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 우리글에 대한 자긍심을 갖자!

한글날의 의미를 되새기며

등록 2007.09.29 11:24수정 2007.09.29 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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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사람만큼 외국어를 막무가내로 사용하는 민족이 또 있을까 하는 생각을 종종 해보곤 한다.

아파트 이름에 '해피하제', '해피트리', '래미안(來美安)', '아이파크(I PARK)' 등과 같이 외국어 냄새를 풍기는 이름이 즐비하고, 코스닥 등록기업의 대부분이 이런 식으로 외국어로 된 업체명을 사용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외국어 이름을 붙여야 고급스럽게 보여 아파트 분양이 잘 되고, 주식값도 잘 오르니 어쩔 수 없이 이름을 그렇게 짓는다고 한다.


뿐만이 아니다. "옷차림이 야하다"라는 말을 들으면 못마땅해하면서도, "옷차림이 섹시하다"는 말을 들으면 흡족해한다고 한다. 똑같은 의미의 단어가 우리말로 표현되면 천박하게 여겨지고, 영어로 표현되면 왠지 멋지게 여겨지는 모양이다.

이삼십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일간지에서 느닷없이 김종필씨를 JP로 표현한 것을 시발점으로 연차를 두고 거의 모든 신문에서 김대중씨를 DJ, 김영삼씨를 YS, 박태준씨를 TJ로 표기하기 시작했다.

폐쇄된 공간도 아닌, 국민이면 누구나 보는 신문에서 이런 영문 첫 글자를 따서 인명을 과감하게 사용하는 기자들의 양식을 의심하면서 이를 조속히 시정해 줄 것을 요청하는 취지의 글을 신문사에 투고한 적이 있다. 그러나 나의 요구가 받아들여지기는커녕 이제는 한 수 더 떠서 이명박씨를 MB로 새롭게 표기하는 것을 보면서 허탈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다.

미국인들조차 George W. Bush 대통령을 칭할 때 영문 첫 글자(initial letter)를 따서 GWB로 사용하지 않는데 우리는 영어권 국가가 아니면서도 DJ, MB 등의 영문자를 격에 맞지 않게 남용하고 있으니 한심한 노릇이 아닐 수 없다. 지금이라도 그냥 김대중씨, 이명박씨로 표기하면 훨씬 더 보기에 좋을 텐데 말이다.

속칭 '삐삐'가 한창 유행할 때 '무선호출기'를 '삐삐' 또는 'p.p'로 표기한 명함을 받을 때마다 삐삐의 정확한 영어표기는 '휴대용 소형 무선호출기'라는 의미의 페이저(pager)이므로 '삐삐'를 '무선호출기' 또는 '페이저'로, 'p.p'를 'pager'로 표기하는 게 올바른 표기라며 상대방을 설득하던 기억이 떠오른다.


세월이 흐른 지금 또한 많은 사람들이 휴대전화를 핸드폰(hand phone)으로 표기하고 있는데 이 또한 잘못된 표현이다. 휴대전화의 정확한 영어표현은 셀룰러폰(cellular phone), 셀폰(cell-phone) 또는 모바일폰(mobile phone)이다. 우리나라 사람들 중 더러는 친절(?)하게도 '모바일 폰'을 한글로 번역한답시고 '손전화'라는 말을 사용하기도 하는데 어이없는 난센스가 아닐 수 없다.

생각해보라. 유선전화건 무선전화건 손으로 받지 않는 전화가 어디에 있는가, 모든 전화는 손으로 받게 되어 있음에도 구태여 휴대전화를 손전화로 표기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핸드폰",  "H.P" 또는 "손전화"로 표기하는 것은 모두 틀리게 사용된 것이므로 "휴대전화", "휴대폰", "이동전화", "모바일 폰", "셀폰" 또는 "셀룰러폰"으로 표기해야 할 것이다.


오래전부터 필자는 핸드폰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을 상대로 용어를 정확하게 가려서 쓸 것을 권고했는데 그때마다 그들은 편리하고 뜻만 통하면 되지, 그렇게 별스럽게 따져가며 사용할 필요가 있느냐며 반문하곤 했다. 과연 그럴까?

유명한 외국어 학원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캐나다인(한국어를 전혀 알지 못함)이 체납임금 건으로 나의 사무실을 찾은 적이 있다. 이 외국인 강사는 해고되었기 때문에 강제출국을 해야 하는데 출국 전에 체납임금을 꼭 받을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했다.

내가 '출입국관리사무소'에 전화를 걸어 이 외국인 강사의 사정을 얘기한 후 소송기간을 감안하여 체류기간을 연장해 줄 것을 요청하니, 그곳에서는 서식을 보내 줄 테니 작성해서 다시 보내 달라는 것이었다.

다음날 캐나다인 영어강사가 내가 근무하는 사무실에 다시 내방하여 '체류 연장' 서식을 적어내려 가던 중 H.P라고 적힌 난에 자신이 거주하고 있는 오피스텔 전화번호를 적어 넣고, PHONE(전화번호)란에 휴대폰 번호를 기재하는 것이 아닌가. 호기심이 발동한 필자가 H.P란에 왜 거주지 전화번호를 적었느냐고 물어보니, 이 외국인 강사는 H.P는 당연히 홈폰(home phone)의 약자이므로 그렇게 적었다고 했다.

내외국인의 출입국을 관리하는 '출입국 관리사무소'에서 조차 이토록 엉터리 영어를 아무 생각 없이 사용하는 것이 부끄러워 즉시 '출입국 관리사무소'에 전화를 걸어 바르게 고칠 것을 권유하니 직원은 좋은 지적을 해줬다며 잘못된 표기를 곧 고치겠다고 했다.

인쇄업을 하는 친구가 내 명함을 두통 새겨왔을 때, 명함 하단에 핸드폰(H.P) 이라고 적힌 게 몹시 눈에 거슬려 사용하지 않고 있다가 얼마 전에 모두 쓰레기통에 버렸다. 명함은 자신을 드러내는 표상의 일부라고 할 수 있는데 잘못된 글자가 찍힌, 퍽 마음에 내키지 않는 명함을 경제적 효용가치만을 따져 어떻게 그대로 상대방한테 건넬 수 있겠는가.

외국에서 공부한 유학생이 귀국하여 제출한 자기소개서에 "저는 California 주립대학에서 2년간 공부했습니다"라고 적은 것을 읽은 적이 있다. 이 유학생이 "저는 캘리포니아 주립대학에서 2년간 공부했습니다"로 적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입장을 바꾸어 미국에 공부하러 간 한국유학생이 자기소개서에 "나는 서울에서 왔습니다"를 'I am from 서울'로 썼다면 미국교수가 뭐라고 했을까. 그 교수는 당장 'I am from Seoul'로 고치라고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한국을 소개하는 외국 사이트에 한국인들이 사용하는 언어가 한글이 아닌 한자어(중국어)로 기재되어 있다는 기사를 읽고 하루종일 기분이 찜찜했던 생각이 난다.

외국인들로 하여금 이런 오해를 불러일으키게 한데에는 우리들의 책임도 크다 할 것이다.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우리나라 일간 신문에는 한글과 한문이 심하게 혼용되어 사용되고 있었으니 외국인들이 "한국인의 언어는 한글이 아닌 중국어 또는 한문"이라고 오해할 만도 했으리라.

<경제자유구역 指定계획 더 다듬어야>, <국민신상 • 진료紀錄 마구 새고 있다니>, <정상회담에 國民이 부담 느끼는 이유>…. 최근의 신문사설 제목을 그대로 옮겨본 것이다. 과거에 비해 한자사용이 많이 줄긴 했지만 위의 문장에서 굳이 한문을 사용할 필요가 있었느냐는 의문이 생기기는 마찬가지다. 

물론 한자어가 국어사전 표제어의 과반수를 차지하는 현실을 감안하면 한자나 한문을 무시할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한글만으로 의사소통이 잘 되지 않을 때 그 의미를 보충하는 도구로써 한자를 사용해야지 한글만으로 뜻이 통하는데도 굳이 한자를 혼용해서 사용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을 것이다.

굳이 한자를 사용하는 경우라 할지라도 <경제자유구역 지정(指定)계획 더 다듬어야>, <국민신상 • 진료기록(紀錄) 마구 새고 있다니>, <정상회담에 국민(國民)이 부담 느끼는 이유> 등과 같이 한자가 우리글을 보충 설명하는 도구로 사용되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한자에 괄호를 쳐서 처리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내가 이 글을 쓰는 것은 어설픈 민족주의에 함몰되어 한글을 영어나 한자보다 높이 평가하거나 한글과 외국어의 관계를 상충관계로 보아 한글제일주의를 내세우기 위해서 그러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우리말과 글에 대한 자긍심을 버린 채 문화사대주의에 빠지는 현실이 부끄러워서이다.

"아름다운 나날"(내가 사는 아파트의 이름)과 같은 훌륭한 한글 아파트 이름이 있음에도 한글과 영어가 혼합된 “해피하제(happy하제: 행복하제?)” 같은 어설픈 외국어 아파트 이름이 판을 치는 풍토가 개탄스러워 하는 말이다.

글로벌시대를 맞이하여 의사소통의 중요성을 절실히 깨닫게 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외국어를 배우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먼저 자기 나라의 말과 글을 올바로 사용하면서 외국어를 익혀야지, 모국어에 대한 자긍심을 내동냉이 친 채 어법에도 맞지 않는 외국어를 남용하면서 외국어 발음을 유창하게 한답시고 애꿎은 혀 밑 절개 수술이나 하면서 외국어를 열심히 배운다 한들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

금세기 내에 소수민족의 수많은 고유 언어가 사라질 것이라고 한다. 우리말과 글이 그러한 운명에 처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한글을 잘 보존하여 그 우수성과 아름다움을 세상에 널리 알리고 후손에게 자랑스럽게 물려주는 도리를 다해야 할 것이다.
#한글 #우리말 #우리글 #외국어 남용 #아파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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