 대부분의 라틴아메리카, 인도네시아, 필리핀, 버마 등의 아시아 국가 등에서도 군사 독재가 횡행하고 있는 현실이 이를 입증해 주고 있습니다."

이런 암울한 현실을 보면 선한 세상이 도래할 것인지에 대해 의구심이 들기도 하지만 투투 주교는 결국은 선이 승리할 것이라고 확신하며 그 근거를 역사에서 찾고자 했다.

"오늘 받은 상이 마하트마 간디의 이름을 딴 상이라는 사실을 대단히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는 유색인종이라는 이유만으로 정치적인 권리를 누리지 못하는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거의 20년의 세월을 보냈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심한 차별을 당했지만 마음속에서 끓어오르는 의로운 분노를 사티아그라(Satyagraha)라는 비폭력 저항 운동으로 승화시켰습니다.

간디는 그곳에서 연마한 비폭력 저항운동을 영국의 식민지였던 모국 인도에서 활발하게 펼치게 됩니다. 결국 인도는 독립을 획득하게 되었고 식민지 세력이 주도권을 잡고 있던 자신의 나라에서 민주주의와 자유가 널리 퍼지도록 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간디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아프리카민족회의(ANC) 의장인 넬슨 만델라와 미국의 빛나는 인권 운동가인 마틴 루터 킹 주니어에게도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처음에는 이 분들 역시 자신들이 처한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기 어려워 실패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결코 실패하지 않았습니다. 이분들은 모두 예외 없이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반면 스탈린, 피노체트, 아민, 히틀러, 무솔리니, 마르코스, 아파르트헤이트의 불의를 자행했던 자들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이들은 지금 현대사에서 인간쓰레기, 인간 말종으로 취급받고 있지 않습니까?"

투투 주교는 이러한 역사의 사필귀정을 예로 들면서 선한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세상은 분명 도덕적인 세상입니다. 이러한 제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증거는 수없이 많습니다. 악, 부정, 불의가 종식될 수 있게 할 방법은 없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승리하게 될, 그 단어들에 대응되는 영광스러운 말은 바로 정의, 자유, 선입니다."

투투 주교는 마지막으로 마더 테레사, 달라이 라마, 마하트마 간디, 넬슨 만델라 등이 존경받는 이유는 그들이 선하기 때문이며 그들의 존재 자체가 우리의 마음을 기쁘게 해주기 때문이라고 했다. 우리가 인간이라는 사실을 기분 좋게 느끼도록 해 주는 사람이 바로 이들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진정 선한 일을 하도록 지음 받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웃음과 온유함, 보살핌, 나눔과 동정심을 지니도록 만들어졌습니다. 바로 도덕적인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죠. 그렇습니다. 선한 것이 바로 강한 것입니다."

a  기자간담회가 열리는 '마하트마 간디 센터' 앞 잔디밭으로 걸어 들어오는 투투 주교.

기자간담회가 열리는 '마하트마 간디 센터' 앞 잔디밭으로 걸어 들어오는 투투 주교. ⓒ 한나영


가까이에서 본 작은 거인, 데스몬드 투투 주교
기자가 가까이에서 만나본 데스몬드 투투 주교는 기자보다 작은 키(160센티가 조금 넘는)에 체구도 자그마한 인자한 할아버지였다. 올해 76세인 투투 주교는 21일 밤 7시의 본 행사에 앞서 오후 4시부터 40분 동안 제임스메디슨 대학교 '마하트마 간디 센터' 앞 잔디밭에서 기자간담회를 열었다. 그는 이 자리에서 각종 현안에 대한 기자들의 질문을 받았다.

투투 주교는 종교와 전쟁에 관한 질문을 받고 이렇게 답변했다.

"전쟁을 조장하는 종교는 없는 것으로 안다.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종교, 기독교, 유대교, 불교, 힌두교, 이슬람교 등은 사랑과 돌봄, 자비 등을 장려하려고 애쓴다. 종교는 마치 칼과도 같아서 좋다고도 나쁘다고도 할 수 없다. 좋기도 하고 흉기가 될 수도 있다. 종교 자체로는 가치중립이다."

간담회를 마치고 일어서는 투투 주교에게 다가가 기자는 한국에서 온 기자임을 밝히고 최근에 논란이 되었던 아프간 사태와 관련하여 선교와 선교사의 역할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하지만 투투 주교에게서 시원한 답변을 듣지는 못했다. 그냥 두루뭉술한 원칙적인 답변만 들었을 뿐.

투투 주교는 저녁 강연에서 대단히 젊고 활기찬 모습을 보여주었다. 거동이 다소 불편한 듯 했지만 강연 도중에 간간히 유머도 섞어가며 춤을 추기도 하는 등 익살스러운 모습을 많이 보여 청중에게 박수갈채를 받았다.

투투 주교를 가까이에서 보며, 나이는 노년이로되 기운과 정신은 아직도 팔팔한 청년임을 느꼈다. 세계 평화를 위해 할 일이 아직 그에게 많이 남아 있기 때문이리라.

투투 주교 연설은 다음을 클릭하여 볼 수 있다.
투투 주교 연설 보기

#데스몬드 투투 #아파르트헤이트 #남아프리카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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