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 여성들이여 주권 이후를 생각하라

이덕주의 〈한국교회 처음 여성들〉을 읽고서

등록 2007.09.26 17:37수정 2007.09.26 1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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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책 겉그림 이덕주의〈한국교회 처음 여성들〉책 겉그림입니다.

책 겉그림 이덕주의〈한국교회 처음 여성들〉책 겉그림입니다. ⓒ 홍성사

▲ 책 겉그림 이덕주의〈한국교회 처음 여성들〉책 겉그림입니다. ⓒ 홍성사

한국교회는 지난 선교 2세기와는 달리 새로운 흐름을 꾀하고 있다. 그 중 최우선으로 꼽는 게 있다면 여성을 높이 세우는 일이라 할 수 있다. 목사와 장로를 비롯하여 교회 내 갖가지 중책들을 여성에게 맡기고 있다. 이는 교회 내 80% 이상이 여성이라는 점과 21세기 여성 중심 시대를 감안한다면 좋은 현상이라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자칫 그것이 교회 내 이권다툼으로 변질된다면 크나큰 걱정거리가 아닐 수 없다. 아니 그런 일들은 이미 썩은 폐부처럼 기생해 온 게 사실이다. 이미 교회 내 특정 여성들은 암암리에 자기 세를 과시해 왔고, 끼리끼리라는 특정계층 모임도 주도해왔다. 결코 있어서는 안 될 일반화된 교회 내 현상이다.

 

이덕주가 쓴 한국교회 처음 여성들〉은 우리나라 한말, 일제시대, 그리고 해방 후 6·25로 연잇던 시대에 복음을 통해 무지에서 눈을 뜬 교회 여성들이 가정과 사회를 어떻게 변혁시켰는지, 비운에 처한 나라를 어떻게 바로 세웠는지 낱낱이 보여주고 있다.

 

우리나라 한말 시대에는 남성중심 가부장제 사회였다. 이는 교회 내 여성들도 다르지 않았다. 남존여비사상과 남녀칠세부동석은 교회 내에 팽배한 기류였다. 하여 예배당 건물도 그 당시에는 ‘ㄱ자로 된 예배당’ 을 지었고, 그곳에서 모임을 가질 때에도 한 가운데 휘장을 쳐 놓고 남녀를 구분하기도 했다.

 

물론 그 당시 여성들이 바깥출입을 한다는 것 자체가 용납되지 않았다. 바깥출입은 오직 남자들이 추구하는 몫이었기 때문이다. 어쩌다 여자들이 바깥을 나갈 경우엔 가마를 대동하거나 긴 천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런 시대에 여자가 예배당에 나간다는 것은 크나큰 용기를 지니지 않고서는 감행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 와중에 평남 강서군 강서면에서 양반집 딸로 태어난 전삼덕(全三德)은 교회 내 남녀 간 평등을 최초로 연 여성이라 할 수 있다. 그녀는 벼슬하는 남편을 따라 여러 고을을 돌다가 끝내 남편과 함께 고향 땅에 정착한다. 하지만 젊은 첩을 들인 남편에게 충격을 받아 ‘예수교’에 대한 소문을 듣고 새 삶을 찾는다. 그래서 남편과 시집 식구들의 눈총을 무릅쓰고 가마를 타고, 멀리 80리 평양에 있는 의료선교사 홀의 집까지 찾아가 복음을 듣는다.

 

2년 동안 복음을 접한 뒤, 그녀는 스크랜톤 선교사로부터 세례를 받는다. 세례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모든 욕망을 꺾는 시간으로서, 세례자가 수세자에게 물을 끼얹는 의식으로 거행된다. 남녀칠세부동석인 그때에 서양 남자에게 얼굴을 보이고 세례를 받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여 택한 것이 ‘휘장 세례’인데, 방 한 가운데 쳐 놓은 휘장에 머리 하나 들어갈 수 있는 구멍을 낸 후에, 세례를 행한 것이었다.

 

“이 구멍을 통해 남녀 간의 평등대화가 시작되었다. 전삼덕의 방 한 가운데에 쳐진 휘장과 그 가운데 뚫린 구멍은 기나긴 세월 동안 가부장적 사회 인습과 체제에 매여 있던 여성들의 해방을 선언하는 거대한 혁명의 첫 돌파구였다.”(27쪽)

 

세례는 그렇듯 여성해방의 돌파구가 되었다. 그런데 머잖아 그 세례가 여성에게 주권을 되찾게 하는 계기로 발돋움하게 된다. 이른바 ‘아무개 부인’, ‘아무개 어머니’, ‘끝년이’ 등과 같이 이름 없이 지내던 여성들이 세례를 통해 세례명까지 얻은 게 그것이다. 가히 여성들이 세례를 통해 ‘이름 있는 존재’로 거듭나게 된 것이었다.

 

그런 흐름들이 여성 주권을 되찾는 계기였다면 이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민족과 나라를 살린 진취적인 여성도 있었다. 일제 때 나라를 살리는 운동으로 절제운동을 벌였던 손메례라는 여성이 그녀다. 당시 일제는 일본의 퇴폐 문화를 조선에 이식해 정신을 흐리게 했다. 술과 아편, 공창이라 불리는 향락문화가 그것이다. 바로 그와 같은 흐름에 반기를 든 여성 절제운동의 효시가 손메례였다. 그녀는 1915년경부터 이화여자보통학교에 나가 성경과 가사를 가르쳤는데, 1923년 국내에 절제운동이 소개되자마자 그것을 모든 강연의 중심 주제로 삼았다.

 

물론 그녀가 한 강연은 과학적이고도 논리적이었다. 이를테면 강연 중에 생달걀을 접시에 깨어 놓고서 거기에 알코올을 부어 흰자가 익어가는 과정을 보여줬다. 그만큼 술이 독하다는 산교육이었다. 또한 당시 가구당 월급이 30원도 되지 않았는데, 일 년에 주세로 총독부에 들어가는 돈이 38,429,170원이라는 경제적인 수치까지 예로 들었다. 그러니 믿지 않는 사람들까지 감명을 받고 절제운동에 참여한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었다.

 

“사실 손메례의 절제운동은 민족주의 성격이 강했다. 삼일운동 후 침체된 민족에 활기를 띠게 해 준 것 가운데 하나가 민중계몽운동이었다. 금주·금연·공창폐지 등을 주제로 한 절제운동도 역시 민중 계몽의 성격을 강하게 띠면서 일제의 정신적·문화적 침략에 저항하는 민족운동으로 발전했다.”(161쪽)

 

그리고 의병의 아내로서 남편과 민족의 한을 풀어주기 위해 일평생 조국 광복투쟁에 몸을 바친 남자현(南慈賢)이라는 부인도 있었다. 그녀는 단발령과 명성황후 시해 등에 항거하는 의병투쟁에 남편이 뛰어들어 전사하자 때를 기다렸고, 마침내 남대문 교회를 중심으로 전개된 거족적인 자주독립 시위에 참여하였다. 그 무렵에 그녀는 개종하여 세례를 받았고, 뒤이어 만주 일대로 건너가 독립운동에 몸을 담았다. 그러던 중 한국인 순사에게 체포됐으나, 오히려 그를 꾸짖고 권면하여 여비까지 받고서 석방된 일도 있었다.

 

“내가 여자의 몸으로 이같이 수천 리 타국에 와서 애씀은 그대와 우리의 조국을 위함이어늘  그대는 조상의 피를 받고 조상의 강토에서 자라나서 어찌 이 같은 반역의 죄를 행하느냐?”(225쪽)

 

지난 세기와 달리 오늘날 한국교회는 여성이 그 중심무대에 서는 추세다. 가히 바람직한 일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자칫 보이지 않는 암세포처럼 자기 세를 과시하고, 자기 지지계층 모임을 주도하는 꼴로 변질된다면, 욕망 다툼을 하는 남성들의 세계와 하나도 다를 바 없는 현상이요, 분명코 세상으로부터 지탄받게 될 일이다. 그런 여성 주권회복이라면 한낱 의미없는 메아리로 남지 않겠는가?

 

하여 여성파워 시대를 향해 달려가는 현대판 교회 여성들이 진지하게 추구해야 할 바가 무엇인지, 가정과 민족과 나라를 바로 세워야 할 바가 무엇인지, 이 책을 통해 진지하게 되물었으면 한다. 그리하여 이 책에서 보여준 이정표처럼 현대판 한국교회 여성들이 자기 주권만 되찾고 강화한 것으로 끝나기보다, 주권 이후에 추구해야 할 바른 이정표를 남다르게 제시해 갔으면 하는 바람 간절하다.

2007.09.26 17:37ⓒ 2007 OhmyNews

한국 교회 처음 여성들

이덕주 지음,
홍성사, 2007


#한국교회 여성들 #바르고 곧은 이정표 #한국교회 처음 여성들 #여성 해방의 돌파구 #절제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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