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신용위기 사태, 정치권에서 벌어진 일은?

영국인의 정치인 비난이 배부르게 들리는 이유

등록 2007.09.26 09:55수정 2007.09.26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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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에 공부한다고 머물러 있는지 5년째인 어느 날, 집에 잠시 머무를 일이 있어 심심한 김에 BBC <뉴스24>를 틀어보았다. 마침 최근 영국을 강타한 노던 락(Northern Rock)발 신용위기 사태에 대한 국회 재무위원회(Treasury select committee)가 열려 생중계 중이었다.

 

재무위는 영국은행(Bank of England)을 추궁하기 위한 자리였다. 한국 같아서는 으레 '국민들에게 사죄하세요'라고 윽박지르는 국회의원과 머리를 조아리기 바쁜 은행장의 모습이 뻔한 자리였지만 영국에서 벌어지는 풍경은 사뭇 달랐다. 세계대전 이후 최장 안정 경제성장이라는 신노동당의 경제신화를 휘청하게 만들었던 이번 사태였지만 이에 대응하는 모습은 나에겐 영국 정치의 기본역량을 다시금 확인하게되는 또 한번의 기회이기도 했다.

노던 락발 신용위기란 무엇인가. 노던 락은 군소 금융기관에서 공격적인 사업모델로 단숨에 상위 (모기지) 대출기관으로 뛰어오른 금융계의 신화였다. 그 공격적인 사업모델이란 호황속 금융시장에 기대어 자기 자본금에 기반하지 않고 은행간 대출로 돈을 끌어들여 시장에서 가장 싼 이자로 모기지 상품을 내놓아 선풍적인 인기를 끈 것이다.

 

이런 고위험 사업모델이 당연 미국 서브프라임 사태 한번으로 휘청하게 된 것은 그리 놀랄 일도 아니었다. 이 사태로 은행들이 은행간 대출을 꺼려하게 되자 이내 노던 락의 자금줄이 막혔고, 결국 영국은행이 긴급 자금을 수혈하기에 이르렀다. 이 소식을 들은 저축고객은 갑자기 몰려와 예금액 전액을 찾아가는 극심한 혼란속에 며칠만에 수조원이 인출되고, 그 파급이 다른 루머에 시달리는 금융기관으로 확산될 조짐까지 나타났다.

신노동당 경제신화 휘청한 노던락 신용위기 사태, 국회 재무위가 열리다

결국 사태 확산을 막기위해 정부는 전면적인 개입을 안할 수가 없었다. 재경부(HM Treasury)가 나서서 노던 락 예금 전액을 특별히 정부가 보장해준다고 선언했고 (원래 예금도 보장 상한선이 있었다) 영국은행도 수십조 원을 금융시장에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그제서야 패닉 상태의 상징이었던 노던 락 전국 지점앞 끝이 보이지 않던 인출 행렬은 사라졌고, 확산 일로에 있던 영국 금융 위기는 한시름을 넘겼다.

 

그러나 이처럼 예상이 충분히 가능했던 노던 락의 고위험 사업모델을 뻔히 보고도 그것이 미국 서브프라임 사태로 휘청할 것이라는 것을 충분히 예상하고도 손을 놓고 있었던 영국은행에 대한 비난은 오히려 들끓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서 영국은행장을 불러놓고 열린 국회 재무위이니, 윽박지르는 국회의원과 머리 조아리는 은행장의 모습같은 '한국형' 국회를 내심 생각했던 것은 나로서는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실제 벌어지는 장면은 사뭇 달랐다. 노던 락의 위험신호를 감지했을때 사전에 조치를 안했던 책임을 추궁하는 국회의원에게 은행장이 또박또박 '개별 금융기관은 영국은행의 책임이 아니다'라고 분명하게 답변하는 것이 귀에 확 들어왔다. 그러면서 조근조근 영국은행의 조치들을 방어해갔는데 전체적인 요지는 이러했다.

과거에는 국가가 모든 권한을 쥐고 있었다. 그래서 만약 과거에 이런 일이 일어났으면 재경부나 영국은행이 전국 은행장들을 모아 놓고 회의를 해서 "누가 이 부실금융기관을 인수할 지 논의한 후 언론에는 최종적으로 어느 금융기관이 위기였지만 누구누구가 인수하기로 했고 그래서 모든 고객의 예금은 안전하다…", 이렇게 발표했을 것이고, 따라서 지금과 같은 패닉상태도 없었을 것이라는 거다.

 

하지만 그동안 정부는 꾸준히 금융시장을 자율화하고 투명성을 높여왔기 때문에 현행 제도하에서는 그러한 일사분란한 조치가 가능하지 않았고, 따라서 영국은행은 시장이 스스로 해결하게끔 맡겨놓을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지금은 더 큰 위기를 막기위한 정부와 영국은행의 강력한 조치로 위기를 넘겼지만 현행 체제가 위기상황에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이 이번 사태에서 드러났듯이 지금 해야 할 것은 현 정책 방향을 재점검하는 일이라고 주장했다.

윽박지르기 없는 살벌한 논리싸움, 위기에 대한 근본적 질문이 던져지다

하나하나가 지당한 말씀이니 서슬퍼렇던 국회의원들도 일정부분 수긍할 수 밖에 없었다. 물론 상황이 그리 싱거웠던 것은 아니었다. 은행장들의 과거 발언록이나 회의 내용, 회람 내용들을 잔뜩 들고나온 국회의원들은 논리정연하게 방어하는 은행장의 틈새를 끊임없이 공격했다. 영국 정치 문화가 그러하기에 가끔 농담을 한번씩 날리고 한번씩 웃어주는 것을 잊진 않았지만 은행장과 국회의원간의 논리싸움은 살벌하기 그지 없었다. 무대뽀식 윽박지르기가 설자리 없는 이런 환경이니 은행장이 논리적으로 자신을 방어하고 이번 위기의 재발을 막기위한 근본적 질문을 던지는 것이 가능했을 것이다.


뒤이어 재경부는 은행장의 문제제기에 적극 동의하고 현행 시스템에 대한 전반적인 재검토 작업을 시행할 것임을 발표했다. 우선 예금금액 보장에 대한 상한선을 폐지하는 방안이 제기 되는 등 논의는 하나씩 진행되고 있다. 혹은 필요할 경우에는 영국 정치에서 많은 사례가 그렇듯이 공공조사(Public inquiry)가 진행될 수도 있을 것이다.

 

독립된 인사들을 정부가 지명해 진행되는 공공조사는 상당한 기간동안 전반적인 연구검토과정을 거쳐 종합적인 권고안을 내놓는다. 얼마전 영국이 발칵 뒤집혔던 구제역 사태도 2002년 큰 홍역을 치뤘던 구제역 사태 뒤에 진행된 공공조사의 권고안을 충실히 따른 결과 과거와 같은 늑장 대응과 같은 실수는 반복되지 않았다(물론 현재 새로운 구제역 사태가 또 터지긴 했다. 원인은 아직도 조사중이다).

영국의 정치는 물론 완벽하지 않다. 가끔 여기서도 이해할 수 없는 정부의 정책이 버젓이 시행되기도 한다. 그리고 문제가 심각해지도록 제대로 손대지 않아 악화되는 문제들도 적지 않다.

 

하지만 그저 당리당략적 싸움에 매몰되기 보다는 합리적 논리와 토론의 공간이 활짝 열려있는 영국 정치의 모습을 보면 그래도 영국사회는 어느 선 이상은 넘지않고 나름의 해법을 찾아나가고 문제를 해결해 나가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즉 사회가 막나가지 않을까하는 걱정은 하지 않도록 정치적 안전막이 작동을 하는 것이다.


합리적 토론 공간이 열려 있는 영국의 정치권, 공익에 대한 기본 자세는 있다

얼마전 고든 브라운이 새 총리로 들어설 때 새롭게 내세웠던 의제가 주거문제였다. 주택가격이 계속 상승하면서 새롭게 독립하는 젊은이들이 더이상 자기 집을 마련하기 힘든 상황에 이르렀기 때문에 적극적인 주거정책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그런 소리를 들으면서 우리나라는 젊은이들이 자기 능력으로 집을 마련하는 것이 불가능해진 것이 도대체 언제였던가 하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여전히 우리나라에는 공급중심의 '주택시장' 정책만 존재할 뿐, 국민의 주거를 보장하는 차원의 '주거정책'은 여전히 생소한 개념이다.

어쨌든 영국에서는 사회문제가 극단적 상황에 이르기전에 제도 정치권에 그 문제가 제기되고 적극적 대응책이 모색되는 안전막이 작동을 하는 셈이다. 이런 안전막의 기반은 정치인들이 스스로 아무리 권력을 지향하더라도 공공의 이익에 대한 자신의 의무를 인식하고 있으며 이 의무에 대한 자신의 믿음을 바탕으로 성실하게 활동하는 기본적 태도에 기인한다.

여기 있는 친구들과 얘기하면 이 친구들도 정치인을 욕하고, 비난한다. 하지만 그런 소리들이 배부르게 들리는 것은 아마 척박한 정치의 나라에 사는 국민의 비애가 아닐까. 대선을 앞두고 국민들의 메뉴판에 올라있는 것이라곤 6~70년대 개발지상주의와 선별주의적 복지제도를 짬뽕한 이른바 '신발전체제'만이 유일하고, 그나마 눈에 띄는 '사람중심 진짜경제'는 아직 아무 양념이나 소스가 없이 주재료만 덩그러니 나와있으니 주문이 가능할 지는 아직 의문이다.

 

비전이나 내용은 커녕, 남은 것도 별로 없어 보이는 정치적 지분싸움으로 전락한 소위 '범여권'을 보고 있자니 이들에게 정치인으로서의 기본적인 '직업윤리'라도 남아있나 싶다. 도대체 어디까지 가야 희망의 물꼬를 볼 수 있을까.

덧붙이는 글 | 김보영 기자는 영국 요크대학에서 박사과정으로 정책발전에 있어서 정치사상의 역할에 대하여 연구하고 있습니다.

이기사는 제 블로그(http://idea.borongs.net)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2007.09.26 09:55 ⓒ 2007 OhmyNews
덧붙이는 글 김보영 기자는 영국 요크대학에서 박사과정으로 정책발전에 있어서 정치사상의 역할에 대하여 연구하고 있습니다.

이기사는 제 블로그(http://idea.borongs.net)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영국 #신용위기 #영국정치 #이명박 #문국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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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대학교 지역및복지행정학과 교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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